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민영화는 실수였다

2050년 시작된 파업으로 우리나라는 위기에 처했다.

2020년 2월 3일

 

맥스 브룩스(Max Brooks)

 

편집자 주: 이 글은 SF작가, 미래학자, 철학자, 과학자들이 5년, 10년, 50년, 나아가 200년 후 우리가 읽으리라 상상하며 쓴 칼럼을 소개하는 “미래로부터 온 칼럼” 시리즈 중 하나다. 이들이 예측하는 과제는 현재로서는 상상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오늘날 시급한 문제를 조명하여 내일을 준비하게 할 것이다. 아래 오피니언 기사는 픽션이다. (각주는 모두 옮긴이의 주이다)

 

미군이 파업 중이다. 특히 지금과 같은 시기에 미국과 계약을 맺은 군인들이 무턱대고 임무를 저버린다는 것은 믿기 힘든 일이다. 계약 협상이 3개월 째 지연되는 가운데, 전 세계는 분열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분열된 왕실이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을 벌이고 있다. 북한에서는 김씨 왕조를 무너뜨린 쿠데타가 핵무기의 위협을 동반한 내전으로 치닫고 있다. 캐나다에서는 중-러 평화유지군이 퀘백에서의 철수를 공개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최근의 이런 위기로 인해 최소 4개로 확인된 기계화 보병대대와 1개 완전무장 사이클론 여단이 워싱턴 D.C.를 초음속 사정거리 안에 두게 되었다. 이 와중에 미군 기지는 폐쇄되었고 미군 함선은 항구로 복귀하였으며 미군 항공기는 비행을 멈추었다. 심지어 국가 방위의 핵심인 미군의 공동 사이버스페이스망조차 “일시적으로 사용할 수 없음” 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동안 망운영자들은 자택에서 임금인상, 노동시간, 휴가일수, 그리고 무국적 시민 자격으로 전쟁 범죄 뿐 아니라 미국 법률에 의한 모든 범죄행위로부터의 면책 소식이 들려오기만 기다리고 있다.

 

옛날 군대였다면 이런 행위는 반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반란”이라고 하려면 민간 계약자들이 아니라 정부군의 반란이어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 민간 계약자들은 바로 우리가 안보를 맡긴 이들, 즉 용병들이다. 지난 20년 동안 우리나라는 마니플사(Maniple Ltd.)의 최고 경영자부터 외국 전장의 장병들까지 이윤을 목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의 경계 아래 잠들고 있었다. 반역이란 충성 맹세를 어겼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반역자”라고 부를 수 없다. 그들은 미국 헌법을 보호하고 수호하겠다는 맹세를 결코 어긴 것이 아니다. 애초에 그런 맹세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들은 왜 이래야 하는가? 우리는 공무원이 아닌 기업 직원에 대해 말하고 있다. 직원들이 만든 노조가 합법적으로 더 넓은 범위의 복리후생를 요구한다면 우리는 당연하다 생각할 것이다. 만일 이를 탐욕이라고 여긴다면 애초에 문제를 일으킨 것은 우리의 탐욕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민영화 추진은 2032년 국방개혁법에서 시작하지 않았다. 일부의 주장처럼 2001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쇼핑몰로 가라”라는 연설에서 시작된 것도 아니다.[1] 미국인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 국가 수호자의 역할에서 서서히 물러났으며, 역설적이게도 이 후퇴는 정확히 한 세기 전에 이루어졌다는 냉정하고 냉혹한 진실을 보아야 한다.

 

1950년 1차 한국전쟁 동안, 우리는 혁명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 즉 전쟁채권과 결별했다. 그 이전까지 모든 미국시민은 국방채권을 사서 국방에 기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당신이 아직 중국어가 아닌 오픈 소스 검색엔진에 접근할 수 있다면 “2차 세계대전 채권 모금 운동”을 검색해 보라(나는 여전히 퀘존이나 웰렌버그를 신뢰한다). 다양한 유명인사들이 국가 안보에 투자하라고 대중을 규합하는 많은 동영상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전쟁 중에 이런 투자는 더 큰 대의와 개인과의 연관과 함께 종말을 맞았다. 그리고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1970년대 징병제 폐지는 당시로서 좋은 생각으로 여겨졌을지 모른다. 베트남 전쟁은 우리 사회를 갈기갈기 찢어놓았고, 지금까지도 메워지지 않는 문화적 균열을 만들어 냈다. 부유한 중산층(우리가 언제 중산층이었는지 기억해 보라) 아이들은 어떤 위험에도 처하지 않는 반면, 가난한 아이들을 전쟁터로 내모는데 사람들은 신물이 났다. 군당국도 진정한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징병제의 위험을 피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모병제를 찬성했다.

 

전문적인 전사 계급을 만드는 것이 확실한 해결책으로 보였겠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그것은 사회 전체가 끝없는 전쟁에 소모할 고립된 공동체를 만들어 낸 셈이다. 이들은 더 이상 우리의 아들, 아버지, 친구가 아니었다. 이들은 영화나 공항에서 가끔 볼 수 있는 우리와는 먼 수퍼히어로였다. 우리는 그들에게 “당신의 봉사에 감사드린다”고 말했을지 모르지만, 진짜 의미는 “내가 하기 싫은 일에는 나보다 네가 더 낫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낭비하고 잇따른 분쟁에 투입했다. 9/11 테러 이후 거의 20년 동안 미군은 전 세계 최소 일곱 곳의 주요 격전지에 투입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곱 곳이라니! 당시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사람이 있었는가?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관심을 가졌는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슬픔에 잠긴 전쟁 미망인에게 남편이 “무슨 일이 생길지 알고 입대했다”고 말했을 때, 그는 우리 모두가 느낀 감정을 대변한 것은 아니었는가?[2]

 

2020년대 후반, 민영화가 얼마나 매력적으로 보였는지 이제는 쉽게 알 수 있다. 입대자 수는 감소했다. 자살률은 높아졌다. 심지어 끔찍할 정도의 교육과 영양 섭취 기준 탓에 미국 청년 전체의 71%가 군 복무에 부적합하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사정이 이러한데 모병제를 계속 고집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정부가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 정부가 문제다”라고 공표했던 1980년대 초부터 민영화는 시작됐다. 이러한 철학은 1990년대 빌 클린턴 대통령이 “큰 정부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하면서 더욱 힘을 얻었다.

전 국민이 자기애에 빠졌는데 세기를 뒤바꾼 모든 혁신이 지금의 사태와 전혀 관련이 없었다고 볼 수 있는가?  나와 같이 나이든 X세대 일부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 석유 전쟁 시기에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가 대체 에너지를 소리 높여 요구하고 있을 때, 우리가 들은 것이라곤 스티브 잡스가 휴대폰으로 드라마 <더 오피스 The Office>를 본다며 자랑하던 일 뿐이었다. 

 

모두가 세금 절감과 이윤 극대화에 몰두하는 마당에, 교육부, 농업부, 교정국 민영화에 이어 국방이라는 거대 기업이 다음 순서임은 당연해 보인다. 이는 밀러 대통령의 “두 마리 새”라는 주장 이후 더욱 분명해 졌다. 무엇보다 군인이 없어진다는 것은 재향군인이 없어진다는 것을 뜻했고, 이는 곧 보훈부(Department of Veterans Affairs)도 없어진다는 의미였다. 국가 재정의 관점과 정서적 관점 모두에서 보기에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참전용사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는 대신 죄책감을 외주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국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다.

 

불과 25년 전만해도 이런 느낌이었다. 더 이상 “공공 방어”에 대한 의무도, 부양도 필요없다고 말이다. 이제 다른 누군가가 우리의 행복과 안전을 지켜줄 어떤 고통도 감당할 수 있으니 우리가 할 일은 “기도”하고 “자녀를 안아주며” “경제에 참여”하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우리는 국가에 대한 의무를 “나는 우리 군대를 지지합니다”거나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라는 범퍼 스티커 크기만큼 줄여버렸다.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되었는지,

그리고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라.

 

이렇게 말하면 미국인이냐고 되물을지 모르지만 빠른 해결책은 없다. 물론 용병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단기 해법 같은 것은 있다.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 칼은 손에 쥐어주고 몸값은 지불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칼을 내려 놓는 것보다 더 안 좋은 일, 즉 그 칼을 우리에게 겨누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여러 국가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베네수엘라, 서콩고(West Congo),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한 때 아랍에미리트 “연합”으로 불렸던 곳에서 그랬다. 이 모든 나라에서 살인청부업자들은 은행의 지시에 따라 일하느니 은행을 소유하는 것이 더 이익이라 판단했다. 미국에서 이런 일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그리고 민간 계약자들이 손바닥 뒤집듯 고용주를 바꾸는 일을 막으려면 무엇을 해야하는가?

 

고용주가 바뀌는 일은 우리는 이미 목격했다. 2019년, 블랙워터의 설립자 에릭 프린스가 자신의 전투수행력을 중국에 판매했다.[3] 2031년, 중국은 우리가 소비하는 거의 모든 옥수수와 대두 종자권을 가진 몬산토를 계열사로 둔 바이엘을 인수하여 대만발 불안을 부추켰다.[4] 당장이라도 지금의 미국 용병 파업은 중국-러시아가 매니플을 인수하겠다고 나선다면 불난 곳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 될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의 적은 우리 군대와 싸울 필요가 없어진다. 우리 군대를 합법적으로 소유하게 되니까 말이다.

 

이것이 우리의 새로운 정상상태인가? 모든 계약협상이 파업, 쿠데타, 또는 최고입찰자에 대한 배신을 위협하는 과정이 될 것인가? 그럴지 모른다. 아마도. 우리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급여를 지급하길 멈추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시작하지 않는 한 말이다. 그렇다면 다시 징병제로 돌아가자는 말인가? 물론 아니다. 오늘날 전쟁은 방아쇠를 당길 군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고도로 훈련되고 전문화된 전사가 필요하지만, 이들에게는 범퍼 스티커 이상의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하다. 

 

우리는 전쟁채권과 전쟁세를 다시 도입해야 하며, 우리 아이들에게 자신들보다 더 위대한 것의 일부라는 것을 몸이 기억할 수 있도록 국가 봉사와 같은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혁신 분야는 그저 편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을 더 낫게 만드는 독창성에 노력을 기울이도록 해야 한다. 그러한 독창성을 구축하기 위해 이윤을 조금 줄여야 한다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미국이 미국의 기업을 보호한다면, 미국 기업도 미국을 보호해야 한다.

 

끝으로 우리는 개인화된 모바일 화면에서 <더 오피스> 다시보기보다 더 많은 것을 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배워 필요한 갈등과 언제든지 발생할 갈등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전쟁을 막는 최선의 방법은 전쟁이 일어나는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야 전쟁은 덜 일어나고, 동료 시민들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거는 위험에 나설 때란 모든 선택지가 사라졌을 때라는 것을 우리도 알고 그들도 알아야 한다는 확신을 줄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혁명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는 아마 진화에 더 가까울 것이다. 결국 지금 우리가 빠진 무덤을 파는 데 한 세기가 걸렸고, 이 무덤에서 빠져나오는데 또 한 세기가 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권자, 납세자, 이웃, 부모로서 오늘부터 시작한다면, 내일을 구할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맥스 브룩스는 『월드워 Z』와 곧 출간될 『데몰리션』의 저자이다. 또한 웨스트포인트 현대전쟁연구소의 비상임 선임연구원이기도 하다.


[1] 2001년 9/11 테러 직후 조지 부시 대통령은 국민에게 희생보다 쇼핑을 독려했다. “플로리다 디즈니월드로 갑시다. 가족들과 함께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인생을 즐기십시오”라는 발언이 그것이다. 이는 신용에 기반한 과잉 소비를 부추겨 이라크전의 총사령관인 부시 자신에 대한 불만을 막으려 했다는 정치적 해석을 낳았다.

 

[2] 2017년 서아프리카 니제르에 벌어진 IS와의 전투에서 사망한 라 데이비드 존슨 병장의 미망인에게 트럼프은 “그는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입대했겠지만, 그래도 가슴 아픈 일”이라며 전화를 했다. 트럼프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당시 미망인과 동승했던 민주당 의원이 사실임을 주장하며 진실 공방이 벌어졌다.

 

[3] 2015년 5월, 홍콩에 본사를 둔 프런티어서비시스그룹(FSG) 회장 에릭 프린스는 아프리카 내전 지역에 진출한 중국기업을 보호할 용병 투입 계약을 중국과 맺었다. 이 기업의 가장 큰 후원자는 중국 최대 국영업체 시틱그룹이다. 그러나 미군 네이비실 장교 출신이었던 에릭 프린스는 1997년 2009년 매각 때까지 미정부로부터 총 20억 달러에 달하는 계약을 따낸 용벙회사 “블랙워터”의 설립자였다. 블랙워터는 9/11 직후 최대 매출을 기록헀다. 

 

[4] 지금도 바이엘(Bayer) 그룹은 중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국가에 현지법인을 두고 있다. 중국과 긴장관계에 있는 대만에도 바이엘 현지법인이 있다. 저자는 중국이 바이엘사를 인수하면 친미 관계를 유지하던 대만으로부터 미국을 위협할 수 있다는 가정으로 쓴 것이다.

 

※ 원문은 <The New York Times> 2019년 2월 3일자 "An Op-Ed From The Future"에 실린 칼럼입니다.

Posted by WYWH

2003 Edition New Preface

 

Todd Gitlin 2003 preface

Todd Gitlin(1980/2003), The Whole World Is Watching,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3년판 서문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 the Whole World is Watching』는 내가 쓰라린 불일치의 감정, 즉 잘못 알고 있었다는 충격을 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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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링크의 문서는 Todd Gitlin(1980), <The Whole World Is Watching>, 2003 edition, University California Press.의 New Preface를 번역한 글입니다.

번역본의 모든 주는 옮긴이가 쓴 것이며 저자의 주는 [원주]로 표기했습니다.

 

Posted by WYWH

두 건의 기사가 있다. 한 기사의 제목은  <문어의 지능, 강아지만큼 높다>는 생물학 관련 기사이고, 다른 하나는 <후쿠시마 앞바다 문어에서 방사능 발견>이라는 환경 오염 기사다. 두 기사 중 어떤 기사가 더 많은 독자의 클릭을 받을지 예측하는 인공지능을 만든다고 가정하자. 인공지능에게 이런 명령을 내린다. 첫째, 두 기사의 제목에 포함된 단어, 본문 글자수, 사진이나 그래픽 등 이미지, 기자 이름, 기사 작성 시간 등을 숫자와 벡터로 변환하라. 둘째, 숫자와 벡터로 변환된 두 기사 중 어떤 기사를 독자들이 더 오래 보고 많이 볼 지 예측하라. 셋째, 기사를 포털 뉴스에 올려서 예측이 맞았는지 확인하라. 인공지능이 ‘똑똑한 문어’보다 ‘방사능 문어’가 더 많은 조회수와 체류시간을 얻을 것이라 예측했고 그것이 맞았다면, 이후에는 ‘똑똑한 갑오징어’가 아니라 ‘방사능 갑오징어’ 기사를 추천할 것이다.

 

너무 단순한 설명일지 모르지만 방사능 문어가 더 좋은 기사라고 추천하는 알고리즘은 네이버 포털 뉴스 서비스의 자랑인 인공지능 AiRS다. 개발자들은 AiRS가 위와 같이 학습하는 과정을 심층신경망(Deep Neural Network) 학습이라고 불렀다.[주1] 우연인지 몰라도 AiRS의 학습 과정은 오랫동안 생물학에서 당연하게 여겨온 생물체의 신경계 원리와 상당히 유사하다. 

 

인공지능은 인간이 작성한 기사 두 개를 전달받아 이를 숫자와 벡터로 변환한다. 방사능 문어든, 똑똑한 문어든,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인공지능은 단지 자기가 처리할 수 있는 신호로 받아든 문자와 이미지를 변환한다. 생명체의 기본적인 반응도 다르지 않다. 빛이나 소리 등 외부 자극이 감각기관으로 전달되면 이를 신체 내부에서 전달할 신호로 바꾼다. 인공지능은 이렇게 바뀐 신호로 자신에게 주어진 명령, 즉 더 많이 보고 오래 볼 기사를 선택한다. 생명체 또한 감각기관에서 변환되어 전달받은 신호에 대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선택한다. 이 선택의 장소가 바로 신경계, 인간에게는 뇌라는 기관이다. 동해 경포대 바다의 해파리가 여러분의 종아리를 쏜 것도 다 해파리의 신경계가 내린 명령 때문이다. 인공지능도 다르지 않다. 다만 침을 쏘지는 않고 ‘방사능 문어'라는 기사를 독자의 네이버 앱 화면에 노출시켜 불안감을 주는 정도다.

 

더 단순하게 말하면 네이버 뉴스 추천 알고리즘이 마치 생물체, 정확히 말해 높은 지능을 가진 척추동물의 신경계처럼 학습하고 작동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지렁이를 연상시킨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조상님의 말씀은 자극을 받으면 반응한다는 신경계의 원리를 꿰뚫어 보신 통찰이었던 것이다. 밟으면 꿈틀하는 지렁이는 생물학과 심리학에서 오랫동안 전제로 삼아온 신경계의 작동원리였다. 이러한 자극-반응 모델은 단순하지만 강력했는데, 그 이유는 예전 고등학교 선생님들이 잘 아셨다. 대입 모의고사 한 과목에서 틀리는 문제 수 만큼 맞아야 한다는 자극을 우리에게 전달하면 성적이 오르기는 했으니까. 우리는 시속 50Km로 야구배트가 엉덩이 근육을 자극하면 온 몸이 꿈틀대며 반응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구 역사상 가장 똑똑하다는 호모 사피엔스에게 무려 1천억 개에 달하는 뉴런(neuron)으로 구성된 신경계가 생긴 이유를 야구배트를 맞고 꿈틀대기 위해서라고 말하면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 밟으면 꿈틀하는 지렁이와 맞으면 꿈틀대는 호모 사피엔스 사이에 차이가 없다면 4억 년 전 바다에서 육지로 나올 이유가 없었으니 말이다. 

 

다행히 이 책의 저자인 고프리스미스는 아주 공평하게 지렁이와 호모 사피엔스의 신경계가 자극-반응만을 위해 진화하지는 않았다고 말하며 그 예로 해파리를 든다. 조금 전 경포대에서 여러분의 종아리를 쏘았던 해파리를 찾아보자.

 

노무라입깃해파리

 

해파리에게도 자극-반응의 신경계가 있다. 사진 오른쪽 둥그런 풍선 같은 부위에는 수면에서 들어오는 빛을 탐지하여 신체 내부의 리듬과 호르몬을 조절하는 신경계가 있다. 그런데 왼쪽에 동충하초처럼 무성한 촉수에는 또 다른 신경계가 있다. 이 신경계는 수십 개에 달하는 촉수의 움직을 통제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여기서는 자극에 따른 반응이 아니라 먹이를 먹거나 수중을 이동하거나 여러분의 종아리를 만났을 때 침을 쏘도록 촉수들을 통제한다. 이 신경계는 8인승 조정경기에서 뱃머리에 앉아 배의 방향과 속도를 보면서 노를 잡은 선수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키잡이(coax)에 비유할 수 있다. 

 

해파리 촉수의 신경계는 ‘행동 형성’을 위해 진화된 신경계로 자극-반응의 신경계와는 다르다. 우리에게도 이런 신경계가 있다. 시속 50Km의 야구배트가 주는 자극이 선생님의 분노와 팔뚝이라는 ‘외부’에서 온다면, 열 몇 대 맞은 후 점심 시간이 되어 밀려오는 배고픔은 ‘내부’에서 내리는 명령이다. 이 명령은 절대적이어서 얼얼한 엉덩이의 고통을 이겨내며 식당으로 이동하도록 다리와 허리 근육을 움직이게 한다.

 

꿈틀대는 지렁이와 동급일 수 있었던 호모 사피엔스는 이 해파리와의 비교에서 확실한 차이를 보인다. 4억 년 전 최초의 수륙양용 생물체가 육지로 올라왔을 때 가지고 있었던 척추는 어류, 조류, 파충류, 포유류 등 다양한 척추동물에서 진화하며 놀라운 기적을 이루었다. 행동 형성을 위한 신경계가 척추 산맥을 등반하여 자극-반응의 신경계와 만났던 것이다. 이런 만남의 장소가 바로 ‘뇌’가 되었다. 각종 감각기관에서 오는 자극을 신호로 바꾸고 중추신경계로 연결된 신체 곳곳의 신경계에 행동을 명령하는 뇌가 바로 호모 사피엔스를 만들어 냈다. 아래 그림과 같은 신경계를 ‘중앙화된 신경계’라고 한다.

 

여러분과 나의 신경계


신경다발이 신체 가운데 축을 중심으로 나무가지처럼 퍼져 있고 한 쪽 끝에 뇌가 있는 신경계 구조에는 큰 뇌가 필요하다. 뇌는 자극-반응의 기능 뿐 아니라 행동 형성을 위해 명령을 내리는 신경계의 컨트롤 타워와 같다. 우리는 이와 유사한 신경계 구조를 가진 유인원, 코끼리, 돌고래, 까마귀 등 척추동물의 뇌 용량이나 뉴런 개수를 따지며 호모 사피엔스의 우월함에 빠져든다. 하지만 우리와 같은 호모 사피엔스인 고프리스미스는 척추 뿐 아니라 딱히 뼈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없는 문어의 신경계를 보여주며 그런 우월함의 근거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문어의 신경계

 

위 그림처럼 문어는 양쪽에 약 1억 2천만 개의 뉴런을 가진 시엽(optic lobes) 신경계, 척추동물의 뇌와 유사한 기능을 하며 중앙에 위치한 약 5천만 개의 뉴런을 가진 신경계, 한 개에 약 4천만 개(3억 2천만 개)의 뉴런을 가진 팔 신경계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종마다 다르지만 문어는 약 5억 개의 뉴런을 갖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무척추동물의 뉴런은 다수의 ‘신경절’(ganglion)로 구성되는데, 위 그림의 팔 신경계에 교차점이 여기에 해당한다. 두족류의 조상은 신경절만 가졌으나 진화를 거치며 몸의 상단에 집중된 신경절은 뇌에 가까운 형태를 갖추었다. 하지만 문어의 팔 여덟 개의 뉴런을 모두 합치면 뇌보다 많을 뿐 아니라, 각 팔은 독자적인 촉각, 후각, 미각 신경계를 갖고 있다. 팔에 붙은  빨판 하나에만 10만 개의 뉴런이 있을 정도니까. 뇌를 컴퓨터 CPU에 비유하며 중앙화된 신경계를 당연히 여기는 우리 사고로는 이해하기 힘든 구조다. 문어도 CPU와 같은 뇌가 있지만 여덟 개의 팔이나 입은 더 작은 뇌(신경절)들을 갖고 있다. 

 

따라서 문어의 여덟 개 팔은 각각의 국지화된 통제(미세조정)를 내리는 신경계와 몸의 상단에 위치한 신경계의 하향식 통제(중앙통제)를 함께 받을 수 있다. 문어의 팔을 ‘다리’라고 부르며 잘려진 다리가 꿈틀대는 것을 보고 징그럽다고 말하는 호모 사피엔스에게는 이해하기 힘들 수 밖에 없다. 호모 사피엔스는 돌멩이를 깨뜨려 망치를 만들 때부터 이렇게 이해하기 힘든 존재들을 터부시하거나 악령으로 여겨왔다. 2021년에도 이런 습관은 여전하다. 다만 아래 그림처럼 상상력이 조금 더 발휘될 뿐이다.

 

Dr. Octopus in Spider Man: No Way Home

 

문어의 눈으로 보면 호모 사피엔스나 척추동물은 답답하기 그지 없는 생명체다. 일정한 각도 안에서만 움직이는 관절로 구성된 신체는 전혀 자유롭지 않으니까. 게다가 척추동물의 팔과 다리는 알아서 움직이지도 않는다. 눈으로는 상어가 다가오는지 감시하면서 여덜 개의 팔이 알아서 움직이며 먹이를 찾을 수 있는 문어는 우리가 생각하는 뇌와 신체의 구분을 넘어선 생명체다. 중앙화된 신경계를 진화의 최종 단계라 여기는 호모 사피엔스가 자신과 유사한 기능을 갖춘 인공지능을 만들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 인공지능 학습을 신경 학습에 비유하는 것은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에게 지나친 걱정이나 그릇된 오해를 부를 수 있다. 

 

앞서 말한 네이버 뉴스서비스의 인공지능 AiRS를 다시 보자. AiRS가 뇌와 같은 신경계라면 1분에 수백 개의 기사가 쏟아지는 ‘자극’에 반응해야 한다.  AiRS는 독자들이 많이 클릭하고 오래 볼 기사를 예측하고 추천하여 예측 능력을 계속 향상시킨다. 그런데 AiRS가 독자의 모바일 앱 화면에 기사를 노출하는 결과값, 즉 기사 추천을 과연 ‘행동’라고 부를 수 있을까? 5억 4,200만 년 전인 캄프리아기에 나타난 원시 생명체의 뇌조차 자극을 인지하고 근육에 신호를 주어 반응할 뿐 아니라 신체 각 기관이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행동을 조율했다. 하지만 AiRS가 받는 수 천 개의 기사라는 자극은 천차만별의 역량을 가진 기자들이 쓴 행동의 결과다. AiRS가 이 자극을 받아 독자들이 많이, 그리고 오래 볼 기사를 선택하는 것은 반응에 가깝다. 물론 개발자는 AiRS가 학습을 많이 할수록 높은 조회수를 얻을 기사를 더 잘 추천하여 노출한 결과를 행동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그러나 이 행동이 또 다른 학습을 위한 자극이 되려면 독자는 기사를 클릭해야 하고 몇 초라도 읽어야 한다. 굳이 비유를 하면 AiRS라는 인공지능 뇌는 독자라는 근육에 ‘이런 행동을 하면 어떻겠니?’라는 신호를 보낼 뿐, 클릭하는 근육은 인공지능의 것이 아니라 독자라는 사람의 눈, 뇌, 그리고 손이다. 

 

이렇게 보면 인공지능의 신경 학습이란 가장 초보적인 신경계의 기능, 즉 자극-반응 모델에만 국한된다. 게다가 학습을 위해 다시 받게 되는 자극은 인공지능이 수행한 행동이 아니라 몇천 만 명의 독자가 각자 수행한 뉴스 클릭과 읽기라는 행동의 결과다. 그것도 인공지능보다 훨씬 똑똑한 뇌가 내린 행동 명령이기도 하다. 그래서 AiRS와 같은 인공지능을 설명할 때 인간의 뇌와 신경계에 비유하는 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설명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신경계를 모방했다고 하는 인공지능은 때로 문어나 지렁이보다 더 멍청할 수 있다. 무엇보다 자신이 받아들이는 자극이 자신이 보인 반응의 결과인지, 자극을 준 인간의 행동이 자기로부터 얼마나 영향을 받은 것인지 당최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의 행동으로 발생한 외부의 변화(자극)와 그렇지 않은 변화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은 경험과 의식에서 매우 중요하다. 문어가 인공지능보다 더 똑똑하다는 의미는 인공지능보다 월드컵 경기의 승무패를 정확히 맞출 확률이 높다는 뜻이 아니다. 문어는 인공지능과는 전혀 다른 경험을, 그리하여 의식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질문이 나온다. 대체 경험이란, 그리고 의식이란 무엇인가?

 

To be continued

 

[주1] 유봉석, 최재호, 최창렬(2020), “네이버 뉴스 알고리즘은 이렇다”, <관훈저널> 2020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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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더 마인드] 영어판 표지

Peter Godfrey-Smith, 김수빈 옮김(2019), 『아더 마인즈: 문어, 바다, 그리고 의식의 기원』, 서울: 이김

 

문어 한 마리가 표지에 그려진 책이 한 권 있다.  「문어, 바다, 그리고 의식의 기원」이라는 부제만으로는 내용을 짐작하기 어렵다. 문어에 조금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독일대표팀의 승패를 예언했다는 ‘파울’(Paul)을 떠올릴 수 있겠다. 문어의 지능을 이야기하는 책이라면 생물학 대중서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바다’라는 단어는 기후나 생태 위기에 대한 경고를 연상시킨다. 그런데 갑자기 ‘의식’이 나온다. 세 단어의 연관도 아리송한데, 저자 소개를 보면 더 난감하다. 생물철학과 정신철학 전공자라니. 민트초코치킨만큼이나 짐작이 안되는 분야다. 

 

민트초코치킨 같은 분야를 전공한 저자는 피터 고프리스미스(Peter Godfrey-Smith)이며 문어를 표지에 넣은 그의 책은 『아더 마인즈(Other Minds)』이다. 이런 책을 읽기로 작정하는 사람은 두 유형 밖에 없겠다. 저자의 ‘명성’을 잘 아는 민트초코치킨 전공자이거나, 아니면 과감하게 민트초코치킨 맛을 보겠다고 덤비는 무모한 야식 중독자다. 어떤 경우든 일찌감치 수학과 담을 쌓은 내 친구와는 다른 사람일 것이다. 

 

과장이 아니다. 이 책은 절대로 대중서가 아니다. 표지에 그려진 문어에 속으면 안 된다. 저자인 고프리스미스는 호주 동부 해안에서 스쿠버다이빙을 하며 찍은 문어와 대왕갑오징어 사진을 보여주고 절대 어려운 얘기가 아니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럴 때는 그냥 스쿠버다이빙만 가르쳐 달라고 하면 된다.

 

그래서 이 책은 호주 동부 해변에서 스쿠버다이빙을 배우기보다 “민트초코치킨 정도는 아니지만 나도 통닭이나 오골계 정도는 안다”는 사람들이 읽으면 좋은 책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진화생물학, 해양생물학, 신경과학, 고생물학을 오가며 수시로 지각, 감각, 경험과 의식이란 대체 무엇인지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철학으로 답한다. 그래서 이 책의 서평 또한 저자에 대한 복수의 심정으로 내가 그나마 조금 안다는 커뮤니케이션 이론과 대조하며 쓰려 한다. 그러니까 이 서평은 새벽 1시 쯤에 잘못 배달된 민트초코치킨을 오골계 백숙이라 생각하며 억지로 먹어본 경험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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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거래(fair trade). 좋은 말이다. 시장에서 거래란 가치대로 이뤄져야지 더 많거나 적은 가치로 교환되면 안된다. 이 좋은 논리대로라면 노동력 상품 역시 마찬가지다. 임노동자나 자본가나 착취건 기여건 어쨌든 공정하게 거래하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발생한다. 자본가가 임노동자의 노동할 수 있는 능력을 사면 그 능력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전적으로 자본가의 소관이다. 아주 효율적으로 써먹어야 한다. 이러한 사정은 노동자에도 동일하다. 노동력을 팔아 받은 돈으로 내일 또 일할 수 있는 육체적, 정신적 능력을 회복(재생산)해야 한다. 자본가가 ‘절약’과 ‘절제’라는 도덕을 설파할 때 노동자 역시 그의 유일한 재산인 노동력을 아껴 쓰고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한쪽은 어떻게 해서든 주어진 시간 동안 더 많은 가치를 구매한 상품(노동력)으로부터 얻어내려 하며, 다른 쪽은 어떻게 해서든 오랫동안 일하기 위해 주어진 시간 동안 적정량만큼의 노동을 수행하려 한다.
 
자본과 노동의 교환은 단순한 상품의 교환이 아니다. 목적과 의식을 가진 두 존재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충돌하는 이율배반의 장이 바로 교환이다. 만일 노동자가 아니라 로봇이 노동을 수행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보증된 사용기간이 30년인 로봇을 자본가가 과도하게 사용하여 10년 만에 폐기처분해도 로봇은 한 마디 요구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는 다르다. 그는 30년의 시간을 일할 권리, 다시 말해 30년 동안 자신의 노동력을 매일 같이 판매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할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정상적인 길이의 노동일을 요구한다. 더욱이 나는 당신의 동정에 호소함이 없이 그것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상거래에서는 인정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모범적인 시민일지도 모르며, 동물학대 방지협회의 회원일지도 모르며, 거기다가 성인(saint)이라는 명성을 누리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이 나와의 관계에서 대표하고 있는 자본은 가슴 속에 심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거기에서 고동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나 자신의 심장의 고동일 뿐이다. 나는 표준 노동일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판매자와 마찬가지로 나도 나의 상품의 가치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공정거래. 가치에 따른 교환. 적어도 다른 상품들의 교환이 아니라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교환할 때 이 공정거래란 바로 계급투쟁을 의미한다. 자본가와 노동자가 모두 동등하게 상품교환의 법칙에 의해 보증되고 있는 권리를 주장하게 된다. 동등한 권리와 권리가 맞섰을 때는 힘이 문제를 해결한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의 역사에서 노동일의 표준화는 노동일의 한계를 둘러싼 투쟁, 다시 말해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 사이의 투쟁으로 나타난다.

[고쳐 쓰기 Marx, K. 김수행 옮김(2001), 자본론 1권(상), 비봉출판사. 306-3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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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논쟁이지만 1990년 즈음, 이른바 영국 신좌파(New Left)들 중 일부는 포스트 포디즘이라는 조절양식의 도래와 함께 새로운 노동계급의 출현을 다음과 같이 예견했다. 베네통과 같이 새로운 유연적 생산/유통 방식은 기존 제조업 노동자들이 아닌 디자인, 기획, 마케팅이라는 신직종의 종사자들을 사회변화의 선도(leading edge)로 만들 것이다. 이들은 무엇보다 유통과 소비의 영역에서 기존 노동계급들이 발견하지 못한 사회적 열망(aspiration)을 찾아낼 수 있으며, 그들 또한 그러한 열망의 소유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앞장서 만들어 낼 새로운 세상. 신좌파들은 이런 세상을 ‘디자이너 사회주의(designer socialism)’라 불렀다. 이들의 주장은 훗날의 회고에서도 엿보이지만 당시 영국의 골수좌파(hard left)들을 염두에 둔 ‘이론의 정치’이기도 했다.
일례로 이 진영의 대표적 학자였던 맥로비(A. McRobbie)는 골수좌파들(?)의 저널 <Capital & Class>에 실렸던 사이먼 클락(S. Clarke)의 글을 두고 맑스주의자들은 소비자들의 열망을 언급하면서도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고 비판했다. 흥미롭게도 맥로비의 이러한 비판에는 클락이 속했던 이론 진영이 견지하고 있던 열망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었다. 주로 자율주의자들과 열린 맑스주의자들(open marxists)로 이뤄진 이 그룹에서 열망이란 새로운 직종이나 소비 방식에 대한 욕구가 아니라 자신들의 노동이 화폐로, 이윤으로 전환되는 과정에 대한 거부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최저임금 인상이라는 요구는 더 높은 소비수준에 대한 바램을 넘어, 더 나은 삶을 위한 노동자들의 욕구에서 비롯된, 임금이라는 굴레(화폐제약)를 벗어나려는 거부(rejection)이자 부정(negation)인 것이다. 굳이 두 진영의 열망을 단순화시켜 구분하면 신좌파들의 열망이란 ‘새로운’ 임노동 관계를 향하고 있고, 자율주의(혹은 열린 맑스주의)자들의 열망은 임노동관계 ‘그 너머’를 향하고 있는 셈이다.
열망과 다른 개념이긴 하나 ‘열정노동’을 다루고 있는 이 책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는 어떻게 보면 위 두 이론 진영의 중간에 위치해 있다. 이 열정을 영어로 번역하면 passion이 되겠으나 책을 읽다보면 “내가 하고 싶은/좋아 하는 일을 끝내 해내려는 개인의 의지” 정도로 생각된다. 저자들이 인터뷰한 청년들의 다양한 직종들- 프로 게이머에서 노조의 상근자까지 -의 목록만을 나열해도 20년 전 신좌파들이 말하는 신직종이자 사회 변화의 선도가 쉽게 떠오른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2011년 지금도 여전히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창의산업’이나 ‘창의지성’이니 하는 포스트 담론 부스러기들에 대한 훌륭한 비판서라 해도 무리가 없다. 신좌파들이 꿈꾸었던, 아니 1990년대 한국의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이 고리타분한 좌파 정치운동에 대안으로 내세웠던 문화운동과 신세대 담론에 대한 그 당사자들의 저널리즘(native journalism)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이 책을 덮고 나면 “어느덧 착취의 언어가 된”, 그리고 “제도화”된 이 열정을 어떻게 볼 것인지의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고, 창업을 꿈꾸며, 진실을 알리는 기자가 되겠다는 이들에게 ‘너의 바로 그런 열정은 네 꿈이 아니라 자본의 꿈을 이루게 할 뿐’이라는 냉정한 충고만을 던지고 돌아설 수는 없지 않겠나. 저자들 역시 이 지점에서 열정 노동을 만드는 구조와 열정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열정의 반복이다. 열정의 착취로 인해 생긴 이 순환을 끊어내기 위해서라도, 어떤 형태로든 새로운 열정을 불러와야 한다. 운동이 파편화된 시대에 활동가들은 새롭게 노동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지 못했고, 새로운 친구들은 자신들의 삶에 도움을 주는 운동의 역할을 찾지 못했다. 이들이 서로에게 도움을 주려면 여전히 열정이 필요하며, 사라져 가는 열정이 되살아나야 한다. 우리는 열정 노동을 만드는 구조를 비판한다. 하지만 ‘열정적이어야 한다’는 시대의 요구는 따르려 한다. 여기에 우리의 모순이, 혹은 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 존재할 것이다.”

달리 말해 “열정 노동을 만드는 구조”란 비정규직으로 대표되는 임노동 관계이며 “시대의 요구”로서의 열정은 임노동에 종속되지 않은, 혹은 종속되기 전의 ‘하고 싶음’ 정도가 될 듯하다. 지극히 타당한 지적이지만 후자의 열정에는 조금 더 정교화가 필요하다. <내 이름은 김삼순>과 <커피 프린스 1호점>을 보고 파티시에나 바리스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는 이들이 열정 노동의 참담함을 느끼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바로 그 순간에 느끼는 갈등을 다이너스타인(Ana C. Dinerstein)은 “내가 지금 누구이며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what I am and need)”와 “내가 지금 누구이며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가 과연 자본주의적 발전에 유용한 것인가(where what I am and need is useful for capitalist development)” 사이의 긴장으로 묘사한다. 이 긴장 속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로서의 열정은 어떻게 해서든 취업을 해야 한다는, 즉 노동력 상품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는 절박한 욕구로 변하고 만다.
결국 열정 노동을 만드는 구조와 다른 “새로운 열정”, “시대의 요구로서의 열정”은 열정 그 자체가 아니라 임노동 관계에 대한 거부, 즉 열정 노동을 만드는 구조에 대한 거부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해서 이 책에서 잠시 대안으로 언급하고 있는- 그러나 그 실현 가능성에는 회의적인 -기본 소득제 등은 열정을 이루기 위한 기본적인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물론 고용의 안정성과 최저 임금의 인상 등 열정 노동 각각의 분야가 아닌 각 부문을 아우르는 보편적인 사회적 임금 구조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이 조차도 한국의 상황에선 높은 기대수준에 해당하겠지만, 만일 그러한 고용안정과 임금구조가 정착된다면 열정의 임노동화를 축복하며 샴페인을 터트릴 것인가. 적어도 현재의 상황에서 열정 노동(자)들은 그 다양한 꿈과 기대에도 불구하고 잔혹한 임노동 관계라는 공통의 지점으로 수렴하고 있다. 열정을 부추기는 미디어의 판타지들은 역설적으로 현실에선 노동착취가 제조업의 노동자들 뿐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에서도 예외가 아님을 깨닫게 해주는 출발점이 되어 주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양상이 과거 오래된 운동권들의 말처럼 “사태가 나빠질수록, 상황은 좋아진다(The worse things are, the better things are)”는 뜻은 아니다. 열정과 노동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함께 연대할 수 있는 공통의 지점들이 만들어 질 수 있으며, 바로 거기에서 무엇을 거부해야 할지, 그리고 그 열정의 순수함을 어떻게 지속시킬 수 있을지의 고민들이 생겨날 것이다.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의 결론은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다. 나 역시 이 서평 아닌 서평에서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문제는 희망을 꿈꾸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E. Blo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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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메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중)



 

기형도의 시 속 화자가 평생을 미친 듯이 찾아 헤맨 사랑의 대상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후에 이르러 그 대상이 자신이 될 수 있음을 알았다면, 그 헤메임 속 어딘가에는 사랑의 대상이 이미 숨어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정서(Affekte)란 느낌이나 표상(Vorstellung)과 달리 그 분명한 외부의 대상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현실에 그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러한 정서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메”일 수 있었겠는가? 정서란 막연한 어떤 대상을 자신 안에 이미 갖고 있다는 의미에서 “감정의 확실한 상태”라고 부를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사랑처럼 희망도 이렇게 정서라고 말할 수 있다면, 희망의 대상이 현실에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그 희망의 정서조차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이런 까닭에 정서란 “반쯤은 직접적으로 전해지는 자신의 감정으로서 우리의 의식에 가까이 와 닿는 것”이다.(Bloch, 2004: 142)

사랑을 찾는 헤메임을 불분명한 표상을 대상으로 하면서 끊임없이 그 대상을 찾기 위해 나아가는 갈망이라고 한다면, 희망 역시 그 표상이 불분명하다 할지라도 그것을 통해 자신이 바라는 내용을 지닌 갈망으로 이행하게 된다. 이를 “희망의 목표 없는 진행”이라고 부를 수 있다.(ibid: 143) 정서를 이렇게 아직 의식되지 못한 대상을 향한 나아감으로 보는 관점은 매우 중요하다. 후설의 현상학에서 정서란 ‘성분(Gehalt)’을 내용을 갖는다. 이 때 성분이란 현실에서 인식이 가능하나 아직은 불투명한 대상을 의미한다. 그러나 블로흐의 정서는 이 성분을 뛰어넘는다. 즉 정서에는 이 불투명한 대상을 구체적인 상으로 추적하려는 경향, “아직 체험하지 못한 바를 체험하려는 전의식적 인간의 의향”이 포함된다. 따라서 그는 성분과 같이 정서의 내용이 의식에 아직 인지되지 못한 경우는 “추상적 사고(Gedahke)”로, 구체적으로 인지한 경우를 “구체적 생각 혹은 표상(Vorstellung)”으로 구분한다. 지향행위로서 정서를 파악하는 관점은 앞서 말한 “확실한 상태”로서의 정서란 무엇인지를 보다 정확히 알려준다. 즉 여기서 상태란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건강한 신체를 보존하려는 적극적인 지향으로서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블로흐가 말하는 상태란 “건강(Befinden)”과 같이 자기보존의 욕망이자 목표와 구체적 대상을 찾아가려는 지향행위로서의 정서이다. 이에 반해 사고와 표상은 인간의 의지와 따로 존재하기에 그 지향성을 의지를 통해 갖게 되지만, 정서는 그렇지 않다. 정서는 이미 그 안에 지향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ibid: 144)

무엇인가를 향해 나아가려는 경향에는 추구, 충동, 의향, 그리고 무엇보다 관심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무엇인가를 느끼려는 이러한 경향이 바로 정서를 정적이 아닌 동적인 지향을 자신의 특징으로 갖게 만들어 준다. 정서의 이러한 지향성은 배고픔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배고픔은 무엇인가를 먹어야 한다는 지향을 이미 내부에 갖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배고픔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정서의 개념화란 많은 주의를 요한다. 블로흐는 이렇게 말한다. “정서는 가까이 존재하는 것을 포괄하며, 자신 속에 커다란 방향성을 내포한다. 바로 이를 통해서 정서는 어떤 생명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라 정서는 존재의 방식이기도 하다. 감정은 오직 ‘감정의 움직임’을 표방하는 총체적 개념으로서, 실존적인 개념이 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어떤 ‘직결성(Betroffenheit; Shock)’일 뿐, 이론적이고 객관적인 ‘정신’은 아니다.”(ibid: 145) 블로흐는 자신의 이러한 입장을 키에르케고르와 같은 실존주의나 데카르트, 스피노자의 정서 개념과 명확히 선을 그으며 전개하고 있다. 요컨대 근대 합리주의 철학에서 인간감정은 합리성과 이성의 왕국에 들어오면 안될 속인들의 “수다스러움의 세계”였다는 것이다.

[블로흐 독서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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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답을 요구하는 충동 이론에 관해 말하자면, 우리는 정신분석학자들을 요리사에 비유할 수 있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음식물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오로지 충동이라는 매운 양념에 대해서만 골몰하고 있다. 그들은 신비로운 개념을 동원하여, 인간의 여러 충동들을 살아있는 인간의 육체에서 일탈시키고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형성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리비도, 혹은 권력에 대한 의지, 원초적 디오니소스와 같은 우상들이며, 무엇보다 이러한 우상을 절대화시키는 입장이다. 기실 인간의 몸이란 그 자체를 보존할 뿐, 다른 어떤 것을 지니려고 하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도 절대화된 우상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인간의 몸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하기에 프로이트, 아들러 그리고 융은 그것을 ‘경제적, 사회적 전제조건의 변수’로서 한 번도 토론하지 않았던 것이다.”(E. Bloch, 2004: 131)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는 무엇인가? 욕망(desire)이나 욕구(need)니 하는 엄격한 학문적 개념 구분을 하지 말고 질문의 방향을 바꾸어보자. 우리는 어떤 이들을 볼 때 가장 동정심을 느끼는가? 아마도 그 동정심이 깊을수록 내 자신에게는 그러한 결핍이 없다는 안도감 또한 깊을 것이며 바로 그것이 우리의 기본적인 욕구가 무엇이었는지를 돌아보게 해 줄 것이다. 여기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사랑을 잃고 몇 날을 슬픔과 자학 속에서 보내고 있다. 또 한사람은 바로 굶주린 사람이다. 한 발짝을 내딛을 힘도, 구걸할 소리를 지를 힘도 없이 거리의 한 모퉁이에서 쓰러져 있는 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동정심에 깊이가 있다면 누구를 더 동정하겠는가? 우리는 실연의 아픔으로 죽은 이들에겐 “왜 그랬나, 좀 이겨내지...”라고 할지언정, 굶주려 죽은 사람에겐 도저히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성욕’이라 했던 정신분석학이 방기한 욕구, 혹은 보려하지 않은 욕구가 바로 ‘식욕’, 달리 말해 ‘배고픔’이다. 흥미롭게도 이 ‘배고픔’과 ‘성욕’이라는 두 욕구를 어떻게 충족시키거나 통제할 것인지에 대한 답은 오늘날까지도 화해하기 힘든 학문의 두 갈래로 이어져왔다. 무의식에 자리한 성욕과 이를 억압하는 자아와 초자아, 그리고 이 억압의 우회로인 욕구의 ‘승화’가 풍성한 문화의 자양분이 된다는 정신분석학의 주장은 무의식의 구조, 상징과 의미에 대한 분석, 그리고 넓게 보자면 소위 ‘상부구조’라 불리우는 분야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의 흐름으로 이어져왔다. 반대로 배고픔의 기원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를 어떻게 충족시킬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물질적 재화의 생산과 분배에 대한 분석으로, 곧 ‘토대’라 일컫는 영역을 다루는 정치경제학의 분야에서 이뤄져왔다.

이런 구분을 너무 지나친 단순화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프로이트 시대 오스트리아 빈의 정신분석상담소와 당대의 정신분석학자들에게 배고픔은 그들의 문제가 아니었다. 빈에서 자살하는 이들의 90퍼센트가 생활고 때문이었음에도, 목놓아 배고픔을 호소하는 그 어떤 이도 상담소의 환자가 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정신분석상담소의 벽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 “경제적, 사회적 문제는 여기서 취급하지 않습니다.” 결국 당시 정신분석상담소를 찾던 이들은 중산층 이상의 출신들이었고, 이들을 상담하면서 정신분석학자들이 접한 욕구는 은밀한 성충동과 성도착에 대한 괴로움, 그것도 “위선적인 말투와 생각”으로 자아에게 검열당하고 있던 리비도였을 뿐이다. 그에 비해 프롤레타리아의 배고픔은 명료하고도 거짓이 없었다. 어차피 그들의 욕구는 안락의자와 소파가 놓여 진 거실에서 상담해야 할 “유복한 자들의 병”이 아니라, 거리에서 분노와 좌절로 토해내야 할 “고상하지 못한 괴로움”이었던 것이다.(ibid: 135)

“유복한 자들의 병”이라는 말처럼 프롤레타리아의 병과 부르주아의 병은 확연히 구분된다. 오늘날로 비유한다면 집세 걱정 없이, 다음 날 급여가 제때 들어올지에 대한 걱정 없이 살아가는 이들 또한 병을 앓고 힘겨움을 느낀다. 그러나 이들의 힘겨움은 “유복한 자들의 병”이기에 그 해법은 사적인 곳에서 은밀하게, 때로는 뇌물과 같은 어둠의 경로에서만 찾을 수 있다. 달리 생각하면,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의 병은 증세의 문제로 진단된다기보다 그들의 호소가 들려오는 장소와 그 해법의 차이로 밝혀질지도 모른다.

배고픔의 장소와 해법에 대한 이야기는 이것을 대상으로 삼았던 정치경제학의 흐름을 또한 돌아보게 한다. 정신분석학이 간과한 ‘배고픔’이라는 고통과 그 충족에의 욕구를 정치경제학은 어떻게 다루었던가? 이왕 저지른 과도한 단순화를 더 밀고 가보자. ‘토대’ 혹은 ‘경제’라는 배고픔의 장소는 그 욕구의 파악이 양과 척도로 측정가능한, 그리하여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의 너무도 다른 ‘배고픔’은 효용(utility)의 이름으로 동질화되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프롤레타리아의 노골적인 고통과 분노는 또 어떠한가? 이들의 솔직함과 난폭함이 거리에서 폭발할 때, 이는 자본주의 경제의 필연적인 ‘산물’이며 그렇기에 조금 더 나은 인간적인 자본주의를 향한 과도기이자, ‘계획된 사회주의’로의 경로로만 취급되어 왔다. 정신분석학이 ‘성욕’을 전면에 내세우며 “인간의 여러 충동들을 살아있는 인간의 육체에서 일탈”시켰듯이, 정치경제학은 배고픔과 그 갈망의 문제를 인간이 어쩔 수 없는 ‘경기순환’과 ‘축적체제’라는 이름으로 다시 추방시켜 버리지는 않았는가? 결국 배고픔을 다루었던 ‘토대’와 ‘경제’에 대한 학문의 흐름 또한 그 해법이 사적이고 은밀하지 않은 대신, 인간 주체의 갈망과 희망이 결여된 제도와 구조라는 물신(fetish) 속에 가두어 버리고 말았다.

[주]
이 글은 요즘 읽고 있는 E. Bloch(1959), Das Prinzip Hoffnung, Frankfurt am Main: Suhrkamp; 박설호 옮김(2004), 희망의 원리, 서울: 열린책들 의 독서노트입니다. 글 중간의 페이지와 인용은 모두 별도의 언급이 없는 한 이 책에서 온 것입니다. “독서노트”라는 변명이 허락된다면 글의 주장과 내용은 블로흐의 글에 대한 저의 오독과 과민한 반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해서 행여 이 글을 읽으실 때 비판의 대상이나 내용이 모두 블로흐의 것이라고 여기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학습의 습관일지 모르나 그저 텍스트를 눈으로 보는 것과 그것을 읽어내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고 생각됩니다. 텍스트를 읽어낸다는 것은 제가 그것을 또 다른 텍스트로 생산해 내고, 그럼으로써 제 사고의 한계를 스스로 돌아보는 기회를 부단히 만들어 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이후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를 <블로흐 읽기>에 대한 짧은 변명이었습니다.

Posted by WYW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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