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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정념에 신중함(태연함)의 가면을 씌우는 것, 바로 거기에 진짜 영웅적 가치가 있다. “고매한 영혼들은 자신이 느끼는 혼란을 주변에 퍼트려서는 안 된다.”(클로틸드 드보) 발자크 소설의 주인공인 파즈 대위는 가장 친한 친구의 부인을 죽도록 사랑하나, 그 사실을 완벽하게 은폐하기 위해 마치 자신에게 정부가 있는 것처럼 꾸며댄다.
그렇지만 정념을(다만 그 지나침을) 완전히 감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인간이란 주체가 너무 나약해서가 아니라, 정념은 본질적으로 보여지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감추는 것이 보여져야만 한다. 내가 당신에게 뭔가 감추는 중이라는 걸 좀 아세요, 이것이 지금 내가 해결해야 하는 능동적 패러독스이다. 그것은 동시에 알려져야 하고, 또 알려지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내가 그것을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당신은 알아야만 한다. 내가 보내는 메시지는 바로 그것이다. “라르바투스 프로데오(Larvatus prodeo) - 나는 손가락으로 내 가면을 가리키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나는 내 정념에 가면을 씌우고 있으나, 또 은밀한(엉큼한) 손길로는 이 가면을 가리키고 있다. 모든 정념은 결국에 가서는 그 관객을 가지게 마련이다. 죽기 바로 직전 파즈 대위는 그가 침묵 속에서 사랑했던 여인에게 편지를 쓰지 않고는 못 배겼다. 마지막 극적 사건이 없는 사랑의 봉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기호는 항상 승리자이다.
R. Barthes, 김희영 옮김(2004), <사랑의 단상>, 동문선. 72쪽
가면 뒤에 우리가 감추고 있는 정념(passion)은 죽음의 순간까지 보여지지 않으며, 우리 스스로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다. 이 정념은 혼돈과 불안 그 자체이기에 가면을 가리키는 것은 단지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그것을 감추고 있다”는 그 사실 하나이다.(그래서 파즈 대위가 정념을 편지로 썼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정념이기를 멈추었고, 그는 죽었다.)
자본주의는 어떤 사상이나 이념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자, 우리 스스로가 만든 방식이다. 사람들의 행위와 그것이 낳은 결과는 어느 시대건 분리되지만, 자본주의로 우리의 삶을 만들어가는 오늘날, 그 분리는 지속되어 영원한 현실이자 환상으로 다가온다. 이렇게 분리된 삶은 우리에게 “정체성(identity)”이라는 ‘가면’을 씌워주고 그것이 건강한 것이며 당연한 주체라고 믿기를 강요한다. 박사과정이라는 가면, 회사원이라는 가면, 교수라는 가면.... 우리는 이 정체성을 불안해 하거나 그것에 만족하지 않으면서도, 마치 정념처럼 그 가면 뒤에 숨긴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기에 가면을 벗어 던질 수가 없다. 나는 박사과정이면서 박사과정이 아니고, 회사원이면서 회사원이 아니다. 정념은 늘 이렇게 "부정"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결국 우리는 분열된, 손상되고 모래알 같은 주체로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가 그 가면이 바로 나라고 여길 때, 그 가면이 자기의 얼굴이 되길 갈망할 때, 우리는 오만해지고 용감해지며 ‘건강’해 진다. 결국 우리가 주체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정체성이라는 가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나아가는 것(Larvatus prodeo). 그것뿐이다. “지금 내 모습은 내가 알지 못하는 나의 정념을 감추는 가면이라는 것만 알아주세요”라는, 찢기고 분열된 우리들의 호소이자 절규이다. 우리는 그 정념이 무엇인지, 정체성의 가면을 벗었을 때,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마치 우리의 미래가 정해져 있지 않듯이)
하지만 가면을 가리킬 줄 아는 용기. 자신이 찢겨지고 상처받은 주체임을 인정하고 고백할 줄 아는 용기는 쉬운 것이 아니다. 때로는 굳이 가면을 가리키지 않아도, 오래된 벗들과 사람들에게서 찢기고 분열된 그들의 모습을, 가면과 정념의 사이를 본다. 오늘 낮 복도 한 켠에서 본 선배의 허름한 슬리퍼와 티셔츠에서도, 어젯밤 아주 우연히 만난 낯선 한 사람에게서도 손가락으로 가리키지 않는 가면을 보았다. 오래된 노래 가사처럼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 서로에게 고통뿐일 지라도” 외로움의 유일한 위안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생각해 보니, 어젯밤은 모두가 자기의 손가락으로 가면을 가리키며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
ps: - 당신이 지금 쓴 이 글도 가면 아닌가요?
-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가면인걸 알아주시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