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에 관해서 꿈꾸어야 하는가?” 나는 이 말을 쓰고 난 뒤에 깜짝 놀랐습니다. 언젠가 내가 “연합회의” 석상에서 앉아 있었던 생각이 떠올랐어요. 내 곁에는 <라보체예 젤로>의 편집인들과 동인들이 자리하고 있었지요. 마르티노프 동지가 일어서서 마치 나를 위협하는 듯 말했습니다. “당신에게 질문할 게 있습니다. 편집 팀이 독자적이라면 당 위원회의 중계 없이 무언가를 갈망할 권리를 지니고 있습니까?” 그의 뒤에는 크리체프스키 동지가 있었는데, 그는 이미 오래전에 플레하노프 동지의 사상을 깊이 연구한 마르티노프 동지의 철학에 심취하여, 다음과 같이 위협적으로 말을 이었습니다. “내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는 마르크스의 사상대로 오직 해결될 수 있는 과제를 제시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는 당과 함께 추진하는 과업을 행하는 과정을 전략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마르크스주의자는 무언가를 꿈꿀 권리를 지니고 있습니까?

이러한 도전적인 질문을 받았을 때, 어떤 냉혹한 느낌이 몸속에 엄습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어디에 몸을 감추어야 할지 생각하며, 내 뒤에 있는 피사레프 뒤에 숨으려 하였습니다.

피사레프는 꿈과 현실 사이의 간극에 관하여 “간극이란 다른 것과 비교될 수 없다”라고 기록했습니다. “내 꿈은 역사적 사건의 자연적 진행 과정을 추월할 수 있다. 혹은 그것은 역사적 사건의 진행 과정을 일탈하여, 결코 이러한 길에 동참할 수 없을 때도 있다. 첫 번째 경우 꿈이란 결코 해롭지 않다. 그것은 일하는 사람들의 노동 행위의 에너지를 촉진시키고 강화한다. … 그러한 꿈들이 창조적인 힘에 나쁜 영향을 끼치거나 그런 식으로 꿈꾸는 모든 능력을 상실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인간은 나중에 상상력을 통하여 일원적이고 완성된 상으로서의 어떤 작업을 예리하게 간파할 수 없을 것이다. 즉 나중에 두 손으로써 실제 생산해 내는 작업을 생각해 보라. 만약에 그렇다면 과연 어떤 동기가 인간으로 하여금 예술, 학문 그리고 실제 삶의 영역에서 방대하고 힘든 작업을 착수하게 하고 완성시키게 하는지 상상하려고 해야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 꿈과 삶 사이의 간극은 해롭지 않다. 만약 꿈꾸는 자가 진지하게 꿈을 생각하고, 삶을 주의깊게 관찰하며, 자기가 관찰한 바를 꿈속의 환영과 비교하여, 양심적으로 꿈의 형상을 실현하려고 작업을 추진한다면 말이다. 만약에 꿈과 삶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존재하고 있다면, 모든 것은 최상의 질서 속에 존재할 것이다.”

이런 종류의 책임은 유감스럽게도 사회주의 운동에서 드물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이에 대한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있을까요? 아마도 자신이 냉정하고, “구체적인 문제들”에 상당히 “근접해” 있다고 자만하고 있는 자들은 이러한 책임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이들은 합법적인 비판을 옹호하는 자들이며, 앞으로 향해가는 합법적인 정책을 옹호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Lenin, Was tun?, Ausgewählte Werke, 1946, S. 315. ; Ernst Bloch(1959), Das Prinzip Hoffnung, Frankfurt am Main: Suhrkamp. : 박설호 옮김(2004), <희망의 원리> 1권, 서울: 열린책들. pp.30-32.에서 재인용.

Posted by WYW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