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차피 새벽잠이 없는 나에겐 요즘 월드컵 중계만한 재미가 없다. 게임도 게임이지만, 가끔씩 튀어나오는 캐스터와 해설자들의 입담도 그런 재미 중 하나다. 얼마 전 브라질의 조 첫 경기를 중계하던 MBC의 해설자(아마도 서형욱인듯)는 수비수 4명을 제끼고 드리볼을 하는 호나우딩요의 모습을 두고, “저런 건 언어로 표현이 안되죠”라는 말을 했다.
모든 이들에게 축구가 매력적인 것은, 압도감마저 자아내는 스타디움에서 22명의 선수들이 녹색의 그라운드를 누비는 바로 그 이미지 때문이다. 호나우딩요와 같은 한 개인의 천재적인 드리블이나, 4, 5명의 선수들이 일순간 공을 주고받으며 만드는 골은 우리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어떤 것이다. 어디선가 바르트(R. Barthes)는 언어가 갖는 정치성을 지적하면서 “로고스(Logos) 밖에서 정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말은 이미지가 ‘비정치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자, 어떠한 계급의 정치적 이용에도 개방되어 있음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이 ‘이미지’를 그림이나 사진이라는 기호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바르트에게서 이미지란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심적 충격이자 열정을 뜻한다. 즉, 어떠한 언어의 표상도 거부하는 순수한 외연(denotation)인 셈이다.
대부분의 스포츠가 그렇겠지만, 특히나 경기 후 말과 문자로 '복기(復碁)'가 안되는 축구는 어쩌면 가장 이미지에 가까운 스포츠이며 이로부터 수많은 정치적 담론의 투쟁이 벌어질 수 있는 장이 될 수 있다. 더욱이 이 이미지를 산출해 내는 곳이 바로 "스포츠"라는 점에서 축구는 어느 쪽으로 튈지 모르는 무지향의 정치성을 갖고 있기도 하다. 육체에 대한 근대문화의 중요한 산물이 올림픽이었듯이, 스포츠는 자본주의의 필수적인 사회관계, 즉 법적으로 평등한 교환주체들(임금과 노동력의 교환)의 경쟁을 가장 잘 표상해 주는 담론의 영역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평등의 담론은 봉건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이자, ‘개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을 지향하는 공산주의 이념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 이런 까닭에 월드컵이야 말로 사람들에게 거대자본의 마케팅에 질리게 하면서도, 정당한 경쟁과 투지가 발현되어야 할 평등의 장을 바라게 하는 모순의 결정체인 셈이다.
열정으로서의 ‘이미지’와 모순된 담론의 장인 ‘스포츠’의 결합은 월드컵을 이미 “축구 그 이상의 축구”로 만들어 놓았다. 코피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유엔이 월드컵을 부러워하는 이유로 “투명한 경쟁”, “동등한 조건에서의 경쟁”, “민족-국가 간 교류의 이점” 이라고 말하며 신자유주의의 이념을 내비친다. 축구라는 이미지, 아니 “열정”이 주는 비정치성은 때로는 국가주의로, 때로는 압구정동의 난동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스포츠가 가진 평등하고 정당한 경쟁의 이념은 국민소득이 100배 이상 차이나는 아프리카 소국을 응원하게 만들고, 토고전 후반 5분에 프리킥을 차지 않은 한국팀을 비난하게도 한다. 이제 월드컵은 더 이상 축구 평론가들의 언어에 머물지 않게 되었다.
평론가들의 언어가 소외된 자리에 수많은 미디어의 언어와 기업의 언어, 그리하여 자본의 언어가 ‘언어를 거부했던’ 이미지에 부착되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던 스포츠는 균형을 잃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기업들의 대차대조표와 거리응원의 몸살 뿐이다.
몇 명의 벗들과 함께 맥주 한 잔을 두고 허름한 술집에서 트리니다드 토바고를 응원하는 것. 이것만이 유일한 위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