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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1.03 전쟁을 이야기하는 두 가지 방식

“나는 정치에서 자유롭지 않다.”

한 기자가 있었다. 1936년 취재차 갔던 스페인에서 그는 펜과 수첩 대신 낡은 소총과 허름한 군복을 입고 의용대에 입대한다. 단지 파시즘에 대항하는 전쟁이라는 이유만으로 남의 나라 전쟁에 참여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스페인에 처음 왔을 때, 그리고 그 얼마 동안도, 정치적 상황에는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알지도 못했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만 알았지, 어떤 종류의 전쟁인지도 몰랐다.” 1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 내전이 종식될 무렵 그는 모든 자유주의자들과 혁명세력들이 막아내려 했던 프랑코의 파시즘보다 더 무서운 적이 바로 곁에 있었음을 깨달았다. 전선의 참호에서 함께 싸웠던 동지들이, 자신을 비롯한 수많은 이들을 프랑코의 사주를 받아 전쟁을 패배로 이끈 “트로츠키주의자”로 몰아 즉결 처형에 부쳤던 것이다.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여 영국으로 탈출한 그는 공산당 계열의 거의 모든 신문들이 스페인에서보다 더 무서운 숙청의 펜을 휘두르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울분과 억울함에서, 아니 그보다는 자신이 처음으로 맡았던, 짧지만 강렬했던 바르셀로나 혁명의 내음을 잊지 않기 위해 그는 한 편의 르포를 써내려갔다. 그 르포의 제목은 <까딸루니아 찬가 Homage to Catalonia>, 그 기자는 바로 조지 오웰(George Orwell)이었다.

오웰은 이 전쟁 이후 “내가 어디에 서 있는가를 알게 되었다”고 회고하며 그 이후에 쓰여진 모든 글의 한 줄 한 줄이 "정치적"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기자로서 그에게 전쟁은 취재해야 할 사실들(fact)의 연속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그에게 전쟁은 끊임없는 반성과 번민, 그리고 분노를 통해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게 된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을 것이다. 그 고통을 거쳐 훗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정치적 목적이란 세계를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욕망, 성취하고자 하는 사회가 어떤 사회여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보려는 욕망이다. 다시 말하지만, 어떤 책도 진정한 의미에서 정치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견해 자체도 하나의 정치적 태도이다.”

 

“국가라는 어처구니 없는 그 무엇에 목숨을 걸어야 하나?”

한 병사가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그는 친구들과 ‘객기’로 육군 항공대에 입대해 폭격수로 코르시카에 배치된다.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폭격하던 그는 “무슨 즐거운 놀이라도 하는 기분”으로, “헐리우드 영화에서 만들어 내는 영웅적인 무용담에 어찌나 철저히 세뇌가 되었는지” 37회의 출격 동안 죽음에 대한 어떤 두려움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전우들의 비행기가 격추되고 그가 탄 B-25 폭격기가 고사포에 맞아 포탑의 사격수가 부상을 당하자 이 전쟁에서 도망칠 생각만을 하게 된다. 60회의 출격을 끝으로 제대한 그는 약 10년 후 당시의 경험을 토대로 한 편의 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그 소설이 바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최고의 반전 소설 중 하나로 꼽힌 <캐치-22 Catch-22>, 그 병사의 이름은 조지프 헬러(Joseph Heller)였다.

“캐치-22”는 명문화된 적은 없으나, 모두가 알고 있는 조항으로 “정신이상자는 제대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정신이상자임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정신이상이 아니므로 제대할 수 없다”는 이율배반적인, 그 자체로 논리적 모순인 일종의 덫(catch)과 같다. ‘객기’로 뛰어들었던 전쟁에서 헬러는 전쟁이란 자신이 살기 위해 자신 이외의 모든 이들을 죽여야 하는, 그래서 개인의 목숨을 담보로 국가라는 관료주의가 벌이는 자기모순적인 범죄임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조국에 대해서도 소설 속 노인의 입을 통해 “국가라는 어처구니없는 그 무엇”이라는 신랄한 비판을 쏟아내고 만다. 이 비판의 매서움에 논리적 모순을 드러내는 특유의 풍자를 더해 이 소설은 60년대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미국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헬러 열풍(Heller cult)”을 불러일으켰다. 한 병사에게 전쟁은 조국을 위해 희생을 기꺼이 감수해야 할 애국의 장인지는 몰라도, 인간 헬러에게 전쟁은 “모든 인간의 광증이 남김없이 드러나는, 자신의 정상적 의식과 체제의 비정상적 논리 사이”에서 외롭게 투쟁해야 할 모순의 공간이었다.

 

전쟁기사와 전쟁소설은 다르다?

기사와 소설은 다르다고 한다. 기사는 팩트를 다루며, 소설은 픽션을 다루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이런 이분법을 넘어서면 기사나 소설이나 모두 사실 이상의 ‘의미’를 전달하는 이야기(story)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똑같은 연평도 포격 관련 팩트들을 보도하더라도 호전적 기사와 그렇지 않은 기사는 사실의 선택 문제가 아닌 기사가 주는 의미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연평도 포격 사태 이후 근 한 달간 우리는 지상파 방송의 메인뉴스들에서 무슨, 아니 어떤 이야기들을 들었던가? 포공격을 받은 면사무소 CCTV에 폭발음을 입히거나 포탄 연기에 CG작업을 더한 ‘극사실주의(?)’가 등장했고, 그래픽 화면을 통해 3D 보도를 연습하기도 했으며, 이스라엘과 같은 다른 국가들의 대응을 소개하는 ‘해외사례’를 이야기하기도 했다.

 

당연히 뉴스보도에서 오웰의 ‘정치성’이나 헬러의 ‘모순어법’을 드러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교전 상황에서 사실 이상의 의미를 말하는 이야기로 뉴스를 본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팩트의 선택을 넘어선 태도, 곧 전쟁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천안함 때에도 그랬지만 이번 연평도 교전 이후의 보도들에서도 확전 가능성만을 이야기 했지 전쟁이 아닌 다른 선택은 없는지, 교전 직후 “해병대 입대 자원자가 늘었다”는 군의 발표를 반복할 뿐 전방에 자식을 보낸 부모들의 심정이 어떠한지를 다룬 기사들은 얼마나 있었던가. 교전 이후 근 한 달 간의 보도는 그야말로 3류 소설에 지나지 않았다.

 

오웰에게 스페인 내전은 확인할 길 없는 루머와 사실들이 난무하는 혼돈의 장이면서도, 뚜렷한 ‘정치성’을 가지고 임해야 할 또 다른 전장이었다. 이 ‘정치성’을 언론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객관성에 위배되는 당파성이라 해도 좋다. 그러나 오웰에게 정치성이란 그의 말처럼 지금 여기에서 누구의 편을 드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성취해야 할 사회가 어떠한 사회인가”라는 미래의 문제였다. 오늘 우리에게 연평도 교전 이후, 아니 이명박 정권 이후 이 분단 상황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며 지금을 보도하는 언론이 있었던가? 헬러에게 전쟁이란 국가라는 미쳐버린 체계의 비정상성과 국민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개인이 자신을 보존하려는 정상성 사이의 분열에 다름 아니었다. 극도의 확전 위험을 가져올 “연평도 훈련 강행에 국민적 신뢰와 성원”을 보내자는 언론은 과연 정상인가? “인내가 아닌 강한 대응만이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냉전시대의 모순적 수사(rhetoric)를 재탕하는 그 비정상성을 어떤 언론이 폭로하고 있는가?

 

국익과 알권리의 사이에서

한국언론진흥재단토론회ⓒ 미디어스 송선영


얼마 전,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전시-비상상황에서의 취재보도 준칙”이라는 주제의 토론회가 열렸다고 한다. 충분히 예상했던 제안들이 나왔다. 안보와 관련된 “국익”과 민주주의의 기반인 “국민의 알권리” 사이의 충돌이 전쟁이나 비상상황 시에 더욱 민감해 진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구체적인 준칙을 얼마나 세밀하게 만드는가의 문제 이전에, 이미 이런 논의 자체에는 보다 큰 이익을 추구하는 “국가”와 알권리를 가진 “국민” 사이에 냉정한 중립자로서의 기자라는 지독한 직업의식(professionalism)의 이데올로기가 도사리고 있다. 정확히 물어보자. 기자가 존중해야 할 국익이란 향후 국정 주도권을 노리는 특정 세력의 이익이 아니었나? 국민의 알권리란 내가 알고 싶은 정보에의 접근권이 아니라 기자들의 취재권이 아니었나? 특히 전쟁과 같은 극한의 상황에서 언론은 어떤 때는 국익의 이름으로 ‘국민’들에게 훈계를, 다른 때는 ‘국민’의 이름으로 국가에 비판을 날린다. 결국 국익과 알권리의 충돌이란 언론이 자신의 입지를 정하지 못했다는 혼동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정말로 언론이 전쟁과 같은 극한의 상황에서 올바른 ‘이야기꾼’이 되고자 한다면, 고통 속에서 자신의 정치성을 발견한 오웰의 반성과 매카시즘의 광풍에서도 국가에 대한 회의를 멈추지 않았던 헬러의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전쟁이란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없는, 그저 전쟁을 어떻게 보도해야 하는가라는 답만을 제공해 주는 “보도준칙”은 그래서 허무하다. 적어도 그런 준칙이 여전히 국익과 알권리 사이의 기만적인 줄타기를 위한 면죄부가 될 때는 말이다.

미디어스 2010년 12월 25일 기고문


Posted by WYW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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