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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7.11 “경제적, 사회적 문제는 여기서 취급하지 않습니다.”

“해답을 요구하는 충동 이론에 관해 말하자면, 우리는 정신분석학자들을 요리사에 비유할 수 있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음식물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오로지 충동이라는 매운 양념에 대해서만 골몰하고 있다. 그들은 신비로운 개념을 동원하여, 인간의 여러 충동들을 살아있는 인간의 육체에서 일탈시키고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형성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리비도, 혹은 권력에 대한 의지, 원초적 디오니소스와 같은 우상들이며, 무엇보다 이러한 우상을 절대화시키는 입장이다. 기실 인간의 몸이란 그 자체를 보존할 뿐, 다른 어떤 것을 지니려고 하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도 절대화된 우상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인간의 몸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하기에 프로이트, 아들러 그리고 융은 그것을 ‘경제적, 사회적 전제조건의 변수’로서 한 번도 토론하지 않았던 것이다.”(E. Bloch, 2004: 131)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는 무엇인가? 욕망(desire)이나 욕구(need)니 하는 엄격한 학문적 개념 구분을 하지 말고 질문의 방향을 바꾸어보자. 우리는 어떤 이들을 볼 때 가장 동정심을 느끼는가? 아마도 그 동정심이 깊을수록 내 자신에게는 그러한 결핍이 없다는 안도감 또한 깊을 것이며 바로 그것이 우리의 기본적인 욕구가 무엇이었는지를 돌아보게 해 줄 것이다. 여기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사랑을 잃고 몇 날을 슬픔과 자학 속에서 보내고 있다. 또 한사람은 바로 굶주린 사람이다. 한 발짝을 내딛을 힘도, 구걸할 소리를 지를 힘도 없이 거리의 한 모퉁이에서 쓰러져 있는 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동정심에 깊이가 있다면 누구를 더 동정하겠는가? 우리는 실연의 아픔으로 죽은 이들에겐 “왜 그랬나, 좀 이겨내지...”라고 할지언정, 굶주려 죽은 사람에겐 도저히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성욕’이라 했던 정신분석학이 방기한 욕구, 혹은 보려하지 않은 욕구가 바로 ‘식욕’, 달리 말해 ‘배고픔’이다. 흥미롭게도 이 ‘배고픔’과 ‘성욕’이라는 두 욕구를 어떻게 충족시키거나 통제할 것인지에 대한 답은 오늘날까지도 화해하기 힘든 학문의 두 갈래로 이어져왔다. 무의식에 자리한 성욕과 이를 억압하는 자아와 초자아, 그리고 이 억압의 우회로인 욕구의 ‘승화’가 풍성한 문화의 자양분이 된다는 정신분석학의 주장은 무의식의 구조, 상징과 의미에 대한 분석, 그리고 넓게 보자면 소위 ‘상부구조’라 불리우는 분야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의 흐름으로 이어져왔다. 반대로 배고픔의 기원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를 어떻게 충족시킬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물질적 재화의 생산과 분배에 대한 분석으로, 곧 ‘토대’라 일컫는 영역을 다루는 정치경제학의 분야에서 이뤄져왔다.

이런 구분을 너무 지나친 단순화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프로이트 시대 오스트리아 빈의 정신분석상담소와 당대의 정신분석학자들에게 배고픔은 그들의 문제가 아니었다. 빈에서 자살하는 이들의 90퍼센트가 생활고 때문이었음에도, 목놓아 배고픔을 호소하는 그 어떤 이도 상담소의 환자가 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정신분석상담소의 벽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 “경제적, 사회적 문제는 여기서 취급하지 않습니다.” 결국 당시 정신분석상담소를 찾던 이들은 중산층 이상의 출신들이었고, 이들을 상담하면서 정신분석학자들이 접한 욕구는 은밀한 성충동과 성도착에 대한 괴로움, 그것도 “위선적인 말투와 생각”으로 자아에게 검열당하고 있던 리비도였을 뿐이다. 그에 비해 프롤레타리아의 배고픔은 명료하고도 거짓이 없었다. 어차피 그들의 욕구는 안락의자와 소파가 놓여 진 거실에서 상담해야 할 “유복한 자들의 병”이 아니라, 거리에서 분노와 좌절로 토해내야 할 “고상하지 못한 괴로움”이었던 것이다.(ibid: 135)

“유복한 자들의 병”이라는 말처럼 프롤레타리아의 병과 부르주아의 병은 확연히 구분된다. 오늘날로 비유한다면 집세 걱정 없이, 다음 날 급여가 제때 들어올지에 대한 걱정 없이 살아가는 이들 또한 병을 앓고 힘겨움을 느낀다. 그러나 이들의 힘겨움은 “유복한 자들의 병”이기에 그 해법은 사적인 곳에서 은밀하게, 때로는 뇌물과 같은 어둠의 경로에서만 찾을 수 있다. 달리 생각하면,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의 병은 증세의 문제로 진단된다기보다 그들의 호소가 들려오는 장소와 그 해법의 차이로 밝혀질지도 모른다.

배고픔의 장소와 해법에 대한 이야기는 이것을 대상으로 삼았던 정치경제학의 흐름을 또한 돌아보게 한다. 정신분석학이 간과한 ‘배고픔’이라는 고통과 그 충족에의 욕구를 정치경제학은 어떻게 다루었던가? 이왕 저지른 과도한 단순화를 더 밀고 가보자. ‘토대’ 혹은 ‘경제’라는 배고픔의 장소는 그 욕구의 파악이 양과 척도로 측정가능한, 그리하여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의 너무도 다른 ‘배고픔’은 효용(utility)의 이름으로 동질화되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프롤레타리아의 노골적인 고통과 분노는 또 어떠한가? 이들의 솔직함과 난폭함이 거리에서 폭발할 때, 이는 자본주의 경제의 필연적인 ‘산물’이며 그렇기에 조금 더 나은 인간적인 자본주의를 향한 과도기이자, ‘계획된 사회주의’로의 경로로만 취급되어 왔다. 정신분석학이 ‘성욕’을 전면에 내세우며 “인간의 여러 충동들을 살아있는 인간의 육체에서 일탈”시켰듯이, 정치경제학은 배고픔과 그 갈망의 문제를 인간이 어쩔 수 없는 ‘경기순환’과 ‘축적체제’라는 이름으로 다시 추방시켜 버리지는 않았는가? 결국 배고픔을 다루었던 ‘토대’와 ‘경제’에 대한 학문의 흐름 또한 그 해법이 사적이고 은밀하지 않은 대신, 인간 주체의 갈망과 희망이 결여된 제도와 구조라는 물신(fetish) 속에 가두어 버리고 말았다.

[주]
이 글은 요즘 읽고 있는 E. Bloch(1959), Das Prinzip Hoffnung, Frankfurt am Main: Suhrkamp; 박설호 옮김(2004), 희망의 원리, 서울: 열린책들 의 독서노트입니다. 글 중간의 페이지와 인용은 모두 별도의 언급이 없는 한 이 책에서 온 것입니다. “독서노트”라는 변명이 허락된다면 글의 주장과 내용은 블로흐의 글에 대한 저의 오독과 과민한 반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해서 행여 이 글을 읽으실 때 비판의 대상이나 내용이 모두 블로흐의 것이라고 여기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학습의 습관일지 모르나 그저 텍스트를 눈으로 보는 것과 그것을 읽어내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고 생각됩니다. 텍스트를 읽어낸다는 것은 제가 그것을 또 다른 텍스트로 생산해 내고, 그럼으로써 제 사고의 한계를 스스로 돌아보는 기회를 부단히 만들어 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이후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를 <블로흐 읽기>에 대한 짧은 변명이었습니다.

Posted by WYW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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