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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오의 은빛 꿈[The Devil's Miner, 감독: Richard Ladkani, Kief Davidson,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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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가족[An Ordinary Family, 감독: Fredrik Gertten, 2005]


“…그러므로 자본관계를 창조하는 과정은 노동자를 자기의 노동조건의 소유로부터 분리하는 과정[즉 한편으로는 사회적 생활수단과 생산수단을 자본으로 전환시키며, 다른 한편으로는 직접적 생산자를 임금노동자로 전환시키는 과정] 이외의 어떤 다른 것일 수 없다. 따라서 이른바 시초축적(始初蓄積)은 생산자와 생산수단 사이의 역사적인 분리과정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이 ‘시초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것이 자본의 전사(pre-history), 그리고 자본에 대응하는 생산양식의 전사를 이루기 때문이다.…(중략)…시초축적의 역사에서는, 자본가계급의 형성에 지렛대로 역할한 모든 변혁들은 획기적인 것이었지만, 무엇보다도 획기적인 것은, 많은 인간이 갑자기 그리고 폭력적으로 그들의 생존수단으로부터 분리되어 무일푼의 자유롭고 의지할 곳 없는 프롤레타리아로 노동시장에 투입되는 순간이었다.…”

Karl Marx, 김수행 옮김,『자본론Ⅰ』, 비봉출판사. pp.981~983.

  프로그래머의 선택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EIDF 국제다큐멘터리 페스티벌에서 연달아 방영한 “바실리오의 은빛 꿈(The Devil's Miner)”과 “평범한 가족(An Ordinary Family)”은 다른 장소에서 다른 이름을 갖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동일한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볼리비아의 은광산에서 일하는 14살의 바실리오는 10살 때부터 “가장이 없는 집안은 아들이 생계를 책임져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공포영화를 좋아하는 홀어머니, 형이 없으면 무서워 광산에서 일하지 못하는 2살 아래 동생 베르나디노, 아직 만화영화가 즐겁기 만한 여동생 엘레나. 이들은 모두 바실리오가 1200미터의 갱도에서 일해야 할 이유이자, 동시에 그 고단한 삶을 버틸 버팀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실리오를 바라보는 광부들은 이 고통의 역사가 400년이 넘게 끝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바실리오가 학교를 다니고, 광산을 떠나길 간절히 바란다. 광부란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으며 삶을 지탱해 나가는 인생이라는 걸 알기에, 이들은 바실리오에게서 작은 희망이라도 찾아보려 한다.

  2001년, 아르헨티나는 국가부도(Default)를 맞게 된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정유회사의 중역으로 일하던 보로니(Borroni)씨 가족은 파산의 여파로 집을 저당 잡히고, 가재도구들을 물물교환시장에 내파며 하루를 이어간다. 불과 몇 년 전 즐거웠던 가족휴가 사진을 이젠 아무도 쳐다보지 않고, 보로니씨와 부인은 마사지 학원을 다니며 스페인 이민에 마지막 희망을 건다. 아들의 작은 라디오마저 10페소에 팔아치우고 떠난 스페인에서 이들 가족은 작은 일자리를 얻고 꿈에도 그리던, 그러나 한때는 너무나 당연했던 해변가 휴가를 떠난다. 그럼에도 해변가에서의 이들의 여가는 또 언제 닥칠지 모를 불안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들은 아르헨티나에서 아주 “평범한 가족”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의 축적이 어떻게 시작되는가를 설명하면서 “많은 인간이 갑자기 그리고 폭력적으로 그들의 생존수단으로부터 분리되어 무일푼의 자유롭고 의지할 곳 없는 프롤레타리아로 노동시장에 투입되는 순간”을 가리켜 소위 ‘시초축적’이라고 부른다. 생산수단과 화폐를 소유한 이들과 노동력 밖에는 판매할 것이 없는 이들로 사회관계를 양극화시키는 이 과정은 15세기건, 16세기건 자본주의의 탄생기에 국한된 사태가 결코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오늘날 ‘금융 자본주의’, ‘정보, 지식 사회’의 시기에 왜 우리의 바실리오는 아직도 400년 동안 끝나지 않는 시초축적의 고난을 겪어야 하며, 한 때 ‘쁘띠 부르주아’였던 보로니씨는 졸지에 프롤레타리아가 되어야 할까?

  시초축적은 자본가와 노동자의 탄생을 말해주는 정치경제학의 창세기가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노동에 의존해야 하는 자본이 생산수단의 소유자와 노동력의 판매자라는 양극화된 관계를 지속적으로 구성해야함을 보여주는 현재진행형의 폭력을 뜻한다. 이 폭력은 안정화된 ‘선진 자본주의사회’나 소위 ‘신식민지 국가’ 어디에서건 이루어진다. 이 폭력은 자본주의의 강력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이것은 스스로가 노동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일종의 신경질적인 자기방어에 다름 아니다. 한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국적과 인종을 떠나 우리 모두가 자본의 폭력에 시달리고 있음을 함께 느끼는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으며 삶을 지탱해 나가는 존재’는 광부가 아니라 자본 그 자신일 지도 모른다.

Posted by WYW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