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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3.26 오래된 과거, 강력한 현재


#1.
며칠 전부터 동대문구 일대엔 묘한 플랜카드가 곳곳에 걸려있다. “부자급식 중단하고, 저소득층 급식 지원 확대하자.” 아침 출근길 건널목에 서 있는데 옆의 아주머니들 하시는 말씀. “그니까... 왜 돈 있는 얘들한테도 공짜로 밥을 준다는거야?” “그럴 돈 모으면 없는 애들 급식비 더 싸지잖아.”한동안 여러 일들로 잠시 잊고 있던 ‘보편 급식’이란 이슈가 이젠 언론에서도 사라지고, 트위터에서도 찾기 힘들건만 이렇게 동네 구석구석에서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이것저것 다 관두고 내 관점에서 정리하면 이런 얘기다. 저 플랜카드의 호소력이란 “모두가 똑같이 낸다고 생각하는 세금으로 돈 많은 얘들 밥까지 챙겨줄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읽히면서 그 힘을 발휘한다. 도대체 저소득층의 기준이 어디까지이고, 그런 기준을 어떻게 만들며 그 기준을 받아들이는 아이들의 마음이 어떨지는 너무 많은 얘기들이 나왔으니 또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겠다. 단지 모두가 알 만한 사실 몇 가지가 확실하다. 급식예산을 편성할 서울시 예산은 서울시민 모두가 똑같이 낸 세금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 이면에는 부자/저소득층이라는 고리타분한 분열 전략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2.
1970년 초 뉴욕. 좋건 싫건 지난 20여 년 동안 미국의 복지체제는 두 바퀴로 굴러갔다. 한 축은 공무원들까지 포함하는 조직화된 노동자들의 투쟁이 얻어낸 복지 시스템과 또 한축은 급격한 도시화로 불거져 나온 이민자, 소수인종, 빈민들의 ‘사회질서교란행위’로부터 당시로선 새로운 유형의 사회운동들의 요구들을 틀어막기 위해 지급했던 복지 시스템이 그것이다. 전자는 연방정부의 몫이었고, 후자는 지방정부(주)의 몫이었다. 1970년대 초 오일쇼크로 격발된 공황의 파고는 뉴욕시로 하여금 자신이 감당해 할 복지비용을 빚(채권)을 내며 충당했다. 문제는 1975년 2월 뉴욕시가 추가로 발행하려던 채권을 은행가협회에서 더 이상 못사주겠다며 버티면서 시작됐다. 다급해진 뉴욕시는 대부분의 자본가들까지 끌어들인 이른바 “비상재정관리위원회”를 만들면서 진화에 나섰다. 어쨌든 시의 돈이 없으니 긴축재정의 이름으로 복지지출과 공공서비스 노동자(병원, 학교, 교통, 청소, 공원 노동자 등)들을 쳐내면서 그 비용을 줄이고, 공공요금은 올려버렸다. 문제는 채권이었다. 뉴욕시가 이 채권을 처리한 방식이야 말로 기가 막혔다. 공무원들 중 감원을 피한 이들의 연기금으로 이 채권을 사버린 것이다. 다시 말해 복지 시스템의 한 축을 이루던 조직 노동자들의 복지급여를 떼어내어 다른 한 축인 ‘없는 놈들’의 복지비용을 충당한다는 말이었다. 그 결과는? “모두가 똑같이 힘들게 버는데 내 돈이 그 빈둥대는 놈들한테 들어가?”란 말이 대세가 돼버렸다. 이렇게 시작된 노동계급의 분열전략은 실로 성공적이었다. 1980년대 우리가 지금 기억하는 대도시 뉴욕, 그러니까 “I ♥ NY”라는 저 유명한 로고는 이처럼 끔찍한 분열전략의 공세가 성공한 이후 자랑스럽게 거리에서 휘날리게 되었다.

#3.
1970년대의 뉴욕과 2011년의 서울은 분명히 다르다. 그럼에도 적어도 담론의 수준에서만큼은 부르주아 담론의 고유함, 즉 동어반복이라는 속성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40여년 전 뉴욕에서는 “빈둥대는 놈들한테 내 돈을 줄 수 없어”였다면, 2011년 서울에서는 “잘 버는 놈들 밥값까지 내가 왜 내주나?”로 바뀌었을 뿐이다. 욕을 할 사람과 욕을 먹을 사람들이 뒤바뀌긴 했으나, 문제는 복지시스템이 결국 우리 모두의 임금으로 버텨간다는 것, 그리고 그 복지시스템을 둘러싼 소위 정책 논쟁이란 이렇듯 철저히 계급 내 분열을 목표로 한다는 점은 동일하다. 정확히 말하면 이런 담론 전략은 “계급 내 분열”이 아니라 “부자와 저소득층”이라는 또 다른 계급 정체성, 닫힌 정체성의 창출이다. 오래된, 그러나 여전히 강력한 계급투쟁과 담론의 정치. 어디까지가 정치이며 경제이고, 어디까지가 실천이며 담론인가.

Posted by WYW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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