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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7.18 써야 하는 글과 쓰고 싶은 글



벌써 두 달 반이 훌쩍 지났다. 그 동안 몇 편의 기획서와 보도자료를 썼고, 요즘은 한 프로젝트 보고서의 몇몇 장들을 써내려가고 있다. 정말 오랫동안 내 자신이 문제를 만들고, 그 답을 쓰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던 때와 달리, 누군가로부터 주어진 문제를― 그것도 조금의 변형도 용납되지 않는 문제에 ―이미 나올 것은 다 나온 답들을 조합하여 글을 쓰는 일은 아직도 영 서툴기만 하다. 처음 한 달은 낯설면서도 익숙한 보고서의 ‘문체’에 내 문체(이런 게 있다면)가 적응하지 못한 것이 힘겨움이었다면, 이제는 내가 원하지 않거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주어진 문제와 씨름하는 일이 또 다른 힘겨움임이 되고 있다. 적어도 “쓰고 싶은 글”을 더 많이 써왔던 내게 “써야 하는 글”이 주는 압박이란 그저 회사일의 차원이 아니다. 사고의 깊이와 폭은 분명히 머릿속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표상되는 형식에 의해서도 한계가 지워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쓰고 싶지 않았는데...”라는 생각이 반복되면, 오직 이게 아니라는 빈약한 부정만이 남고 처음 쓰고 싶었던 내용과 형식은 망각에 묻히고 만다.
예를 들어 “써야 하는 글”은 이런 식이다.

“새로운 미디어 플랫폼들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주파수의 희소성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무선 인터넷 환경의 확대를 통해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하려는 이동통신사들의 경쟁은 얼마 전 국회를 통과한 전파법 개정을 통해 가능해진 주파수 경매로 인해 더욱 격화될 전망이다. 따라서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2013년 디지털 전환 후 주파수 대역 재배치 계획에서 고품질과 높은 효율성을 가진 기존 방송 주파수 대역은 더 이상 공적 서비스의 토대가 되기 힘들 수도 있다. 그러나 해외 사례가 보여주듯, 어떤 나라도 전면적인 주파수 경매제를 도입하고 있지는 않으며 정책기관과 이해당사자인 사업자 간의 협의와 조정을 거쳐 다양한 할당방식과 용도를 정하고 있다. 주파수의 제한된 대역을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무수한 기술적 가능성들이 미래에 전개된다 해도 이러한 협의와 조정이 배제된다면 공적 서비스로서의 방송을 위한 주파수 확보는 영원히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만일 이 글이 내가 “쓰고 싶은 글”이었다면, 이렇게 썼을 것이다.

“방송 콘텐츠를 비롯한 ‘비물질 상품(immaterial commodity)’의 생산과 유통에서 상당히 간과되어 온 부분은 바로 현 시기 테크놀로지의 기술적 한계이다. 현재 가능한 주파수 대역의 활용 기술은 바로 이러한 한계를 잘 보여준다. 주파수는 그 대역의 성질에서부터 일정한 자연적 한계를 갖는다. 1GHz 이하 저대역(VHF와 UHF) 주파수의 특성은 적어도 지금까지의 테크놀로지로서는 극복하기 힘든 자연적 한계이다. 따라서 이 주파수를 통해 유통되는 비물질 상품은 분명한 ‘지대(rent)’의 성격을 갖는다. 바로 여기서 주파수를 ‘국민의 자산’이라거나 ‘희소자원’이라 부르는 모호함이 극복된다. 좋은 대역의 주파수를 거래함으로서 얻게되는 방통위의 ‘기금’이나 사업자의 ‘이윤’은 그 실현에 있어 분명히 사회 총잉여의 한 부분임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 지대의 확보를 둘러싼 자본간 경쟁은 임노동 소득의 분배 몫 할당을 포함하는 사회적 투쟁의 다른 형태이다.”

더 많은 정교화가 필요한 구절이지만, 이 글쓰기는 앞에 나온 ‘주파수의 희소성’을 ‘지대’로, ‘협의와 조정’은 ‘사회적 투쟁’으로 몇 단어를 바꾸는 작업이 결코 아니다. 첫 번째 글은 나 역시 경쟁 중인 행위자들 중 한 쪽의 입장에서 서서 그 확보 방안이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두 번째 글은 사업자간 경쟁 자체가 자본과 노동 사이의, 또한 잉여의 분배를 둘러싼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투쟁의 한 외양임을 전제로 하고 있다.


어떠한 명분과 자기 합리화를 동원하더라도 생계를 위한 글쓰기와 그 생계의 지겨움을 넘어서려는 열망이 담긴 글쓰기는 분명히 다르다. 지난 두 달 반 동안 배운 새로운 사실이 있다면, 이러한 두 가지 글쓰기는 ‘구국의 결단(!)’과 같은 치기어림으로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할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두 글쓰기의 분리가 늘 존재한다는 현실에 대한 인정과 그 간극의 확인은 보고서와 기획서 작성 속에서 빈약해져만 가는 부정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점이다.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써야 하는” 글을 부정하는 짓은 오래 갈 수 없을 뿐 아니라 결국에 가선 내가 부정해야 할 대상 조차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Posted by WYW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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