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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고정된 포지션과 뚜렷하게 임무가 위임된, 오늘날 사라져가고 있는 기계 시대에 속했던 경영조직 내 분화된 직무와 직원 및 계통을 갖는 전문직처럼 한 번에 한 가지씩 일어나는 게임이다. 전기 시대의 새로운 협력하고 참여하는 방식의 이미지 그 자체인 TV가 통일된 의식과 사회적인 상호의존의 관습을 만들어 나간다. 이와 함께 우리는 전문적이고 위치가 정해짐으로써 오는 스트레스를 동반하는 야구와 같은 특정 스타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문화가 변하면 그에 따라 게임 역시 변한다. 초단위로 쪼개지는 시간에 의해 살아가는 기계 시대의 정밀한 추상적 이미지였던 야구는 새로운 TV의 시대에 새로운 우리 삶의 방식과 맺는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연관성을 상실하고 있다. 야구는 사회의 중심에서 퇴출되어 미국적 삶의 주변부로 쫓겨난 것이다.”
맥루한에게서 Hot과 Cool의 구분은 제공되는 정보가 얼마나 인간의 감각을 넓게 확장하여주는가(definition)와 인간이 그렇게 제공되는 정보에 얼마나 참여할 수 있는가(participation)에 달려있다. 그에게서 미디어는 인간이 만들어낸 거의 모든 인공물을 포함하는 까닭에 야구와 축구 같은 스포츠 역시 hot과 cool의 범주로 구분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위의 글처럼 소위 기계시대(전후 포디즘이라 불리우는 자본주의의 황금기)에 적합한 미디어로 Hot 미디어를, 이후 다가올 정보화 시대(포스트 포디즘 혹은 정보화 시대)에 걸맞는 미디어로 Cool 미디어를 언급했다는 점이다.
그의 눈으로 보기에, 야구만큼 기계시대에 걸맞는 스포츠는 없었을 것이다. 각각의 선수들이 정해진 포지션에서 개별적인 임무를 수행하며,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이 없는 야구는 그야말로 각각 기능적으로 자신의 임무를 정확히 수행하는 인간의 기관들이 확장된 형태이며, 선수 개개인은 다른 포지션의 역할에 간여할 수 없는, 참여도가 매우 낮은 Hot 미디어에 속한다. 다분히 포디즘 시기의 선형적인(linear) 노동과정에 대한 비유로 읽혀지는 이같은 설명은 왜 야구에서 "통계"가 그토록 중요하게 다루어지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생산과정 각 부문 노동자들의 손동작 하나까지 시분초로 나누어 통제하려는 테일러식 경영법은 마치 야구에서 방어율, 타율, 투구수 등과 같은 선수 개개인의 통계처리와 유사하다.
맥루한이 바랬던 것은 이러한 기계시대를 지나 부문간 협력과 뚜렷한 직무규정이 없는 전기시대가 도래할 때, 야구와 같은 전형적인 Hot 미디어가 쇠퇴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포지션의 명확한 구분이 없고 선수들의 역할변경이 자주 이루어지는 Cool 미디어, 즉 "미식축구"가 미국에서 야구보다 더 큰 인기를 얻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다가올 전기 시대(electric age)는 명확한 직무구분이 없고 상호의존이 강화되는 팀제와 같은 형태의 노동과정이 요구되며 이러한 문화의 변화에 미식축구와 같은 스타일의 스포츠가 유행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을 지금의 야구와 축구- 미식축구가 아니라 -에 비교해 보면 꽤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능하다. 축구는 포지션 간의 역할변경이 매우 용이하다. 순간적으로 윙백인 이영표가 미드필더로 뛰어도, 웨인 루니가 최종수비를 맡아도 결코 게임의 진행에 어려움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야구에서 이런 짓을 했다간, 그러니까 좌익수와 중견수가 서로 공을 받겠다고 돌진하면 결과는 뻔하다. 나아가 왜 야구에 비해 축구가 보여주는 통계수치가 그렇게 적을 수 밖에 없는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축구에서 선수 개인이 보여주는 득점와 어시스트의 횟수가 아무리 많고, 평점이 높아도 그들을 모아 놓으면 잘 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이게 지구 방위대 "레알 마드리드"가 리그 1위를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위의 인용된 단락 이후의 글들을 보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맥루한은 야구와 같은 Hot 미디어의 범주에 아이스하키, 그리고 방금 얘기한 축구 또한 포함시킨다. 미식축구(Football)와 축구(Soccer)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는 축구 역시 야구처럼 포지션의 구분이 명확한 스포츠로 보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더 이해하기 힘든 것은 소련을 前기계시대에서 기계시대에 막 접어드는(아마도 초기 자본주의 단계에서 산업화로 이행되는 시기) 나라로 규정하면서 소련인들이 야구와 축구에 열광하는 이유를 찾고 있다는 점이다. 그에게서 미디어의 Cool과 Hot의 구분은 라디오와 영화 같은 미디어의 구분을 넘어 자본주의 발전양식의 구분으로 이행되며, 이 발전단계에서 미국은 소련보다 앞선 단계를 겪은 나라로 그려진다.
새로운 미디어가 출현할 때 마다 맥루한은 늘 주목을 받아왔다. 장기파동 혹은 경기순환처럼 그의 이론은 주기를 반복하며 새롭게 읽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글을 다시 읽으며 그람시가 트로츠키를 향해 한 말이 떠올랐다. 그람시는 영구혁명에 관련된 트로츠키의 "예언"을 두고 "어떤 사람이 네 살짜리 여자아이를 보고서 '저 아이는 어머니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는 그 아이가 스무 살이 넘어 실제로 그렇게 되었을 때, '내 그럴줄 알았느니라'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혹시 맥루한의 '주기적인 부활'은 그의 글들이 끊임없이 새로 태어나는 미디어에게 적용하기 가장 쉬운 예언이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