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 3.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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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말하자면 우리는 시간을 공간 속에 투사하여 지속을 넓이로 표현한다. 계기란 그 부분들이 서로 침투됨이 없이 계속 접하는 사슬이나 연추선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순수지속(durée)이란 이와 같이 숫자로 표시된다거나 명확한 윤곽을 가진다거나 하지 않고 상호적으로 침투되어 있는 질적 변화, 즉 순수한 다질성(hétérogénéité pure)에 다름 아니다. ……등질성(homogénéité)이 조금이라도 지속에 부여되면 바로 그 순간 공간이 암암리에 도입되는 것이다.”

(H. Bergson, 『의식의 직접적 소여에 대한 시론』)

“시간은 자신의 질적이며 가변적이며 유동적인 성질을 벗어버린다. 그것은 측정 가능한 ‘사물들’로 가득 찬, 정확하게 한정되고 측량 가능한 연속체로 얼어붙는다…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공간이 된다.”

(Lukács, 『역사와 계급의식』)

  일상이 지겹다고 느껴지는 건, 반복되는 업무나 똑같은 출퇴근 시간 때문만은 아니다. 지겨움은 그 반복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 영원한 반복은 내가 먹고 살기 위해 취하는 모든 행위가 그 행위의 결과와 분리되면서 시작되었다. 내가 만든 의자는 내가 아닌 남이 쓰기위한 것이며, 내가 쓰는 컴퓨터는 누군지도 모르는 타인이 만든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이 낳은 결과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기에, 그리고 그 결과는 타인의 손에 놓여있기에, 난 내 마음대로 내 일의 결과를 정할 수 없다. 내가 하는 모든 행위가 “노동”으로 바뀐 것이다.

  내 행위가 노동이 되기 전, 시간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순수지속. 어제가 오늘을 바꾸고, 내일은 다를 것이라는 희망으로 오늘을 다르게 살 수 있는 시간들, 그래서 시간은 측정될 수 없는 것이었고 지속의 시간이었다. 노동으로 바뀐 내 행위는 시간의 지배에 놓인다. 이 시간은 조각난 시간이며, 셀 수 있는 시간이며, 매번 똑같은 분침과 초침의 똑딱거림의 시간이다. 그래서 내 노동의 댓가는 나누어진 시간의 합계인 ‘월급’과 ‘연봉’이 된다. 시간을 셀 수 있다는 오만함, 그것은 시간을 도마에 놓고 토막 낼 수 있다는 자본의 능력이다. 내 지속의 시간은 공간 위에서 난도질당한다.

  지속의 시간을 단위와 분류라는 추상의 논리로 환원하여 영원한 원환으로 바꾸어 내는 것. 시간을 공간화 시킨 우리의 소비재는 바로 “시계”이다. 초침이 없는, 흘러내리는 시계가 나오는 미래에셋 광고는 기만적인 운동의 표상인 초침을 없애고 그 초침을 가두어 놓은 시계라는 평면의 공간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모두가 바라는 이 지겨운 노동과 자본의 끊임없는 반복을 한 순간이라도 멈추고자 하는 우리의 바람은, 똑딱거리는 초침이 없어도 초침을 상상하게 하는 둥근 공간 속에 가두어진다.

  백화점과 술집에는 시계가 없다. 시간을 멈추고 싶어 하는 우리의 욕망은 눈으로 보이는 초침보다 더 무서운 생산과 소비의 무한한 순환 중 한 마디에 머무르는 것으로 보상받는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그렇다. 우리는 반복되는 자본의 축적과정이 예비한 내일을 결코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그 내일은 시계가 없어도 오늘 보았던 해를 내일 또 볼 것이 확실한 만큼이나 닥쳐 올 것을 알고 있다. 이 순환이 끝나는 내일이 오길, 그 날이 오길 바랬지만 오지 않았다. “우리에게 내일은 오지 않을 것이다.”

  자명종이 울린다. 오늘도 똑같은 하루를 시작하라는 시간의 명령이 내 머리 위로 떨어진다. 다행이 그 명령은 조그만 금속 조각들이 내리는 것이기에, 정말 명령에 따르기 싫을 때면 그놈을 벽에 집어 던질 수도 있다. 시계보다 무서운 일상의 반복, 끊임없이 나로부터 멀어지려는 내 노동의 흔적들. 어쩌다 용기 있게 그 시계와 일상을 벗어난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 용기도 잠시, ‘게으름’, ‘나태함’, 혹은 ‘백수’라는 이름으로 우린 다시 자명종을 꺼내든다. 다시 한숨을 쉬며 시간의 명령 속에서 내가 벗어날 수 없음을 탄식한다.

No Way Out!

Posted by WYW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