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모든 ‘지식인’들은 이론이 이론에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학문의 깊이가 어떠하든, 책상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는 것보다 ‘현실에 참여’하고 자신의 목소리가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꾸기를 꿈꾼다. 어쩌면 이런 지식인들의 정체성이란 이론적 이해의 깊이가 어떻든 남들보다 세상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조금 더’ 잘 알고 있다는 자신감에서 나온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어제 있었던 한국문화연구자들의 논쟁장(캠프 camp)이라는 곳에서 한 발표자의 키노트 스피치는 지식인의 정체성이 이 참여와 실천이라는 기표에 얼마나 집착하는지 너무도 잘 보여주었다.

  그 발표자는 현재 문화연구 진영이 “과학주의, 학문주의”의 과잉, 즉 문화연구 외부에서 던져지는 ‘과학성’과 이론적 정당성의 물음에 대한 답변에 너무 치우치고 있다고 비판했다. 무슨무슨 주의니 하는 말을 굳이 안 써도 문화연구가 사회적 담론과 운동이라는 연구실 바깥의 문제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는 말이다. 해서 이 발표자는 몇 년 전 난리를 쳤던 언론학회의 ‘탄핵방송 공정성에 대한 보고서’ 파동 때 왜 문화연구자들은 침묵했는지 질타한다.

  그러나 적어도 같은 ‘동네’에 있는 나에겐 보고서 작성자의 지명을 둘러싼 논란 이외엔 그 보고서가 담고 있는 소위 ‘프레임 분석’이 얼마나 이데올로기적으로 왜곡되어 있는지, 그리고 그런 결과가 단지 작성자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언론학이 미국 이론의 수입과 모델의 광적인 응용에서 나왔다는- 그래서 그런 보고서들은 이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비판이나 글은 눈을 씻고 찾아 봐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근래 들어 ‘위기’를 논하는 문화연구자들의 글에서는 자신들이 수입했던 이론들에 대한 비판은 찾아 볼 수 없고, 단지 지난 연구들에 대한 분류와 경향,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정치성’의 복원에 대한 부르짖음만을 들을 수 있었다.

  잘라 말하자면, 이런 식의 자기성찰은 ‘이론과 실천’이라는 이 캠프의 오래된 이분법적 사고가 얼마나 깊숙이 내재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운동’을 이야기 하고, 운동가를 초빙할 때도, 그 운동은 ‘문화운동’과 ‘문화운동이 아닌 것’이라는 대립항에서 전자에 치중한다. 성찰을 하자고 했던 3년 전에는 그것이 시작이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용인될 수 있겠지만, 반성문도 한 3년 정도 쓰면 그건 “습관”이 돼버리고 그 내용도 초지일관 ‘실천’의 부재로만 채워진다. 이 정도 되면, 그 발표자가 말했던 ‘문화연구의 무의식’- 그는 이것이 억압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란 부르주아 연구자로서의 ‘실천’에 대한 강박증이자, 마조히즘적인 자기반성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다.

  실천에 대한 강박증은 다시 ‘신자유주의’, 심지어는 ‘자본’이라는 기표 아래 “미디어” 정치경제학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문화연구자들은 바로 지금 자신들이 정치경제학이 비판하고자하는 물신화의 과정에 참여하고 있으면서도, ‘신자유주의’를 마치 저 멀리 우리를 위협하는 외계인처럼 그들의 외부에 있는 적으로 간주하는 오류를 저지른다. 아이러니하게도 한 라운드테이블 발표자가 인용한 맑스의 <헤겔법철학 비판> 한 구절은 “소외란 인간 스스로가 참여하는 능동적 소외”임을 말하고 있었다.(물론 이 발표자는 전혀 다른 의미로 이를 사용했다) 어쩌면 ‘신자유주의’니 ‘자본’이니 하는 것을 자기결정적인 사물로 이해하면서, 그 단어 하나만을 언급하는 것은 자신들이 참여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확산’에 면죄부를 부여받으려는 자기기만에 다름 아니다. 적어도 그 자리에 있었던 상당수의 ‘연구자’들은 그들이 실천성의 기반으로 삼고 있는 영국 문화연구(CCCS)와 이에 관련된 분파들이 오늘날의 토니 블레어와 신노동당(New Labour)을 낳은 조력자들이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는 듯하다. (망각이 아니라면 공부를 안 한 탓이다.) 키노트 스피치의 발표자가 말한 실천적 개입과 간섭은 연구자들의 조직화, 매스 미디어를 통한 투쟁의 알림, 마찬가지 말이지만 테크놀로지의 좌파적 점유를 통해 권력의 획득과 조정을 목적으로 한다. 너무도 유사하게 이들의 주장과 논의는 80년대 영국문화연구의 오류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그 시기 영국문화연구자들이 포스트 포디즘, 통화주의, 세계화 같은 것들을 마치 주어진 사물로, 피할 수 없는 역사적 흐름으로 여겼다면, 나아가 2006년 한국의 문화연구자들은 유령으로서, 담론으로서의 ‘신자유주의’를 이야기한다. 결국 이 신자유주의라는 유령은 그들에게 실체 없는 정치경제학, 특히 ‘미디어’ 정치경제학을 부르는 푸닥거리를 하게 했다. 신자유주의란 무엇인가? 이것은 유령이 아니면 미국이라는 악의 세력이 배후에 있는 음모론이다. 정치경제학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미디어와 문화에 알맞게 다듬어진 ‘미디어 경제학’일 뿐이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캠프에서 찾으려 했다면, 왜 그 자리에선 단 한 사람의 정치경제학자도, 한 사람의 노동운동가도 찾아 볼 수 없었는가?

  논쟁의 전장에서 벌어진 이들의 주장과 회고는 일상과 생계를 보장해 주는 ‘학교’에 몸담으면서 한 발을 ‘실천’에 담가 놓은 부르주아의 충고이자 자위행위가 돼버렸다. 하루하루가 힘들고, 한 학기 등록이 힘든 이들 앞에서 “미국 유학파도 교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더라”는 말은 위로가 아니라 차라리 조롱이다. 생각해 보니 키노트 스피치의 그 발표자는 자신의 학생 중 한 명이 학위논문에 쓸 방법론을 고민하다가 결국 방법론이 주제가 되버렸다는 말을 3년 전에도 했었다. 확실히 망각은 건강에 도움이 되고 보드리야르의 말처럼 ‘학회는 지식의 증진에 도움이 된다.’

Posted by WYW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