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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8.14 지식인과 독서
2021. 8. 14. 16:00

우리는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우리를 찌르는 그런 종류의 책만을 읽어야 한다고 난 생각한다. 만일 우리가 읽고 있는 책이 머리를 치는 일격으로 우리를 깨우치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 책을 무엇 때문에 읽어야 하는가? (…) 우리는 우리에게 재앙과도 같은 영향을 주는,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사랑하는 어떤 사람의 죽음처럼, 모든 이들로부터 멀리 숲속으로 추방당한 것처럼, 자살처럼, 우리를 비탄에 젖게 하는 그런 책들을 필요로 한다. 책이란 우리 내부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기 위한 도끼가 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나의 믿음이다.

카프카(F. Kafka)가 오스카 폴락에게 쓴 편지



카프카가 이 편지를 썼을 때 나이는 스물한 살이었다. 프라하의 독일계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던 시기였다. 문학에 대한 열정과 법학 박사학위 취득이라는 전혀 다른 두 언어의 공간을 왕래하던 그에게 책은 이런 의미였다. 만족을 위한 수단이 아닌 ‘머리를 치는 일격’으로 자신을 깨우치는 책, ‘우리 내부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기 위한 도끼’인 책.

카프카에게 책이 갖는 의미는 오늘날 지식인에게, 특히 한국의 지식인에게도 그러한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사회과학 분야 박사학위 소지자들로만 좁혀서 예를 들어보자. 학위 논문 심사를 받거나 심사를 할 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왜 이 주제를 택했나요?”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흔히 논문 초반에 ‘연구 배경’이나 ‘연구 목적’으로 쓰여 진다. 그러나 여기에 쓰여 지는 문장은 연구자의 내면을 드러내지는 못한다. 전공 분야의 각종 문헌과 선행연구들의 한계, 학문 장 내 논문이 차지하는 위치를 설명할 뿐이기 때문이다.

정작 특정 주제를 택하는 동기는 자신이 흥미를 가졌던 분야의 독서 이력, 자신의 성장 배경이 반영된 사적 관심사거나 때로는- 사실 이런 경우가 더 많은데 -지도교수의 선택인 경우가 부지기수다. 대학 내 위계와 형식을 따라야 하는 학위 논문의 주제 선택은 불가피하다 해도, 연구자로서의 지위를 획득한 이후에도 “왜 내가 이 주제로 글을 쓰고 발언을 해야 하는가?”라는 자문을 하지 않음이 더 심각한 문제다.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란 바로 이 질문에서 시작되며, 모든 독서와 학술 토론회는 부단히 이 질문의 답을 찾거나 질문을 바꾸어 가는 과정이다. 지식인에게 책은 카프카의 책처럼 어떤 연구를 할 것인지, 어떤 문제를 설정할 것인지 고민하는 사유를 위한 ‘도끼’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자신이 읽은 책은 이미 정해 놓은 주제의 글쓰기를 위한 ‘재료’일 뿐이며, 때로는 가설과 결론을 위한 지적 권위- 대표적으로 참고문헌 -로 사용된다.

지식인에게, 특히 인문학과 사회과학 연구자들에게 독서는 논문, 칼럼, 강연 등 자신이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는지, 어떤 행위를 해야 할지, 그 행위가 사회적으로 어떤 효과를 가져 올지 끊임없이 자문하는 과정이다. 이런 이들에게 독서량과 생산하는 텍스트의 양이 비례하기는 힘들다. 사유가 아닌 글과 발언을 하기 위한 재료로 독서를 할 때, 그 글과 발언은 자신의 신념이나 믿음, 또는 기대의 산물일 뿐이다. 그 독서조차 자신의 믿음에 확신을 주거나 찾고 싶은 답을 주는 책만을 대상으로 한다. 지식인 ‘내부의 얼어붙은 바다’는 더욱 단단해지고 그에 호응하는 독자만을 찾아 헤매는 자기만족만이 목적이 된다.

최근 언론중재법 개정안- 소위 언론보도 피해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 -을 둘러싼 학계의 행위를 단순히 찬성과 반대로 나누고 그 배경이 되는 학문적 입장만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개정안이 아니더라도 이미 문재인 정부 기간 동안 숱한 이슈와 쟁점과 관련된 학계 및 지식인들의 토론회, 세미나, 칼럼, 강연 등을 생각하면 과연 한국사회 지식인의 책무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언론개혁’, ‘허위조작 정보’(가짜뉴스), ‘언론혐오’, ‘시민의 요구’라는 추상적이고 도덕적인 용어가 난무한다. 이런 용어들은 그 자체로 사유의 대상이지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지식인은 대중의 직접적 요구의 근거와 합리성을 제공해 주는 사람이 아니라, 왜 그런 요구가 나오는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설령 징벌적 손해배상과 같이 대중의 요구와 일치하는 결론이 나오더라도 그 결론에 이르는 과정은 자신이 가졌던 개념과 이론, 그리고 입장에 대한 부단한 회의의 결과여야 하며, 그 수단이 바로 독서다. 교수나 연구원이라는 사회적 지위는 이런 독서와 사유를 위한 자율성을 주기 위한 사회적 배려이지 권위가 아니다.

분석해야 할 언론의 낮은 신뢰도나 ‘징벌’에 대한 시민의 압도적 지지를 도리어 자기주장의 근거로 삼는 이들에게 과연 지식인이라는 호칭을 붙일 수 있을지 의문이다. 토론회 기사에서 자기 발언이 얼마나 인용되었는지 확인하고, 강연 동영상의 조회수를 자랑하며, 페이스북 응원 댓글에 만족하는 이들이 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언론’이든 ‘시민’이든 지식인이 쓰고 말하는 개념은 철저한 사유의 과정이자 결과여야 한다. 미루어 두었다 최근 다 읽은 데이빗 그레이버(D. Graeber)의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은 내가 사용해 온 개념의 반성과 사유를 위한 훌륭한 안내서였다. 토론회 발표문, 칼럼, 강의 때마다 마음에 걸린 것은 마르크스의 가치(value)와 물신성(fetishism)이었다. “우리 모두가 물신성의 세계에서 산다면, 대안은 무엇인가요?”라는 학생들의 질문은 언제나 나를 망설이게 했다. 이 책은 정리하거나 인용할 ‘재료’가 아니다. 더 많은 책을 읽고, 현상을 더 넓게 볼 수 있는 사유의 수단이다.

지식인에게 독서란 바쁜 일정과 각종 업무 중 여유 있을 때 하는 행위가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다. 이 의무는 결코 ‘언론개혁’과 같은 목적을 정해 놓은 사유 과정의 결과가 될 수 없다. 개념과 범주의 열려짐을 위한 사유 과정은 그 목적지가 어디인지 정하지 않은 모험과 같다. 모험보다 안위를 고민하는 지식인의 사회, 2021년 한국 사회다.

대문에서 그가 나를 가로막으며 물었다. “어딜 가시나이까? 주인나리”, “모른다” 내가 대답했다. “그냥 여기를 떠난다. 그냥 여기를 떠난다. 그냥 여기를 떠나 내처 간다. 그래야만 나의 목표에 다다들 수 있노라.”, “그렇다면 나리의 목표를 아시고 계시는 거지요?” 그가 물었다. “그렇다.” 내가 대답했다. “내가 ‘여기를 떠난다’고 했으렸다. 그것이 나의 목표이니라.”

카프카, <돌연한 출발>

Posted by WYW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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