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 7. 03:33

Julia & Winston Smith (Actors Jan Sterling & Edmond O'Brien)
<1984> (Michael Anderson, 1956)
<1984> (Michael Anderson, 1956)
무엇이든 진실일 수 있다. 소위 자연법이란 것은 엉터리이다. 인력의 법칙도 마찬가지이다. 오브라이언은 자신이 ‘원한다면 비누방울처럼 이 마루 위를 둥둥 떠다닐 수도 있다.’라고 말한바 있다. 윈스턴은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해 냈다. 윈스턴 자신도 그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런 일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별안간 난파선의 꼬리가 물 위로 불쑥 솟아오르듯 이런 생각이 그의 뇌리에 떠올랐다. ‘그건 실제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야. 상상일 뿐이지. 그건 한갓 환상에 지나지 않아.’ 그는 곧 그런 생각을 지웠다. 잘못된 생각임이 분명했다. 그것은 이 세상 밖 어딘가에 ‘진짜’ 일이 일어나는 ‘진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전제한 데서 나온 생각이다. 어떻게 그런 세계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의식을 거치지 않고 어떻게 사물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겠는가? 모든 일은 마음에서 생긴다.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진짜로 일어나는 것이다.
George Orwell, 정회성 옮김(2003), 『1984』, 민음사. 389쪽
1946년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오웰이 펜을 잡았을 때, 그의 눈앞에는 어떤 세상이 펼쳐져 있었을까? 전쟁이 끝났다는 안도 뒤에는 새로운 계급관계의 구성을 놓고 벌어진 또 다른 노동과 자본의 투쟁이 지속되고 있었다. 모든 것은 불안정 했고, 오래된 것은 아직 그 힘을 소진하지 못했지만, 새로운 것 역시 자신의 형상을 모두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6년에 걸친 세계대전 속에서 오웰이 본 것은 “폐허” 그 자체였을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건 자본주의 국가건 그 폐허 위에서 무언가를 재건한다는 것은 오웰에게 또 다시 재로 변할 거대한 기념탑을 쌓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까닭에 이 소설에서 그가 “전쟁은 평화”라고 오브라이언을 통해 말했을 때, 그것은 단지 전체주의의 수사학이 아니라 체제의 안정을 위해 필연적으로 전쟁이 요구될 것이라는 오웰 자신의 예측이다.
텔레스크린, 신어(newspeak), 마이크로폰, 사상경찰, 과거 창작국 등의 기구들은 정보화 사회의 전체주의적 감시체제를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다. ‘무엇 때문에 권력을 유지하려 하는가?’라는 윈스턴의 질문에 ‘권력 그 자체를 유지하게 위해’라는 동어반복의 대답이 주어진다. 이 짧은 대화 속에서 오웰은 어쩌면 국가/민족 간 전쟁이라는 기만적 외관을 벗겨 버리고, 전쟁의 본질이란 노동자들의 희망과 저항에 맞서는 자본의 전쟁임을 폭로하려 했을지 모른다. 이 소설 속에서 유일하게 “무산계급만이 희망이다”라고 끝없이 되뇌이던 윈스턴의 종말은 이런 의미에서 또 다른 전쟁의 종말이기도 하다.
오웰이 그리는 ‘폐허’의 충격은 내가 지금까지 영화에서 보았던 어떤 디스토피아보다 끔찍했다. 그것은 테크놀로지의 판옵티콘 때문도 아니고, 무서운 음모와 고문 때문도, 모든 사유의 재료를 없애려는 언어정책 때문도 아니다. 끔찍한 고문 뒤에 윈스턴은 위 구절처럼, ‘실재’를 포기하고 ‘의식’과 ‘마음’의 진리만을 믿는다. 그러나 더 무서운 결말은 그 의식과 마음마저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아니 자신의 것인지도 몰랐던 의식과 마음마저 빼앗겼을 때이다.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신념과 희망이 모두 사라지고 난 후에도, 또 무너질 것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것이 디스토피아이다.
ps: 그러고 보니 위에서 강조한 ‘진짜 세계’는 모 교수님의 ‘저 밖의 어떤 세계’와 똑같은 의미이다. 『1984』에서 그런 세계의 부재를 당이 강요했다면, 2006년 오늘날 세계의 부재는 학문의 이름으로 ‘요구’된다.
기억을 위한 메모: 『1984』뒤에 붙은 ‘옮긴이의 말’은 예상대로 ‘과학기술과 정보화’에 의한 감시사회의 우려를 피력한다. 이상한 것은 오웰의 소설에서 그 과학기술과 정보화의 주체가 ‘당’이었다면, 그런 ‘당’이 없는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옮긴이가 동일한 현상을 읽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과학기술의 발달은 거역할 수 없는 것이고, 당― 정확히 말하자면 스탈린주의와 같은 공산사회? ―은 그것을 이용하기만 했기 때문에? 오웰의 소설에서 “빅 브라더 vs 노동자”의 대립항은 오늘날 어떻게 바뀔 수 있는가. 21세기에 “( ) vs 노동자”의 빈칸에 들어갈 말은? 테크놀로지는 이 대립항 위에서만 등장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