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개혁'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2.03.25 2022년 한국의 종교
  2. 2020.11.29 언론개혁의 열망인가, 복화술의 정치인가

기독교, 불교, 천주교와 같은 종교보다 2022년 한국에는 더 강력한 종교가 있다. 정치와 언론, 정확히 말해 제왕적 대통령과 공정 언론이라는 종교다.

제왕적 대통령과 공정 언론은 시민이 바라는 이상적이며 완성된 정치와 언론의 상이다. 마치 종교가 억압받는 이들에게 천국의 완벽한 삶을 약속하듯, 제왕적 대통령과 공정 언론은 현실의 정치와 언론이 닿아야 할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다.

87년 민주화 이후 독재에 맞선 영웅 신화와 고착화된 거대 양당 체제는 대통령을 민중(people), 또는 시민(citizen)의 열망을 투영하는 인격체로 만들었다. 김대중과 노무현은 서로 다른 열망을 반영했다. 김대중은 박정희 정권에 맞섰던 민중의 항거가 낳은 정권교체의 상징이, 노무현은 신군부에 맞섰던 87년 민주항쟁으로 탄생한 시민의 열망이 투영되고 좌절된 상징이었다. 박정희와 박근혜는 어떠했는가. 이들의 독재와 불통은 ‘한강의 기적'을 만든 제왕의 혈통에 대한 숭배에서 얼마든지 눈감을 수 있는 흠결이었다. 이들의 적통을 잇는다는 두 정당은 이 인격체를 수호하고 재생산하는 폐쇄적인 정치 단위가 되었다.

대통령을 향해 시민의 열망을 투영하는 경로가 바로 언론이다. 이 열망의 투영은 두 가지 방향으로 작동한다. 한 축은 ‘사실에 근거하여' 자신들이 지지하는 대통령의 편을 드는 언론이며, 다른 한 축은 양당체제에서 대통령 선거를 놓고 경쟁하는 정당을 적으로 만드는 언론이다. ‘우리와 그들'이라는 구도에서 공정 언론은 두 정당, 두 후보에 대한 정파적 균형을 뜻한다. 우리 편의 잘못 만큼 그들의 잘못도 지적해야 한다. 우리에 대해 비판하는 언론은 그들 편을 드는 언론으로 사라져야 할 절대 악이다.

다수 언론은 이러한 정파적 열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어떤 언론은 자신이 ‘공정 언론'이라는 종교의 전도사가 되기를 서슴지 않는다. 공정 언론이라는 낙원은 발 딛고 선 땅이 ‘기울어진 운동장’이라 한탄하는 근거가 된다. 이들을 위한 예배당이 바로 ‘합리적 의혹'과 ‘가려진 진실'을 밝히겠다는 TV와 유튜브 채널들이다.

유튜브 채널 <전광훈 TV> [국민혁명당 LIVE] 화면 캡쳐


“마귀들과 싸울지라 죄악 벗은 형제여. 담대하게 싸울지라 저기 악한 적병과…” 같은 찬송, 문서와 사진을 흔들며 의혹이 진실임을 주장하는 간증, 그리고 악마를 향한 분노의 설교에 ‘아멘'으로 화답하고, 수퍼챗으로 헌금을 내면 예배가 끝난다. 반복되는 일상과 회사에 갇힌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는 이 예배당에서 신도와의 친교로 맺어지고 공정 언론을 향한 십자군을 결성하기도 한다.

예배당을 나온 신도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도 신도가 아닌 사람들, 그러니까 대통령 선거결과가 월세값 인상보다 의미가 없는 사람들, 공정 언론보다 감염병과 산업재해 대책 보도가 더 필요한 사람들은 결코 눈에 보이지 않는다. 행여 이런 사람을 만나면 ‘전도'에 나서기도 한다.

‘기울어진 운동장’은 환상이 아니라 공정 언론과 제왕적 대통령을 위한 제단이다. 제단이 없으면 제사장도, 신도도 없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바라는 기도문은 그렇지 못한 정치와 언론에 대한 비판으로, 예컨대 시민의 열망을 온전히 담은 인격체의 창출과 공정 언론을 위한 대책으로 나아간다. 진보 종편의 꿈은 더 큰 예배당을 향한 소망이지만, 개척교회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은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다.

제왕적 대통령과 공정 언론이라는 낙원으로 현실을 비판하는 신앙은 그 낙원을 꿈꾸게 한 현실의 실상을 잊게 만든다. 제왕적 대통령제가 과연 당연한 것인지, 이를 배출할 굳건한 양당체제가 정말 시민의 넓은 정치적 지향을 대의하는지 묻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정치 세력에게 ‘공정’은 무엇인지, 왜 언론은 표면적이고 선정적이며 인용이 쉬운 기사만을 쏟아내는지, 그럼에도 이들이 여전히 수익을 낼 수 있는 구조는 무엇인지도 묻지 않는다.

분명히 제왕적 대통령과 공정언론이라는 종교는 사람들, 특히 신도들에게 평안을 안겨준다. 이룰 수 없는 꿈이라도, 우유부단한 대통령과 편파적인 언론에 받은 상처의 진통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통제의 약효는 오래가지 않고, 더 많은 투여량이 필요해 진다.

정말 필요한 것은 정치와 언론이라는 종교가 만들어진 현실의 개혁이다. 양당체제와 제왕적 대통령 권한의 해체, ‘매체 영향력’이라는 무형 자산으로 수익을 내는 뉴스 콘텐츠 시장의 재편, 자본가 유한계급의 대리 여가를 수행하는 부속품으로 전락한 언론의 지배구조 개혁이 그것이다. 제왕적 대통령과 공정 언론을 숭배하는 신앙은 바로 이런 개혁의 가장 큰 장애물이다.

마르크스가 말했듯 “천상의 비판은 지상의 비판으로, 종교의 비판은 법의 비판으로, 신학의 비판은 정치의 비판으로 전환"(헤겔 법철학의 비판을 위하여)되어야 할 때, 비판은 어떤 행위인지 다시 고민할 때다.

Posted by WYWH

 

채영길 교수가 민주언론시민연합의 <언론 포커스>에 기고한 “‘언론 징벌적 손해배상제’와 합법성의 문제”는 언론개혁이라는 담론에 중요한 층위를 지적하고 있다.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은 민주당 정청래 의원의 <언론중재법> 개정안과 법무부의 상법 개정안이 제출되면서 “허위조작정보 처벌이냐, 언론의 자유냐”라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되고 있다. 물론 처벌과 자유의 이분법이 아니라 경실련, 언론개혁시민연대 등 시민단체와 학자들은 ‘가짜뉴스’의 모호함, 과잉입법의 우려, 위자료 현실화와 같은 대안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이 글은 처벌과 자유의 양자택일이나 그 중재안이 아니라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배에 찬성하는 시민의 입장- 미디어오늘에서 실시한 두 차례의 여론조사 결과로 확인된 -에 더 주목하고 있다. 과반이 넘는 찬성 여론은 고려하지 않고 징벌적 손배에 대한 현행 법체계 내 정합성이나 절충안을 제시하는 것에 그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언론의 자유와 열망의 도덕성

 

이 글은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배 찬성 여론에서 정의의 문제를 보고 있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이념이나 특정 직업군(언론인, 예술가 등)의 권리가 아닌 시민권의 하나로서 모든 시민이 평등하게 누려야 할 권리다. 이런 권리를 평범한 시민보다 주류 언론사나 기자가 더 많이 누리고 그로 인해 이익을 얻는다면 결코 정의롭지 않다. 현행법이든, 개정안이든 법에는 론 풀러가 말한 열망의 도덕성, 즉 법이란 지켜야 할 의무를 명시하려는 강제가 아니라 정의에 대한 갈망과 그것을 실현하려는 의지가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언론인 등 일부에게만 부여된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시민 또한 누려야 한다는 정의의 열망이 이번 개정안에 대한 찬성 여론으로 드러났다고 본다. 

 

이 분석은 징벌적 손배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 이분법이 아니라 언론개혁을 위한 시민의 열망이 드러난 계기로 보자는 뜻으로 읽힌다. 법안에 대한 사회적 논의과정에서 일반 시민 목소리는 없거나 무시되는 반면, 법안에 반대하는 언론 및 관련 전문가들의 목소리가 지배적이라는 불평등한 상황에 대한 지적은 중요하다.

 

그러나 법에 정의에 대한 갈망과 그것을 실현하려는 의지가 반영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대안은 될 지라도 징벌적 손배에 이입하기란 쉽지 않다. 언론개혁에 대한 시민의 열망은 여러 형태로 표현된다. 현 정권이 과제로 삼은 검찰개혁과 언론개혁은 보수 양당체제의 정치 구도에서 ‘적과 아군’이라는 담론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두 개혁 모두 그 대상의 인격화를 필요로 한다. 검찰개혁은 검사 조직과 검찰총장을, 언론개혁은 조중동과 종편 뿐 아니라 수구 집단을 대상으로 상정하고 있다. 적과 아군이라는 담론의 한계는 바로 여기에 있다. 부정해야 할 대상은 분명하지만, 앞당겨야 할 미래는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론답지 않은 언론”이라는 규정은 어느새 언론 일반에 대한 부정이 되어 버렸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언론인 등 소수에 치우쳤을 뿐 아니라 남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언론개혁을 향한 시민의 열망, 그 열망의 도덕성이 어떻게 법에 반영될지는 철저히 제도권 정치- 정확히 여의도 정치라 쓰겠다 -의 역학관계에서 왜곡되고 있다. 언론개혁의 범위는 너무도 넓다. 방송통신위원회 등 규제기관의 재구성에서 공영방송 지배구조를 거쳐 한 언론사의 저널리즘 책무까지 어떤 것을 먼저 시작해야 할지 선뜻 꼽기 어렵다. 언론개혁에 대한 시민의 열망은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의 금지, 사회적 재난에 대한 대처와 점검, 노동인권에 충실한 보도부터 종편 재승인 거부, 보수 유튜버 처벌 등 미디어의 영역을 넘어 검찰 같은 관료제에 대한 반발까지 포괄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열망이 정부여당의 법 개정안으로 구체화될 때, 시민이 원하는 언론이 무엇인지보다 처벌해야 할 언론이 무엇인지를 먼저 떠올리게 만든다. ‘열망의 도덕성’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의지가 아니라, ‘시민이 원하는 처벌의 정당성’으로 왜곡된다. 

 

언론보도 중재가 없다는 픽션적 공백

 

언론개혁은 분명히 필요하다. 그러나 언론개혁이 조선・동아・중앙・매경의 종편 재승인 거부와 한겨레・경향의 종편 승인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채영길 교수의 글처럼 이 문제를 단지 법리적 정합성이나 개정안에 대한 찬반으로 접근할 수는 없다. ‘열망의 도덕성’보다 더 타당한 개념은 차라리 아감벤(G. Agamben)이 말했던 예외상태, 그것도 정치적으로 만들어진 ‘픽션적 공백’으로서의 공백지대다. 법이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는 순간은 법체계 내 정합성이 아니라 현실에서 벌어진 사태에 그것이 적용될 때다. 법 조항의 모든 단어가 현실에 일대일로 대응할 수는 없다. 문자와 현실 사이 존재하는 공백을 해석과 판례로 메우는 것이 바로 권력이다. 그런데 때로 권력은 작동하고 있는 법이 현실을 포괄하지 못한다며 개정을 요구한다. 당연할 수 밖에 없는 법과 현실 간 공백의 경계- 법 적용의 한계 -는 지워버리고 애초에 그런 법이 존재하지 않은 예외상태로 상정하는 것이다.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배 개정안은 허술하지만 존재하며 그 작동은 미미한 언론에 대한 시민의 항의와 배상 경로를 공백지대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배 반대 의견은 시민의 항의와 정당한 요구를 거부하겠다는 집단 이기주의로 읽히고 만다. 징벌적 손배는 필요하다. 그러나 그 개정안은 지난 몇 년 간 언론중재위원회의 중재결정과 배상액, 민・형사 소송의 부족한 결과만을 놓고 정당성을 얻기는 어렵다. 시민의 피해와 항의가 왜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지, 예컨대 방송사의 시청자위원회나 언론사의 독자권익위원회 같은 곳은 왜 중재 역할을 하지 못하는지, 시민의 피해 사례와 부족했던 배상의 전례를 지적하며 시민사회단체가 적극적으로 개정안을 내놓아야 했다. 물론 이러한 형식적 절차의 부족함은 언론이 먼저 인정하고 대처했어야 할 문제다.

 

시민이 아닌 정부여당이 징벌적 손해배상 개정안을 제출한 것은 국회의원이나 장관이 언론을 통해 입은 피해 때문으로 읽히기 쉽다. 그럼에도 부정의 요구로서 제기된 언론개혁의 ‘열망’을 지지정당을 떠난 모든 국민의 요구라고 말하며 개정안의 찬반으로 진영을 가르는 행위는 지극히 협소한 정치적 행위다. 1980년대 영국의 대처 수상이 노동당 뿐 아니라 보수당까지 싸잡아 비판하며 자신의 발언이 곧 국민의 목소리임을 자처했던 ‘복화술’과 다를 바 없다.

 

채영길 교수의 글은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배 적용 여부를 법리의 문제가 아닌 그 이상의 문제와 담론의 층위로 접근하자는 주장으로 읽힌다. 징벌적 손배의 법적 문제는 이미 충분히 논의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지금 지식인과 언론인, 그리고 시민사회에 필요한 것은 징벌적 손배에 대한 찬성 여론의 퍼센트라는 숫자 너머 그 언론개혁 열망을 분석하고 구체화하는 것이다. 언론개혁은 분명히 정치적 문제다. 그러나 그 정치는 여의도 정치가 아니라 더 넓고 구체적인 정치의 영역이다. 

 

주: 이 글은 연구자, 언론인, 시민들의 논의를 풍부하게 만들기 위한 글이지, 특정 언론사가 따옴표로 인용하거나 간접 인용할 소재로 쓰지 않았음을 알립니다. 아울러 이 글은 연구자의 자격으로 쓴 것이며 제가 속한 조직이나 단체의 공식 입장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Posted by WYW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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