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ivial'에 해당되는 글 16건

  1. 2014.04.22 "살인자"의 지목보다 중요한 것
  2. 2010.07.31 열대야
  3. 2008.04.02 An Epigram from SF
  4. 2008.02.12 공교육의 위기?
  5. 2008.01.07 R.I.P: Jean Baudrillard
  6. 2008.01.07 개론서의 조건
  7. 2008.01.07 반지하 블루스
  8. 2008.01.03 월드컵 후기
  9. 2008.01.03 고급속물 2
  10. 2008.01.03 Feeling like going home 3



한국의 페리호 참사는 진정 끔찍한 사태이지만, 그렇다고 살인은 아니다.

: 아이들이 포함된 어떤 비극이라도 격한 감정을 일으킬 것이지만, 세월호의 선원들에게 “살인자”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다.

Mary Dejevsky


비참했던 처음의 반응은 논외로 하면 한국의 페리호 참사 여파는 점점 그 한계까지 감정이 고조되고, 극심해지는 듯하다. 어떻게 그렇지 않겠는가? 476명의 탑승객 중에서 174명만이 구조되었다. 구조되지 못하고 남은 300명이 넘는 이들 중 대부분이 아이들이고, 이들은 서울 근교의 같은 학교 학생들이다. 이들은 배가 기울어지고 전복되었을 때 그 안에 갇혀있었다. 행여나 다수의 생존자들을 찾아낼 가능성은 늘 그렇지만 희박하다.


사고 발생 6일째에 이르러 국가의 수장인 박근혜 대통령은 결국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여기서 박대통령은 일부 페리호 선원의 행동이 “살인과 다를 바 없다”며 규탄했다. 대통령은 직접적으로 학부모나 한국민 전체가 아니라 정부 관료들을 대상으로 했지만, 잘못이 밝혀진 이들에게는 그들의 행동에 대한 “민형사상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서구에서라면 명백한 국가적 비극에 이렇게 늑장 대응을 한 국가의 리더가 지지율은 물론이고 그 직위까지 온전히 유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시기상으로 부족했던 점을 단호한 대응으로 메우려 했다. 번역과 문화적 차이에서 있을 수 있는 복잡함을 고려하더라도 “살인”이라는 말이 눈에 띈다. 한편으로 보면 그런 말은 지금과 같은 재난에 대한 격한 감정을 동반한 것일 수 있다. 10대들이 부모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나이에 비해 훨씬 어른스러운 도덕적 각성을 보여준 문자들이 있다. 어찌할 바를 몰라 흐느끼고, 분노하며 부둣가에 모인 절망에 빠진, 여전히 자식들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모들이 있다. 교감 선생님은 자살을 했고, 유서에는 자신의 책임졌던 수많은 아이들이 죽은 후에 구조되어 살아 갈 수 없다고 남겼다.


분노와 슬픔의 격하게 뒤섞이는 것은 어떤 곳의 재난에서도, 특히 많은 아이들이 유명을 달리한 곳이라면 당연한 일이다. 영국의 경우, Aberfan의 비극을 생각해 보자. 웨일즈의 광산 마을이었던 이곳에서는 산사태로 마을의 학교가 파묻혀 100명이 넘은 아이들이 사망했다. 1966년에 있었던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마음의 상처가 되고 있다. 똑같이 생생한 슬픔이 러시아 남부의 Beslan에도 남아있다. 10여 년 전 여기서는 200명에 가까운 아이들이 체첸 인질범에 손에 죽거나, 서툰 구조작전의 와중에 사망했다. 또 2008년 스촨성 지진에서 죽은 아이들의 부모들을 흐느끼게 한 분노를 생각해 보자. 그것은 사고 이후 당시 지방 정부의 부패로 인해 학교 건물이 규정을 위반하여 지어졌음이 알려지자 온갖 정치적 억압에 대한 저항에서 나온 분노였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의 “살인”이라는 비난으로 돌아와 보자.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살해되었는가? Beslan에서 죽은 이들은 고의든 그렇지 않든 테러 행위로 인한 결과로 죽임을 당했다. 영국에서 Aberfan의 산사태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부주의 때문에 처벌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87년 193명의 목숨을 앗아간 Zeebrugge의 '헤럴드 오브 프리 엔터프라이즈‘ 페리호 침몰 이후 회사의 대표는 최종 책임을 지고 사퇴했지만, 선박의 차량 출입용 램프 도어를 닫지 않은 선원들에게 직접적인 책임을 몰아가는 것에는 조심스러웠다. 사람이 아니라 과정에 대한 책임을 더 물었던 것이다.


아마도 한국에서 벌어진 사태는 이런 방향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지금까지 나온 공개된 녹취록들이 선장과 선임 선원의 대응에 영향을 준 혼란, 무능력과 공포를 알려주고 있지만 말이다. 응징을 원하는 부모와 대중들의 바람을 거부하긴 쉽지 않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책임과 고의에 대한 보편적인 질문은 다시 제기될 지도 모른다. 죽음이 실수나 공포 때문에 벌어진 결과라면, 누군가에게 살인자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이 정당한가? 부분적으로는 그 선을 어디에 그을지는 문화적 차이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살인”을 말할 때, 그 선을 어디에 그었는지는 동양에서도 그렇지만, 서양에서도 마찬가지로 분명하다.


원문 출처: <가디언> 2014년 4월 21일자

Posted by WYWH
2010. 7. 31. 21:54
장마가 끝났다고 하더니 열대야가 제대로 시작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며칠 연속 음주 스케줄이 열대야인지도 모르게 해주었건만 맨정신에 잠을 청하려니 이거 보통일이 아니다.

"아직도 에어컨 없는 방에 살아?"
순진한 눈 크게 뜨며 이따위로 물어보는 사람은 없겠지만, 에어컨 한 번 원없이 틀고 다음 달 전기요금 청구서를 보며 "절전형 에어컨 구입이냐, 이명박 타도냐"고 고민하긴 싫다.
결국 올해도 밤낮으로 고생할 선풍기를 몇 분씩 에어콘으로 달래주면서 보내야 겠다.
뭐 이렇게 해주면 에어컨도 지가 할일이 벽에 걸려있는 것만은 아니란 걸 알 것이고, 에어컨 리모콘도 "왜 나는 TV를 틀 수 없을까?"라는 심각한 자기 고민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열대야가 긴 밤을 만들어 줄 때 들으면 좋은(?) 곡 하나... 

Guitarra, D Melo Tu
 
내가 세상에 물어보면 세상은 날 속일거야.
다른 사람은 다 변해도 나는 변하지 않는다고 모두들 믿고 있지.
긴 밤을 지새우며 나는 새벽의 여명을 기다리네.
이 밤은 왜 이다지도 길으냐.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어제의 부드러운 진실이 오늘은 잔혹한 거짓말로 변했네.
비옥했던 땅조차도 모래땅으로 변하네.
나는 긴 밤을 지새우며 새벽의 여명을 기다리네.
이 밤은 왜 이다지도 길으냐.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인간들은 죽은 신들이지.
이제는 허물어지고 없는 신전에 살았던 그들의 꿈조차도 구원받지 못할 거야.
남은 건 희미한 그림자 하나 뿐. 긴 밤을 지새우며 나는 새벽의 여명을 기다리네.
이 밤은 왜 이다지도 길으냐.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Atahualpa Yupanqui_Guitarra, D Melo Tu

Posted by WYWH
2008. 4. 2.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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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s said: "The History of every major Galactic Civilization tends to pass through three distinct and recognizable phases, those of Survival, Inquiry and Sophistication, otherwise known as the How, Why and Where phase.
"For instance, the first phase is characterized by the question How can we eat? the second by the question Why do we eat? and the third by the question Where shall we have lunch?"

From Duglas Adams(1979), <Hitchhiker's Guide to The Galaxy>, Del Rey. p.215.
Posted by WYWH
2008. 2. 12. 00:16

  오늘 저녁 6시에 밤 10시가 넘도록 대학원 3, 4층 강의실은 교육대학원 TESOL(Teaching English to Speakers of Other Languages) 학과 면접으로 바쁘다. 초조하게 기다리는 면접자들의 대화를 지나가며 듣자니, 이곳에 오기 위해 학원수강까지 불사했단다.

  새 정부가 내건 영어 공교육 강화의 파급력은 3차원에 걸치나 보다. 처음엔 영어 공교육 강화가 ‘영어 학원’과 같은 사교육 시장만 키울 줄 알았다. 뉴스에서 말하는 “실력있는 영어교사 부족”이 다시 ‘영어교사 학원’의 부흥을 낳을 줄은 미처 생각 못했다.(사교육 시장에 10년 넘게 있으면서도 난 아직도 이렇게 순진하다.) 그렇다면 이 '영어교사 학원' 역시 강사를 필요로 할 텐데... 어떤 분들이 되실지는 눈에 훤하다. 늦은 시간까지 면접을 기다리는 응시생들에게 그들이 얻을 직업이 “계약직”일 것이라는 사실, 자신들이 배울 몇 년의 커리큘럼이 실제 교육 현장에서 10%도 도움이 안되리라는 사실은 결코 중요하지 않다.
 2008년 한국 공교육의 문제는 평준화도 아니고, 교육수준의 저하도 아니다. 공교육을 ‘받기’위해서나, 공교육을 ‘하기’위해서나 모두 사교육 시장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바로 공교육의 문제이다.
이쯤되면 공교육에서 더 높은 등급을 받기 위해 사교육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교육의 상품을 제공하기 위해 공교육이 존재하는 셈이다. 결국 공교육 ‘개혁’이란 사교육 시장에 어떤 상품을 주문할지 결정하는 과정이 돼버렸다. 이렇게 공교육/사교육의 분리를 전제로 하는 교육개혁은 전혀 교육적이지 않다.

ps: 예전에 쓴 글을 보니,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 아니라 “이명박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 이런 지경은 이미 준비되고 있었고, 이명박은 단지 액셀만 더 힘껏 밟았을 뿐이다.

Posted by WYWH
2008. 1. 7. 0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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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나는 허무주의자가 아니다. 허무주의적인 것은 바로 체계의 현실이다. 즉, 모든 가치의 폐기와 혼돈과 무차별화가 허무주의라면, 그것을 작동시킨 것은 체계다. 예컨대, 오늘날에는 자본마저 가치를 희생시킨다. 가치의 저 너머에서 순수한 투기에 몰두하는 것이다. 정치는 대표성(représentation)의 가치를 희생시킨다. 그것은 더 이상 대표성의 합리적 체계가 아니라, 전략에 불과하다. 우리는 실재를 희생시킨다. 허무주의는 사실상 체계 자체다. 우리가 명민하게 이 허무주의를 분석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허무주의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늘 메시지와 메시지 전달자를 쉽게 혼동한다. ‘허무주의에 관해 말하는 것을 보니 당신은 허무주의자군’, 혹은 ‘체계를 분석하는 것을 보니, 당신은 체계의 편이군’ 이런 식이다. 그런 말들은 전혀 흥미롭지 않다. 이는 대상에 대한 도덕적, 심리학적인 가치판단인데,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은 것이다.”

“장 보드리야르와의 대담” 이상길, <프로그램/텍스트>, 2005년 12호. 188쪽.

  보드리야르의 책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의 제목은 “기호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이다. 이거 제목부터 좀 어렵다. 이 제목은 “기호학을 통한 정치경제학 비판”으로도 읽을 수 있고, “기호로 구성된 정치경제를 비판”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다.
  몇 년 전 대학원 수업에서 보드리야르의 방법론에 대한 글을 쓰라는 말을 들었다. 저 책 제목을 가지고 생각해 보면, 그 때의 요청은 정치경제학을 비판했던 보드리야르의 “기호학”을 정리해 보라는 의도였다. 그러나 만일 보드리야르의 작업이 “기호를 비판”하려는 것이었다면, 그 과제는 전혀 엉뚱한 요청을 한 셈이다. 기호학 방법론을 정리한다는 것은 보드리야르가 비판하려던 대상을 묘사하는 일일 뿐이며, 그 대상의 묘사는 이데올로기를 판단하는 “과학”으로 오인되기 때문이다. 더욱 나쁜 일은 그 대상에 부여된 가치판단이 배제되어 버린다는 사실이다. “메시지와 메시지 전달자를 혼동”하고 있다는 보드리야르의 말은 정확히 이런 촌극을 가리킨다. 그의 말을 조금 바꾸자면 “비판의 대상과 비판 그 자체를 혼동”하고 있는 셈이다. 신문방송을 전공한다고 해서 내가 신문방송학자가 되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Posted by WYWH
2008. 1. 7. 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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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론서”에는 흔히 두 가지 담론의 구조가 존재한다. 하나는 개론서의 각 장을 차지하는 사상가 혹은 이론가들의 압축된 개념들과 그 배치이다. 여기에서는 개론서에 등장하는 대가들의 목소리를 어느 정도 느낄 수 있고, 그들 사유의 편린들을 엿볼 수 있다. 대부분의 개론서를 평가하는 기준은 대가들의 핵심 개념을 얼마나 잘 발췌했는지, 그리고 그들의 학문적 궤적에 얼마나 충실하게 개념들을 배치했는지에 집중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또 다른 담론은 왜 그런 개념들이 선택되었고, 어떤 이유로 그것들의 배치가 정해졌는지, 나아가 수많은 대가들 중 왜 ‘그들’이 개론서라는 무대에 등장했고, 등장의 순서가 어떻게 정해졌는지 이다. 요컨대 담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선택과 배제’가 이중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하나는 대가들의 개념들을 대상으로 하며, 다른 하나는 대가들 자체를 대상으로 행해진다. 사실상 대가들을 소개하는 각 장(Chapter)들 내부에 배치되는 개념들은 개론서 전체를 관통하는 대가들에 대한 선택과 배제라는 담론의 한계 내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언젠가 힐쉬베르거(Hirschberger)가 “철학사의 서술은 또 다른 철학이자 철학-함”이라고 말한 것은 정확히 이러한 담론을 가리킨 것이다.

  결국 이중의 담론 구조를 갖는 개론서에서 중요한 것은 선택된 내용과 목록이 아니라, 그로 인해 배제된 것, 즉 담론의 경계 ‘외부’이다. 좋은 개론서란 바로 이 ‘외부’를 사유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하며 이 ‘외부’, 곧 개론서라는 텍스트의 ‘공백’이야 말로 유물론적 사유를 가능케 하는 장소가 된다. 만일 이 공백이 없다면, 개론서는 단순히 대가들의 개념을 단순재생산하는 복사본일 뿐이다. 메리필드의 『매혹의 도시, 맑스주의를 만나다 Metromarxism』는 이러한 외부와 공백이 드러나고 있는지, 아니 그것을 사유하게 하는지에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맑스주의 전통의 “도시적 변증법” 이라는 하나의 테마 속에서 펼쳐지는 8명의 대가들의 소개는 그것이 이전 시기 다른 전공과 주제 하에서 소개된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왜 메리필드는 스스로가 맑스의 저작 속에서는 도시연구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하면서도 그를 첫 등장인물로 삼았던 것일까?

Posted by WYWH
2008. 1. 7. 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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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유재산이 우리를 너무나 우둔하고 너무나 일면적이게 만들어 버렸기 때문에 우리가 대상을 가질 때, 따라서 대상이 우리에게 자본으로서 존재할 때 또는 우리가 대상을 직접적으로 점유할 때, 먹고 마시고 우리 몸에 걸치고 그 안에 거주할 때 등, 간단히 말해서 사용할 때에야 비로소 대상은 우리의 것이 된다. 사유재산은 또다시 점유의 이 모든 직접적 실현들 자체를 생활 수단으로서만 파악하고, 이 실현이 수단으로서 봉사하는 생활은 사유재산의 생활, 노동과 자본화라해도.
  그런 까닭에 모든 육체적 정신적 감각 대신에 모든 이러한 감각들의 단순한 소외, 소유의 감각이 등장하였다. 인간의 존재는 절대적 빈곤으로 환원되어 자신의 내면의 부를 자기 바깥으로 내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중략]

  우리는 위에서 인간이 혈거 등으로 되돌아가지만, 소외된, 증오하는 형태를 띠고 그곳으로 돌아간다고 말하였다. 자신의 동굴― 공평하게 야만인에게 향유와 보호를 제공해 주는 자연 요소 ―에 있는 야만인은 낯설다는 느낌을 받지 않고, 오히려 물속의 고기처럼 아늑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의 지하 주거는 적대적인 “낯선 힘을 가지고 있는 주거, 그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살점을 내줄 때에만 주어지는 주거”, 그가 자신의 고향― 나는 지금 여기 나의 집에 있다고 마지막에 말할 수 있는 곳 ―이라고 간주할 수 없는 주거이거니와, 그 집안에서 오히려 그는 타인의 집, 낯선 집에 있는 것이요, 날마다 잠복해 있다가 그가 임대료를 지불하지 않는 날에는 언제든지 그를 내쫓고야 마는 타인의 집에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의 주거가 그 질적인 측면에서 보면 피안의 주거, 부의 천국에나 있는 주거, 상주할 수 있는 인간적 주거와 대립함을 알고 있다.
  소외는 나의 생활 수단이 타인의 생활 수단이라는 것, 나의 소원이 접근할 수 없는, 타인의 소유라는 것에서 뿐 아니라 모든 사물들 자체가 다른 사람의 것이라는 것, 나의 활동이 타인의 것이라는 것, 마지막으로― 이것은 자본가에게도 해당되는데 ―일반적으로 비인간적인 힘이 [지배한다]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K. Marx(1844), 강유원 옮김,『경제학, 철학 수고』 中

  언젠가 카프카는 한 편지에서 “한 권의 책, 그것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고 말했다. 굳어버린 감성을 한 번에 휘저을 수 있는 책을 말한 것이지만, “머리에 주먹으로 일격을 가해서 각성을 시켜주는” 책은 감정 뿐 아니라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사고의 한계를 극한까지 몰아가는 글이어야 한다.
  맑스의 『1844년 경제학, 철학 수고』는 그런 책이었다. 익히 안다고 생각했던 개념과 방법들을 다른 각도에서 보게 해준다. 소외(이후 물신성에 대한 이해에 필수적인), 대상화, 유적존재(아마 이 수고에서 가장 결정적인 개념), 활동과 노동, 경제와 정치의 분리, 부정, 이론과 실천의 분리로 대표되는 이원론과 맑스의 총체성, 추상과 구체의 방법론, 그리고 욕망... 이루 셀 수 없을 개념들의 모험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자본』에 이르기까지 명시하고 또는 숨겨놓은 고리들을 발견하게 해준다.
  이런 저런 설명보다 위의 저 구절은 반지하와 옥탑에 사는 남한의 모든 세입자들의 심금을 울려줄 명언이라 하겠다. 내가 살고 있지만 나의 집이라 부를 수 없는 곳, 나에겐 생활의 수단이지만 다른 이에겐 재산의 증식이 되거나 수입원이 되는 곳, 활동과 그 결과물이 분리되어 어떻게 소외를 만드는지 어떻게 이처럼 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나아가 맑스는 이러한 물적 소외가 어떻게 우리들의 감각에 영향을 끼치는지 설명한다. 지하의 혈거에 살아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미적 감각을 기대할 수 있을지, 그래서 “근심에 가득 차 있는 궁핍한 인간은 아무리 아름다운 연극을 보더라도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한다”는 맑스의 말은 이론과 책에서 베껴낸 말이 아니다.
  확실히 글은 그가 사는 만큼 써지고, 내가 사는 만큼 읽혀진다. 똑바로 살고 볼 일이다.

Posted by WYWH
2008. 1. 3.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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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흑인이 성조기 대신 검은 장갑을 높이 들었다. 68년 멕시코 올림픽 육상 200m에서 1, 3위를 기록한 토미 스미스와 존 칼로스. 온갖 정치적 흑막으로 얼룩진 근대 올림픽 1백년 사상 가장 위대한 순간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IOC는 즉각 그들을 올림픽 정신을 무시한 비도덕적인 인물로 비난하였으며 미국은 두 선수의 자격을 박탈시키고 강제귀국 시켰다. 그러나 두 순교자에 대한 여론, 특히 참가 선수들의 찬사는 거세지기만 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수상대에 나란히 선 은메달리스트 피터 노먼(호주). 그는 시상식 후 ‘올림픽 인권운동’이라는 뱃지를 달고 다니며 두 선수의 뜻을 기렸다.”

계간 Review 8호 (1996년 가을) 중에서

  월드컵이 끝난 지금 우연히 오래된 계간지에서 이 사진과 글을 발견했다. 이번 월드컵에선 검은 장갑도, 그 장갑을 지지했던 선수들도 없었다.
Posted by WYWH
2008. 1. 3.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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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거룩한 속물들

김수영

 

  소설이나 시의 천재를 가지고, 쓰지 못해 발광을 할 때는 세상이란 이상스러워서, 청탁을 하지 않는다. 반드시 그런 재주가 고갈되고 나서야 청탁을 시작한다. 그러니까 무릇 시인이나 소설가는 청탁이 밀물처럼 몰려들어올 때는 자기의 천재는 이미 날아가 버렸다고 생각하는게 좋다. 일껏 하던 놀음도 멍석을 깔아놓으면 못한다는 말의 '멍석'이 청탁이 되는 예를 글쓰는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한번씩은 느끼는 것이 아닐까.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매일같이, 매달같이 너절한 신문소설과 시시한 글들이 쉴새없이 쏟아져 나올 수 있겠는가.
 
'속물론(俗物論)'의 청탁을 받고 우선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이런 얄궂은 생각과 쓰디쓴 자조의 미소뿐. 도무지 쓰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고, 붓이 철근같이 안 움직인다. 세상은 참 우습다. 그렇게 이를 갈고 속물들을 싫어할 때는 아무 소리도 없다가 이렇게 내 자신이 완전무결한 속물이 된 뒤에야 속물에 대한 욕을 쓰라고 한다. 세상은 이다지도 야박하다.

…(중략)…

 우선 나는 지금 매문(賣文)을 하고 있다. 매문은 속물이 하는 짓이다. 속물 중에서도 고급속물이 하는 짓이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매문가의 특색은 잡지나 신문에 이름이 나는 것을 좋아하고, 사진이 나는 것을 좋아하고, 라디오에 나가고, 텔레비에 나가서 이름이 팔리고, 돈도 생기고, 권위가 생기는 것을 좋아한다. 입으로야 물론 안 그렇다고 하지. 그까짓 것, 그저 담배값이나 벌려고 하는 거지. 혹은 하도 나와달라고 귀찮게 굴어서 마지 못해 나간 거지, 입에 풀칠도 해야 하고, 자식 새끼들의 학비도 내야 할 테니까 죽지 못해 하는 거지, 정도로 말은 하지. 그러나 사실은 그런 것만도 아닐껄...... 그런 것만도 아닐껄......
 그러다가 보면 차차 돈도 생기고, 살림도 제법 안정되어가고, 전화도 놓고, 텔레비도 놔야 되고, 잡지사나 신문사에서 오는 젊은 기자들에 대한 체면이나, 다음 청탁에 대한 고려를 해서도, 다락 구석에 처박아두었던 헌잡지 나부랭이나 기증받은 책까지도, 하다 못해 동화책까지도, 말끔히 먼지를 털어서 비어 있는 책꽃이의 공간을 메워놓아야 한다. 그리고 베스트쎌러의 에쎄이스트로 유명한 A, B, C의 뒤를 따라 자가용차를 살 꿈을 꾸고, 펜클럽 대회가 빠리와 미국에서 언제 열리는가에 신경을 써야 한다. 
 이
런 악덕은 누차 말해두거니와,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다. 그래서 나는 전법을 바꾸었다. 이왕 도둑이 된 바에야 아주 직업적인 도둑놈으로 되자. 아무개 아버지 같은 좀도둑이 아니라, 남의 땅에 허가 없이 집을 짓는 아무개 아버지가 도둑질을 한 집의 주인 같은 날도둑놈이 되자. 그래서 하다 못해 무허가의 죄명으로 집을 헐리고 때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 편이 낫다. 그 편이 훨씬 남자답고 떳떳하다. 즉, 나다.
 이 내가 되는 일, 진짜 속물이 되는 일, 말로 하기는 쉽지만 이 수업도 사실은 여간 어렵지 않다. 속물이 안되려고 발버둥질을 치는 생활만큼 어렵다. 그리고 그만큼 고독하다. 현대사회에 있어서는 고독은 나일론 재킷이다. 고독은 바늘만치라도 내색을 하면 그만큼 손해를 보고 탈락한다. 원래가 속물이 된 중요한 여건의 하나가, 이 사회가 고독을 향유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속물이 된 후에 어떻게 또 고독을 주장하겠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속물은 나일론 재킷을 입고 있다. 아무한테도 보이지 않는 고독의 재킷을 입고 있다. 그러니까 이 재킷을 입고 있는 사람은, 이 글 제목대로 '거룩한 속물' 즉 고급속물의 범주에는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것은 이 나일론 재킷을 입은 속물이다. 고독의 재킷을 입지 않은 것은 저급속물이지 고급속물은 아니다. 고급속물은 반드시 고독의 자기의식을 갖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규정을 하면 내가 말하는 고급속물이란 자폭(自爆)을 할 줄 아는 속물, 즉 진정한 의미에서는 속물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아무래도 나는 고급속물을 미화하고 정당화시킴으로써 자기변명을 하려는 속셈이 있는 것 같다. 이쯤 되면 초(超)고급속물이라고나 할까. 인간의 심연(深淵)은 무한하다. 속물을 규정하는 척도도 무한하다.......(이하생략)

[동서춘추 1967년 5월호; 창작과 비평 2001년 여름. 241-243쪽]

Posted by WYWH
2008. 1. 3.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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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ey Harris & Ali Farka Toure>

  블루스만큼 폐쇄적이면서도 개방적인 음악이 또 있을까. 블루스를 한 번이라도 연주해 본 사람이라면 그 단순한 코드진행과 멜로디에서 무한한 변주의 매력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블루스를 단지 귀로만 듣는 이에게 이 단순함은 곧 지루함으로 바뀌기 일쑤이다. 비슷비슷한 음의 진행은 그렇다쳐도 가사까지 매일 사랑타령이니 앨범 전곡 감상이란게 고역일 수 밖에... 그러나 Rock'n Roll, R&B, Jazz의 Blue note, 심지어 오늘의 Hip Hop까지 블루스의 영향권 내에서 벗어난 미국태생의 음악을 찾기엔 쉽지 않다. 앨비스의 프로듀서가 멤피스에서 유명했던 블루스 제작자였던 사실도 블루스가 얼마나 많은 아종과 변종들을 낳았는지 보여주는 한 예가 될 것이다.

  대중음악의 진화에서 폐쇄와 개방은 동일한 균형과 교차로 진행되지 않는다. 블루스가 자신의 아종을 낳을 수록 그 아종은 또 다른 종으로 변형되어 진화의 나뭇가지에서 더욱 멀어져 가기 때문이다. 스콜세지가 블루스의 역사를 "황홀하고 매력적인 스토리텔링의 문화사"라고 말한 이유는 무성한 나뭇잎에서 뿌리로 가는 여정이 단지 5음계 형식의 원류를 찾기 위한 것만은 아닐 듯 하다. 블루스가 아종을 낳을 수록 잊혀져 간 것은 그 음계가 아니라 바로 지금의 대중음악이 끌어안지 못하는 미국 역사의 한 축이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스콜세지의 블루스 여정은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들이 첫발을 내딛은 미시시피 델타에서 2000년대를 살아가는 코리 해리스(Corey Harris)를 통해 시작된다. 해리스의 여정은 1930년대 미국의 민요수집가였던 존 로맥스와 앨런 로맥스 부자의 기록에 상당부분 의지한다. 그럼에도 윌리 킹(Willie King), 쟈니 샤인스(Johnny Shines), 타지마할(Taji Mahal) 등이 떠올리는 기억들은 노예노동과 인종차별, 그리고 앞선 뮤지션들의 요절의 역사에 대한 증언으로 손색이 없다. 어디 말 뿐이겠는가. 델타 선술집에서 "Spoonful"을 연주하던 Willie King의 모습은 블루스가 걸어온 소외와 포섭의 역사를 그대로 증언해 준다.(Cream이 휘황찬란한 앨버트 홀에서 Spoonful을 연주하던 모습을 떠올려보라..) 미대륙에서 블루스의 여정이 끝나는 곳은 블루스를 낳았던 아프리카 음악의 흔적을 발견한 미시시피 북부이다. 아직도 생존하고 있는 오타 터너(Otha Turner)의 피리와 손녀의 북소리는 해리스의 기타와 어울려 날 것 그대로의 블루스를 들려주지만, 북조차 허용되지 않았던 목화농장의 기억은 여전히 암울하게 남는다.

  스콜세지와 해리스의 여정은 이 북소리가 처음 울렸던 아프리카 서안의 말리에서 끝을 맺는다. 블루스의 고향(Home)에서 스콜세지가 보여주는 풍경은 마치 미시시피의 험난한 역사에 대한 보상처럼 느껴진다. 말리의 한 귀족이 들려주는 "코라" 연주는 과거 세네갈에서의 노예사냥을 잊게 해주고, 생존을 위해 연주했던 존 리 후커(John Lee Hooker)의 기타소리를 애증의 눈길로 바라보게 한다. 스콜세지가 말리를 찾은 이유, 그가 고향으로 가고 싶었던(Feeling like going home)이유는 말리 니아푼케의 한 귀족, 알리 파르카 투르의 입을 통해 나온다.

"Black American은 존재하지 않아요. Black만이 존재할 뿐이죠. Black이 모든 것을 잃었지만 음악만은 아프리카의 것입니다. 절대로 Black people이 아프리카로 올 때는 다른 나라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들의 고향으로 오는 것이지요."

  스콜세지의 블루스 여정은 흑인들의 영원한 파라다이스를 보여주면서 끝을 맺는다. 그러나 이러한 결말이, 아니 미시시피강에서부터의 여정이 씁쓸하게 느껴지는 것은 스콜세지 자신 역시 블루스가 겪어온 폐쇄와 개방의 불균형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대륙에서 블루스가 시작된 미시시피 연안의 흑인 역사는 잔혹한 자본의 시초축적의 역사일 것이다. 그러한 시초축적은 그가 블루스의 고향으로 그려낸 말리에서, 그리고 아프리카 전역에서 벌어지는 현재 진행형이며, 바로 지금 미국 안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폭력이기도 하다. "그리오"의 흔적이 사라진 말리, 노예사냥을 과거로 흘려보내는 니제르강에서 그려낸 블루스의 고향은 스콜세지 자신이 바라는 묘한 노스탤지어의 정서 그 자체이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스콜세지는 블루스가 왜 5개의 음만으로 무한한 대중음악의 진화를 이루어 낼 수 있었는지 증명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스토리텔링의 문화사'로서의 블루스는 흘러간 상처의 기록이며 도시인들이 바라는 고향의 향기처럼 한차례 박제된 기록으로 남아 버렸다. 루이지애나의 이름 없는 블루스 악사가 자신의 '고향'인 말리로 갔을 때,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30년대 미시시피의 목화농장일지도 모른다.

* 그리오: 과거 아프리카 부족 족장들의 노예로 축제와 발라드를 담당했던 하층계급

Posted by WYW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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