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 7. 03:44
상징이 의미하는 ‘반복되는 자연’은 갈수록 상징 속에 표현된 항구화된 사회적 억압임이 증명된다. 움직이지 않는 형상으로 대상화된 ‘전율’은 특권층의 확립된 지배를 표시한다. 이렇게 확립된 지배는 ‘형상적인 것’을 모두 포기하더라도 보편 개념으로 남게 된다. 학문의 연역적 형식마저도 위계질서와 강압을 반영한다. 첫 번째 범주들이 개개인에 대한 조직화된 부족과 그 부족의 힘을 대변한다면 개념들의 전체적 논리 질서, 의존성, 연결, 포괄 그리고 연합은 노동 분업을 토대로 한 사회의 현실구조를 반영한다. 물론 사유 형식의 이러한 사회적 성격은 뒤르켐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사회적 연대감의 표현이 아니라 사회와 지배가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는 증거이다. 지배는 사회 속에서 확립된 것이지만 또다시 사회 전체에 한 차원 높은 일관성과 힘을 부여한다. 지배가 사회에 뿌리를 내리면서 만들어낸 노동 분업은 지배받는 전체의 자기유지에 기여한다. 전체는 전체로서, 또한 전체에 내재한 이성의 활동으로서, ‘파편적인 것’의 집행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 된다. 개별자에 대해 ‘지배’는 보편자로서, 현실적 이성으로 등장한다.
Th. Adorno & M. Horkheimer, 김유동 옮김(2001), 『계몽의 변증법』, 문학과 지성사. 49~50쪽
#1
각종 사회과학 세미나를 ‘받던’ 대학 시절, 무슨 세미나를 하고 싶냐는 선배들의 질문에 몇몇 동기들은 경제학이니 철학을 말했다. 아마도 어린 마음에 뭔가 저 높은 곳에 있는 왕좌에 도달하면 나머지 과목들― 역사, 민족, 페미니즘 등등 ―은 그 아래 머리를 조아릴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2
대학원 논문 제안서 심사장.
워낙에 친분도 고르지 않고 전공도 다른 교수들이 모인지라, “무슨 주제로 어떻게 쓰겠다.”고 말하는 발표자에게 제일 만만한 질문은 “방법론이 뭐냐?”이다. 논문의 제목이 무엇이건, 일단 이 질문으로 포문을 열면 학생들의 십중팔구는 양적/질적(Quantitative/Qualitative)의 두 형용사를 배회하다 “정정하겠습니다.”로 백기 들고 내려온다. 설명하는 방식(How to explain)이 설명되어야 할 것(the explained)을 결정함을 깨달은 영특한 몇몇 대학원생들은 ‘방법론’이라는 험난한 길을 떠나고 급기야 사회학, 과학철학, 철학으로 전과를 하겠다는 학생들도 생긴다.
#3
꽤 오랫동안 특정 분야의 이론들은 자신이 대상으로 하고 있는 연구영역 또는 대상의 정당성을 그 이론 외부에서 인정받으려 했다. 다양한 분과의 ‘과학’들은 자신들의 근원을 늘 저 고대 그리스에 두었고, 그리스 철학의 후계자들에게서 자신들의 연구방법과 대상의 정당성을 발견해왔다. 마르크스주의 역시 “정치경제학의 방법”이라는 마르크스의 그 짧은 글에서 실로 무수한 변증법의 도식과 유물론을 이끌어 냈다. 그리하여 다양한 마르크스주의 분과들이 알현해야 할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왕좌가 탄생했다.
#4
아도르노가 “보편자”, “현실적 이성”라고 말한 지배의 형태는 이런 식으로 도처에서 나타났다. 저 높은 곳에 위치한 왕좌를 극점으로 논리적 위계질서가 피라미드처럼 세워졌다. 대기업의 조직도가 이런 사유형식과 동일한 모양을 취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기업의 조직도와 사회조사방법론 서론의 연구모델은 ‘노동 분업을 토대로 한 현실구조’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이런 까닭에, 좌파건 우파건, 마르크스주의건 신고전파건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 지배를 스스로 만들어 왔다.
#5
한 대학원 후배가 이번 학기 어떤 과목을 들을까 고민하다 ㅁㅎㅋㅌㅊ학과의 강의계획서를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견학과 토론이 격주로 진행되는 ‘흥미진진’한 강의도 있고 와인 하나로 16주를 채우는 강의도 있다. 언젠가 부터 새로운 전공과 이름도 생경한 학과들은 학문의 논리적 위계질서를 내세우지도 않고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할 ‘왕좌’를 만들지도 않는다. 도리어 학문의 피라미드에서 그 왕좌에 계셨던 분들이 앞장서서 그런 위계질서를 깨고 계시니, ‘실용분과’에서 공부하는 나 같은 풋내기가 나서서 뭐라 할 상황도 아니다. 그런데 정말 왕좌는 없어졌고 이 새로운 전공들은 학문의 위계 속에서 자유로워진 것일까? 한 때 철학이 앉았던 그 자리에 이젠 “평등한 계약당사자들의 자유로운 교환이 이루어지는 <시장>”이 들어서지 않았는지. 이 <시장>은 ‘학문’이나 ‘이론’ 아니라며 자신의 무고함을 토로할지도 모른다. 맞다. <시장>의 변명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이론과 현실이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지배적인 관념은 언제라도 지배적인 물질적 힘으로 전화할 수 있다는 오래전 마르크스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