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는 90%가 흑인이었어요. 이번엔 서필모어로 갔었죠... 머리가 긴 백인들만 보이더군요....사회자가 '신사숙녀 여러분 최고의 권위자 B.B. 킹을 소개합니다.'라고 하니 전부 일어섰어요.... 전부... 핀소리까지 들렸어요..... 모두 일어났죠..... 제 삶에서 그런 일은 한번도 없었어요. 모두 일어나더니 박수를 치기 시작했죠. 너무 감동받아서 견딜 수가 없었죠. 전 가만히 서서 울기 시작 했어요. 45분 간의 연주 시간 동안 전 서너 번의 기립박수를 받았어요. 그리고 제가 떠날 때가 됐을 때 다시 일어서더군요. 그렇게 다른 종류의 관객 앞에서 연주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날 밤은 90%의 흑인관객 대신에 95% 정도의 백인 관객이 있었죠. 난생 처음이었요. 그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지만 할 수 있다면 좋겠군요..."
THE BLUES 7부작 중 블루스에 가장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작품을 고르라면 Richard Pearce의 "멤피스로 가는 길(The Road to Memphis)"를 들고 싶다. 멤피스로 간다는 것은 블루스의 고향 중 하나로 간다는 의미 뿐 아니라, 그 길을 되짚어 가며 떠올리는 블루스의 역사 그 자체가 또 하나의 12마디 블루스임을 보여준다. 때로는 이미지들의 이어짐과 내러티브가 마치 악보의 구성처럼 인트로, 중간 소절, 후렴구, 그리고 마무리를 느끼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은 영상과 음악 예술이 동일한 형식으로 수렴될 수도 있음을 알게 해준다.
영화에 등장하는 세 인물은 50년 대 멤피스의 빌 스트리트(Beale Street)에서 함께 활동하던 벗들이다. 시작은 같았던 이 세 명은 멤피스로 돌아와 귀향공연을 준비하는 지금, 너무도 다른 그러나 어찌보면 동일한 길을 걸어 일흔의 나이를 바라보고 있다. 오래 전 그래미상에 노미네이트 된 경력으로 미 전역을 돌며 생계를 이어가는 바비 러쉬(Babby Rush), 빌 스트리트의 전성기가 끝났을 무렵 뉴욕으로 가 세탁일로 살아온 로스코 고든(Rosco Gordon), 그리고 블루스의 살아있는 전설이 된 비비 킹(B.B King)이 그들이다. 서로 다른 항로를 지나온 이들의 추억과 회상이 이 영화의 대부분을 이루지만, 글 앞에 인용한 비비 킹의 회고는 그들 모두가 겪었던, 아니 미국인들 모두가 겪었던-- 그리고 지금도 겪고 있는 -- 인종차별의 역사와 블루스의 험난한 여정을 생생히 증언해 준다. 비비킹은 빌 스트리트에서 당시로선 모험에 가까웠던 라디오 방송국의 "흑인" DJ로 시작하여 필모어 웨스트 공연(68년)에서 난생 처음 백인 관객들의 환호를 받게 된다.
어찌보면 인종차별의 역사보다 식민의 경험과 지역감정의 분리를 경험한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같은 영토 내에서 피부색이 처 놓은 삶과 음악의 게토(ghetto) 속에 살아온 이들의 회상은, 비비킹처럼 성공한 아티스트건, 지금은 피아노의 Key마저도 잊은 할아버지건(로스코 고든), 다니는 곳마다 개런티 흥정으로 속을 앓는 왕년의 스타건(바비 러쉬) 현재의 모습에 상관없이 다시 멤피스로 모이게 하는 상처이자 자양분임을 확인시켜 준다. 그래서 영화 막바지에 멤피스의 클럽 공연은 현재의 위치에 상관없이 그들의 삶을 버텨온 모진 인내와 열정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한 감동을 준다.
그러나 마치 블루스 연주가 마지막 소절에서 처음의 패턴으로 돌아가 듯, 영화의 마지막은 다시 동일한 세 명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다시 어디론가 떠나는 순회공연 버스 안의 피곤과 결국엔 다시 블루스로 돌아오지 못한 세탁소 늙은이의 장례식이 그것이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Buenavista Social Club)"의 엔딩은 환호와 회한으로 새로운 시작의 희망을 주었다면, 이 "멤피스로 가는 길"은 그런 희망을 던져주지 않는다. 그저 모두 알고 있듯, 한 차례의 환호 이후 이전과 다름없는 고단한 일상이 있음을 결코 감추지 않는 것이다. 이 영화의 미덕이자 동시에 그 리얼리티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이 내가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가장 블루스에 가까운 영화, 아니 블루스 그 자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