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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자가 범죄소설을 분석하는 데 시간을 소비한다는 것이 경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나로서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변명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역사유물론은 모든 사회현상에 적용될 수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 어떤 연구라도 본성상 다른 연구보다 가치가 덜한 것은 없다. 역사유물론이라는 이론의 권위- 그리고 이 이론이 타당하다는 증명 -는 다만 이 모든 것들을 제대로 설명해 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범죄소설의 역사는 부르주아 사회의 역사와 얽혀 있기 때문에, 하나의 사회적 역사이다. 왜 범죄소설이라는 특정한 문학장르의 역사에 부르주아 사회의 역사가 반영되고 있느냐고 질문한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즉, 부르주아 사회의 역사는 사유재산의 역사이기도 하며 사유 재산의 부정, 즉 간단히 말해서 범죄의 역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부르주아 사회의 역사는 개인들의 욕구나 정서, 그리고 기계적으로 부과된 사회 개량주의의 형태 사이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모순의 역사이기도 하거니와, 범죄 속에서 태어난 부르주아 사회 안에서 부르주아 사회 자체가 범죄를 조성하고, 범죄를 가져오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국에는, 아마도 부르주아 사회가 범죄 사회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Ernest Mandel <즐거운 살인>

  "정치경제학자가 쓴 대중문화 비평이라..." 처음 이 책의 제목을 보았을 때, 어네스트 만델이라는 이름 탓에 노학자가 말년에 장난처럼 쓴 에세이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첫장의 서문부터 내 짐작이 틀렸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만델은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열 여덞살의 나이로 제4인터내셔널의 조직원이 되었고, 나찌와 스탈린 하에서 투옥을 감수하면서도 평생을 노동, 학생운동에 관심을 저버리지 않은 한 명의 맑시스트였던 만델을 말이다.

  "범죄소설의 사회사"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분명 추리소설이나 범죄 스릴러에 열광하는 팬들에게 결코 유쾌한 책이 아니다. 몇 편의 인터넷 서평을 뒤져보면, 한마디로 "뭐 이런 책이 다 있냐..."로 정리할 수 있다. 2001년에 우리말 번역 1쇄가 나와서 아직도 소식이 없는 걸보면 흥행실패는 분명한 듯 하다.

  흥행실패의 원인은 아마도 이 책이 "범죄소설을 통해 본" 현대 자본주의 발전사였기 때문인 듯 하다. 만델의 표현대로 부르주아 사회는 곧 범죄의 사회이다. 넘쳐나는 잉여를 공평히 분배하지 못한다는 사실 자체에서, 대공황이라는 자본의 운명에서, 이미 이 사회는 어떤 식으로든 범죄를 배태하지 않을 수 없는 곳이며 범죄소설은 이러한 운명의 도피적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드가 앨런 포와 코난 도일에서 시작한 경쟁 자본주의 시기의 추리소설에서 국가, 기업, 조폭들의 총체적인 범죄카르텔을 묘사하는 "로빈 쿡"류의 스릴러까지 만델의 범죄소설 분석은 그야 말로 불타는 범죄의 연대기이다. 놀라운 점은 정치경제학이라는 '딱딱한 학문'을 전공한 만델이 악당과 탐정의 유형, 서사의 전개, 소설의 공간적 배경, 사건의 소재까지 광범위하게 보여주는 "인문학적 분석력"이다. "007"의 탄생에서 시장의 확대와 경제적 인간의 합리성이 쇠퇴한 증거- 활동 무대의 세계화, 셜록홈즈와 같은 논리적 추리력을 수사기관의 조직력으로 대체하는 것 -를 보여주는 능력은 대개의 정치경제학자들에게 기대하기 힘든 일일 것이다.

  만델이 보여준 범죄소설의 사회사는 단지 소설의 영역에만 국한될 수는 없다. "도망자"와 같은 헐리우드 스릴러물이나 "대부", "원스 어폰어 타임 인 아메리카" 와 같은 영화 역시 만델의 주장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 그의 말대로 "역사 유물론이 적용될 수 있는 대상과 그렇지 못한 대상의 차이가 어디에 있겠는가?"

ps: 행여 이런 글을 읽고 경제 결정론 운운하지 마시길 바란다. 일단 읽고 말씀해 주시길... 장담컨대 금방 읽으실 수 있을게요..^^

Posted by WYW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