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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시대상(referent)이 물질성을 띠지 않는, 혹은 한계 짓기 어려운 단어(기호)일수록 그로부터 발생하는 담론은 투쟁을 동반하기 십상이다. 이러한 담론의 투쟁에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는 하나의 전술은 모호한 그 단어에 다른 단어를 관습적으로 대립시킴으로써, 그 단어가 미끄러질 한계를 봉쇄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자유”를 “평등”에 대립시키곤 한다. 이러한 이항대립은 다시 “자유로운 생산과 소유”와 “평등한 분배”라는 또 다른 상식적인 대립항을 낳는다. 적어도 담론 투쟁이란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대립상의 연쇄를 어떻게 만들고 교체할 것인가의 문제가 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서 “자유”란 이런 상식적인 대립항의 재생산에 이처럼 철저히 기여하고 있다. 우리는 이 자유에 마주서는 다른 단어를 찾을 필요가 없다. 단지, 너희들이 말하는 “자유무역”의 “자유”는 바로 이런 것이라고 외칠 것이다.

“어제 한 남자가 쌩-라자르(Saint-Lazare) 지하철역의 3번 선에서 제131열차에 치여 즉사했다.……이 남자의 나이는 스물아홉 살이었다. 어제 베르나르는 플랫폼 끝부분을 이리저리 거닐고 있었다. 승객들 사이를 헤치고 들어간 그는 전차의 불빛을 확인하려고 몸을 기울이더니 마치 잠수부처럼 두 발을 모으고 두 팔을 앞으로 뻗쳐 레일 위로 몸을 던졌다. 두 다리는 절단되고 얼굴은 그을린 채로 그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그는 이제 어린 시절 구슬치기를 하고 놀던, 높은 곳에 올라가 앉은 고양이를 구경하곤 하던 그 오르드네(Ordener)가의 한 모퉁이를 돌아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제 더 이상 튀김냄새와 화장실냄새를 풍기는 좁은 계단을 올라가지 않을 것이다. 그가 부엌 천장 밑의 가스통로에 팔꿈치를 괸 채 『파리인의 자유』지에 나온 구인광고를 읽고 있는 모습도 이제 볼 수가 없으리라. 그는 아버지로부터 기성복 재단사 일을 배웠다. 그런데 다섯 달 전부터 그는 일자리를 잃고 말았다. 구직광고도 내보고 계단도 오르락내리락 거렸지만 번번히 퇴짜를 맞았다. ……그러느라 옷이 걸레가 되어버리는 통에 그는 외출을 할 수 없었다. 당신은 당신의 일손을 거절하는 어떤 세계 속에서 자기가 더 이상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 침대에 며칠씩 누워 있어 본적이 있는가? 베르나르는 벽 저쪽 편에서 어머니가 냄비를 달가닥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다. 그는 어머니에게 얹혀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다시 외출한다. 공장에서는 그를 인부로 쓰려 하지 않는다. 그는 너무 허약했기 때문이다. 사무실에서는 부장이라는 사람이 그의 구멍 난 구두를 놀리듯이 바라보았다. 일자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일곱 시 출근시간에 그는 쌩-라자르 지하철역의 인파 속으로 끼어들어갔다. 사람들은 모두 시간에 얽매여 있으며, 자기들이 맡은 일을 하러 가느라 정신이 없다. 그는 자유롭다. 왜냐하면 그는 박물관에 가거나 또는 공원의 꽃들을 구경하러 가거나,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을 생각하거나 간에 자유롭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서는 특히 가스꼭지의 마개와 지하철 열차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자유가 자기에게는 있다고 그는 느낀다.
아침 일곱 시다. 자유인의 하루가 시작된다. 한 인간이 131번 열차에 치어 으깨졌다. 자유인들 중의 한 자유인 베르나르는 이 자유에 의해 으깨어졌다.”

Roger Garaudy, Grammaire de la liberté(자유의 문법), Éd Socials: A. Vergez and D. Huisman, 이정우 옮김(1998), 『새로운 철학 강의 2』, 인간사랑. 中

 

Posted by WYW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