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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은 우리가 사적 소유를 폐기하려 한다고 해서 놀라고 있다. 그러나 당신들의 현존 사회에서 그 사회 성원의 10분의 9에게서는 [이미] 사적 소유가 폐기되어 있다; 사적 소유가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이들 10분의 9에게 사적 소유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신들은, 우리가 사회의 압도적 다수의 무소유를 필수 조건으로 전제하는 소유를 폐기하려 한다고 우리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당신들은, 우리가 당신들의 소유를 폐기하려 한다고 우리를 비난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렇게 하려고 한다.

Marx, K. & Engels, F.(1848), 최인호 옮김(1992), “공산주의당 선언”,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1권, 박종철 출판사. 415쪽.

 

  공산당 선언을 처음 읽은 것은 대학 3학년 때였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도 선전과 선동이라는 무시무시한 작업의 ‘교본’이라는 말에 읽게 된 것 같다. “선언”이 나온지 157년이 흘렀다. 흘러버린 시간만큼 ‘선언’의 타당성이 사라졌다고 볼 수 있을까? 맑스와 엥겔스는 이미 “선언”이 나오고 25년이 흘렀을 때, 그들 스스로 여기에 명시된 상당수의 주장들에 대해 ‘낡아 버렸음’을 인정한다. 꼭 25년까지도 필요하지 않았다. 공산주의자 동맹이 선언에 서명하고 4년 후, ‘퀼른 공산주의자 소송’에서 패하여 금고형을 선고받았을 때부터 선언은 낡아 있었고 망각의 문 앞에 서 있었다.

  이 낡아버린 문건을 쥐고 지난 150여년간 수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 도래의 필연성을, 때로는 선전의 미학을, 아니면 맑스의 혁명적 글쓰기와 실천에 대해 생각했다. 1990년대 나에게도 이 선언은 어떤 핑계를 대건, 하나의 ‘매뉴얼’이었다.

  분명히 “선언”의 모든 주장과 정세 파악은 오늘날 수정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물론이란 인간의 역사가 만든 철학이며, 따라서 자본주의와 함께 소멸해야 하고 새로운 세상이 등장할 때 사라져야 한다면, 오늘날까지 선언이 남아있고 읽기가 요구된다는 사실은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있냐 없냐의 문제가 아니다. 선언의 존재 자체가 아직 자본주의라는 삶의 방식이 그때와 하나도 달라진 것 없이 지속되고 있음을 증명해 주는 ‘역사적’ 문건인 셈이다.

  “선언”은 공산주의라는 그 이름도 허망한 세상의 도래를 알리는 선포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당시의 공산당과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세상을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지침을 주는 것도 아니다. 혹은 어떤 이들의 말처럼 자본주의와 부르주아의 위대함과 그 놀라움을 ‘인정’하길 요청하는 겸손한 글도 아니다.

  “선언”은 도리어 부르주아 사회가 봉건사회 속에 잠자고 있던 저승의 힘을 깨운 마법사임을 알려주면서, 봉건사회 속 자본주의, 나아가 자본주의 속 공산주의를 말해준다. 자본주의는 그 모든 것이 타도되고 절멸되어야 할, 그래서 밑바닥부터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이 부정되어야 할 세상이 아니다. “선언”은 도리어 부르주아가 프롤레타리아트들에게 ‘이미’ 그들을 타도할 무기와 교양을 주고 있음을, 자본주의가 ‘이미’ 무소유의 상태에 있음을 일깨워 주고자 한다. 자본가들이 저지른 온갖 폐해와 부정, 그리고 그것을 온몸으로 안고 살아야 하는 우리들이 겪는 고통은 사라져야 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발견해야 할 진흙탕이며 육박전의 장소이다.

  그래서 “선언”은 이 막막한 세상에서 ‘희망’이 존재함을 아주 작은 소리로 읆조려 준다. 이 희망의 근거는 그동안 국가권력의 쟁취나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같은 혁명의 매뉴얼에 묻혀 있었을 지도 모른다. 오늘날 하루하루가 전쟁인 이 곳에서, “선언”은 이렇게 말한다. 새로운 세상은 저 밖에 있지 않다. 바로 여기서 그것을 찾기 위해 싸우라. 왜냐하면 “희망의 바깥은 없기 때문이다.”

Posted by WYW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