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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6.13 오래된 플랫폼 노동의 미래

가치를 창출하는 인간의 활동은 노동이라 부를 수 있지만, 그가 노동자인지의 여부는 노동의 종속성에 달렸다. 거대한 공장이나 특정 공간의 사업장에서 수행되는 노동에 기반한 이 종속성은 노동을 지시하고 감독하며 징계할 수 있는 사용자를 전제로 한다. 노동을 수행하는 이는 사용자의 지시권한에 종속되었음을 증명할 수 있을 때, 그리고 노동의 성과와 책임은 노동과정을 구상하고 관리하는 사용자에게 귀속될 때 노동자로 인정받는다.

몇 년째 미국 캘리포니아, 영국, 프랑스에서 계속되고 있는 드라이버의 노동자 확인 소송에서 패소하고 있는 우버(Uber)는 이들이 자신들에게 종속된 노동이 아니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산업노동의 패러다임에서 노동이란 사람이 누군가에게 노동력을 팔지 않고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상대방이 제시한 불리한 노동조건에도 불구하고 계약을 맺어야 하는 관계, 즉 경제적 종속을 의미한다. 또한 사람은 노동력을 자신의 신체 및 인격과 분리하여 제공할 수 없기 때문에 노동력을 제공할 때 사용자의 지휘와 감독을 받는 인적 종속이 노동자의 여부를 결정한다.

반면 스스로 근무시간을 정하고 노동 대가를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의 노동은 독립 노동, 예컨대 자영업자의 노동으로 구분된다. 플랫폼 자본은 이러한 종속 노동과 노동자 지위에 근거하여 작업 지시는 어플리케이션과 같은 시스템에 의해 내려지며, 그 수용 여부는 노동을 제공하는 이들이 자유롭게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우버 드라이버와 같은 이들은 불리한 계약관계를 거절할 수 있으며,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노동을 제공하여 그에 따른 대가를 받기 때문에 경제적 종속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출처: https://platformlabor.net

 

플랫폼 노동의 종속된 자유

 

그러나 플랫폼 노동의 종속성은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우버 드라이버나 배달앱 라이더’(rider)처럼 어플리케이션에 의해 서비스 이용자의 요청을 접수하고 노동의 수행 여부를 결정하는 이들은 사용자에게 직접적으로 종속되어 있지 않더라도 알고리듬과 같은 정보처리 테크놀로지 플랫폼에 종속되어 있다. 플랫폼 노동자는 자신이 제공하는 서비스의 가격과 고객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 두 가지 모두 플랫폼이 설정하는 특정한 범위 안에서만 자유롭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플랫폼 노동자는 공장 노동자와 달리 특정한 근로시간과 장소에 묶여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플랫폼이 전달하는 정보 안에는 이미 시간과 장소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플랫폼 자본이 말하는 서비스 제공자의 자유로운 결정이란 이윤 창출의 극대화를 위한 알고리듬과 같은 시스템을 통해 그 범위가 제한된 종속된 자유인 셈이다. 최근 플랫폼 노동의 확산에 따라 노동법의 종속개념을 재고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플랫폼 노동을 이렇게 규정한다면, 신문과 방송이라는 미디어 노동은 그 생산물, 콘텐츠의 특징으로 인해 플랫폼 노동의 가능성을 오래 전부터 내포하고 있었다. 1회 편성되는 프로그램의 제작진은 스스로 사전 기획과 준비, 촬영 및 편집 일정을 정한다. 신문 기자 또한 명확한 취재 시간 없이 자료조사, 인터뷰 미팅, 대기 시간 등을 스스로 정한다. 이러한 자율성은 노동조합이 제작 자율성편집권 독립을 요구할 수 있는 노동조건이기도 하다. 이와 달리 전통적인 대공장 노동, 즉 산업노동은 정해진 작업시간과 장소가 명확하고 사용자의 직접적인 지시, 감독, 징계를 받는다. 자동차 산업처럼 이러한 노동 생산물은 대량생산 체계에서 동일한 상품을 지속적으로 생산해 낸다. 그러나 신문과 방송 등 미디어 노동 생산물은 매일, 또는 매주 달라야 하는 경험재이다. 그래서 표준화된 공정이나 품질의 측정이 불가능한 이 생산물은 노동자에게 전문직주의(professionalism)를 요구한다.

그러나 플랫폼 노동이 그러하듯, 신문과 방송사의 근로시간과 장소는 24시간 방송 프로그램의 편성, 또는 구독자와 약속한 시간에 맞춘 한에서만 자유롭다. 매주 수요일 저녁 7시에 방송되는 프로그램은 기획, 촬영, 후반작업(최종편집)의 일정을 제작진이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지만 본방송 시간이라는 제약에 묶여 있다. 마찬가지로 노동을 제공하는 장소 또한 프로그램을 어떻게 기획하고 기사의 아이템을 무엇으로 정하는가에 달라진다. 예능 프로그램 1회를 제작하더라도 야외촬영과 스튜디오 촬영의 분량을 어떻게 정하는가에 따라 장소와 시간이 수시로 변한다. 노동의 대가인 임금 또한 다르지 않다. 방송영상 콘텐츠나 기사의 단위 당 거래 가격이 정해진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이전까지 방송영상 콘텐츠나 신문 기사는 그 가격을 임의로 정할 수 없는 상품으로 양면 시장의 특성 상 광고시장에 종속된 상품가치- 시청률, 청취율, 유가구독수 -로 인정받았다.

 

누가 더 자유로운가

 

문제는 전통적인 방송과 신문의 노동이 결코 자영업자의 독립노동과 같이 한 개인이 수행하는 노동이 아니라는 점이다. 위에서 말한 노동조건의 결정은 높은 수준에서는 프로그램 편성전략에, 또는 지면기사의 배치에 따라 정해진다. 그러나 각각의 콘텐츠를 기획하고 제작하는 노동의 자율성과 비종속성은 담당 PD나 담당 부장에게만 국한된다. 함께 일하는 작가, 촬영, 음향, 조명 등 스태프나 보도사진, 조판, 배송을 담당하는 노동자에게 그러한 자율성이란 종속된 자유일 뿐이다. 흔히 방송산업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PD소사장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그래서 외주제작 또는 프리랜서란 종속된 자유에서 그 자유도가 어느 정도 보장되는가에 따라 천차만별의 노동 및 임금조건에 놓인다. 방송사는 이런 식으로 플랫폼 노동의 형태를 갖춘 노동자를 오랫동안 사용해 왔고 노동자성을 부인해 왔다. 거꾸로 오랜 기간 숙련을 거치고 사회적 자본을 구성한 방송의 일부 플랫폼 노동자들은 단순히 비정규직이라는 한 단어로 포괄하기 어려운 지위로 상승한다.

출처: 전국언론노동조합

 

방송과 신문으로 대표되는 오래된 미디어 노동은 고용기간의 지속적 보장(정규직)이라는 점에서만 차이가 날 뿐 비정규직 등 불안정 노동으로 언제라도 대체될 가능성이 높은 노동시장이었다. 방송산업에서 비정규직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은 1998년 노동법 개악 이후였다. 이전까지 방송사는 이들을 노동자로 인정할 필요도 없었고, 노동자 스스로도 자신이 노동자임을 증명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물론 여기에는 소수의 방송사와 언론사라는 노동시장의 규모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방송산업의 성장과 노동시장의 확대는 종속된 자유노동의 직무와 직군을 대규모로 만들어 냈다.

전통 매체인 방송과 신문 산업이 정체 국면에 접어들면서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해 질 것이다. 제작 자율성과 편집권 독립을 요구하고 행사할 수 있는 직위와 직급은 상층으로만 국한되고 독특한 노동의 특징, 즉 매일 새로워야하는 경험재의 생산에 필요한 전문직주의는 극히 일부의 정규직 노동자에게만 인지된다. 배달앱 플랫폼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에 경제적 보상 이외의 어떤 의미와 가치도 부여하지 못하듯, 미디어 산업의 오래된, 그리고 더 확대되는 플랫폼 노동은 언론의 공정성이나 독립성이라는 가치에 공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미디어의 오래된 플랫폼 노동은 오늘날 비로소 그 이름을 얻을 수 있겠지만, 그리고 노동자성 인정의 가능성은 더욱 높아지겠지만, 오직 화폐에 종속된 노동에의 열망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어쩌면 언론 노동자가 방송의 독립성, 언론의 공정성을 주장하는 것은 사치일 뿐이라고 여겨질 때가 너무 빨리 올지도 모르겠다.


참고문헌

박제성(2019), “종속 개념의 재검토”, 매일노동뉴스, 2019910.

임종률(2017), 노동법, 서울: 박영사.

 

Posted by WYW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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