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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을 쓰다 보면 도지는 병 중 하나가 다른 주제에 눈을 돌리는 짓이다. 그다지 많이 해 놓은 것도 없으면서 지겹다고 느끼게 되면, 새로운 영역이 훨씬 재밌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재미나 의미가 아니라면, “바로 지금 얘기해야만 한다!”라는 역사적 사명을 부여해서라도 발병을 재촉한다.

몇 학기 반복되는 강의 내용만큼이나 학생들에게 다음 학기에는 포함시키고야 말리라던 주제가 하나 있었다. 말로만 두루뭉실 넘어가거나 몇 문단의 메모로 때우던 글을 이틀 끄적이고 몇 장 완성하고 나니 병이 도졌다. 더군다나 근년 들어 사라지나 싶었던 ‘길거리 정치’를 보고 있노라니, 지난 총선의 46%라는 투표율로 “정치적 무관심”을 통탄하시던 그 똑똑하신 분들께 한 마디 하고 싶은 오만마저 생겼다.

그런데 이게 게으름인지, 아니면 다시 마음 다잡기인지 알 수 없으나 열 몇 페이지로 좀 확장해서 써 보려던 결심을 포기하고 말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비판해야 할 대상보다 내 작업이 더 급한 탓이다. 아쉬운 마음에 몇 자 끄적인 글을 올린다. 행여 내년 초에라도 좀 낫게 쓸 수 있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그런데 이런 식의 포기가 게으름 때문인지, 아니면 올해 말 끝내야 할 작업에 대한 결단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하나 확실한 건, 또 하나를 미뤘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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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rew Feenvberg(1995), Alternative Modernity: The Technical Turn in Philosophy and Social Theory,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이론가들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분석’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추상적인 논의는 검증할 수 없거나 이해할 수 없는 용어들로 가득 차 있다는 이유에서 ‘현학적’이라는 조롱을 받곤 한다. 이런 비아냥이 거슬리는 이론가가 “내가 못할 줄 알아!”라는 오기로 막상 현상분석에 들어가면 또 다른 난관에 처한다. 이론의 핵심 개념들은 하나의 기호가 되고, 몇몇 기호들 사이의 차이에 걸맞게 분석대상이 되는 현실이 나누어진다.(‘기호학적 분석’은 흔히 이런 기호들의 체계를 현실에 투영하는 작업이다) 보다 쉽게 가려면, 하나의 모델이나 이행의 경로(path)를 약간 변형하면서 현실을 여기에 우겨 넣으면 된다. 이런 분석이야 말로 언젠가 마르크스가 말한 “현실이 텍스트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가 현실로 들어가는”(Grundrisse) 지독한 관념론에 다름 아니다.

  특히 대중문화를 이런 대상으로 삼을 때, 이런 곤혹스러움은 극에 달한다. 경제학이나 다른 ‘순수’(?) 학문들은 대중들이 잘 모르는 수치와 개념들을 대상으로 하는 탓에 비교적 비판의 사거리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매니아와 평론가들이 난무하는 이 대중문화의 분석은 정반대의 상황에 처한다. 디-워(D-War) 해프닝이 보여주듯, 대중문화의 분석은 이론과 현실의 간극만을 확인시켜주기 십상이다.

  대중문화의 분석이 어려운 이유는 단지 불특정 다수의 ‘준’ 평론가들에게 노출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어려움은 무엇보다 대중문화를 이론과 모델로 ‘분석’하려는, 그래서 무지한 독자들에게 “너희들은 몰랐지?”라는 모멸감을 안기려는 이론가들의 자기확인에서 비롯된다. 바로 여기에서 이론과 현실의 괴리가, 지식인과 무지한 대중들의 위계가, 나아가 혁명의 시기에 경험했던 전위와 대중의 분리가 생겨난다.

  핀버그(Andrew Feenberg 1995)의 <대안적 모더니티(Alternative Modernity)>의 한 장(chapter)은 이런 점에서 대중문화를 어떻게 ‘분석(?)’해야 할지의 고민을 조금이나마 덜어준다. 그는 대중의 의식을 결코 이론가들이 분석해야 하고 비판해야 할 대상(object)으로 격하시키지 않는다. 50년대와 60년대의 SF, 디스토피아 혹은 스파이 영화, 광고 등의 대중문화는 이론가들이 세운 비판의 날 못지않은 대중들의 날카로운 비판의식이 투영되는 장으로 이해된다. 이 글의 한 제목이 보여주듯 비평(critics)은 대중문화를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도리어 대중문화 그 자체가 하나의 비평이 된다(Popular Culture as Critical Consciousness). 이 글에서 그가 택한 영화나 소설, 광고는 작가의 독특한 의도나 스타일의 뛰어남으로 선택되지는 않은 듯 보인다. 007시리즈가 그렇듯, 핀버그가 주목하는 대중문화의 테마들은 당시 충분히 인기가 있었고 많은 이들이 주목했던 ‘대중적’인 작품들이지 ‘예술적’ 작품들은 아니다.(사실 이런 구분 자체가 지극히 ‘현학적’이다.)

  어쩌면 분석이란, 특히 대중문화에 있어 분석이란 대상과 대중들을 평가하는 작업이 되어서는 안된다. 물론 핀버그의 책 전체가 이러한 관점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 번역한 한 장(Chaper 3: Dystopia and Apocalypse)은 적어도 이론과 분석이란 “~에 대한” 작업이 아니라 “~ 안에서 그리고 ~을 통하여” 수행하는 작업임을 보여준다. 이 글이 오래 전에 쓰여졌음에도 다시 읽을 가치가 있다면, 이전까지 도식화되었던 대중문화의 이론과 모델들을 벗어나게 해준다는 미덕, 바로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ps: 위에 올린 번역파일은 거의 초벌번역 수준입니다. 함부로 가져가지 마시고 저를 전혀 모르는 분이더라도 꼭 댓글에 흔적을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강의 자료로 쓸 요량으로 한 작업이니 상업적 목적은 전혀 없으나 이후 다시 수정할 생각이니까요. 분량이 얼마 안되는 번역이지만 작업을 하는 동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번역은 외국어에 도통하여 얼마나 잘 옮기는가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지요. 번역은 분명히 “글쓰기”입니다. 글이 안된다면, 그 난감함은 이를 데 없습니다. 갑자기 번역을 업으로 하시는 분들이 존경스러워지는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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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odore Von Holst
Frontispiece to Mary Shelley, Frankenstein published by Colburn and Bentley, London 1831
 

1.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이 아니다.

  메리 셜리(M. Shelly)는 자신이 쓴 작품과 그 주인공의 유명세로 그녀의 존재가 잊혀져 온 불행한 작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 뿐 아니라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존재 역시 같은 운명에 처했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지나치기 쉬운 사실 하나. 프랑켄슈타인은 괴물(monster)을 만든 박사(Vitor Frankenstein)의 이름이지 괴물의 이름이 아니다. 셜리의 원작에서 괴물은 피조물(creature), 악마(devil) 등으로 불릴 뿐이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언제부터인가 그 괴물은 자신을 만들어 낸 창조자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당신이 사람들에게 당신의 원수의 이름으로 불린다고 생각해 보라. 프랑켄슈타인의 저주는 원작 텍스트에 쓰여진 것보다 대중문화의 역사가 만들어낸 이런 전도(inverstion) 속에서 더 끔찍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텍스트 외부에서 벌어진 이런 전도는 이미 그 안에서 준비되고 있었다. 박사는 자신의 괴물이 생명을 얻던 바로 그 순간, 공포에 휩싸여 실험실을 박차고 나온다. 자신의 놀라운 지적 산물을 공포의 대상으로 마주하는 모습은 주체의 활동과 그 결과가 분리되고, 서로가 적대적 관계에 놓이는 '소외'에 다름 아니다. 인간의 노동이 그 산물인 상품과 대립하고 상품에 지배당하는 소외는 전도된 표상(Vorstellung)으로 나타난다. 한 명의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이 '삼성'이라는 기업을 만든 것이 아니라 그 기업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노동을 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그는 한 명의 노동자가 아니라 '삼성의 노동자'이다. 나아가 그의 노동은 노동을 행한 그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라 월급과 연봉이라는 표상을 요구한다. 최근 유행하는 "88만원 세대"라는 표상은 바로 이런 전도를 가리킨다. 작품이 발표된 1818년 이후, 영국을 비롯한 선진 자본주의 세계에서 이러한 삶은 갈수록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창조자의 이름이 그 창조물로 전도되고, 나아가 그 문학 텍스트의 저자가 잊혀져 온 과정은 바로 이런 소외와 전도의 역사 속에서이다.

  물론 자신이 만든 대상을 끔찍한 공포의 존재로 마주한다는 이야기는 이 작품 이전에도 흔한 테마였을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역설적인 운명을 겪은 텍스트는 흔치 않다. 더욱이 그러한 전도가 작가가 아닌 대중과 대중문화에 의해, 즉 작품의 소비와 전유를 통해 이뤄져 왔다는 사실은 텍스트 그 이상의 문제를 제기한다.

[경고: 이 글을 쓴 저는 문학이 전공도 아니고 평론가는 더욱 아닙니다. 생각나는 대로 내쳐 쓴 글이니 함부로 퍼가시면 곤란합니다. 하다못해 댓글이라고 적으시면 모르겠습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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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영국의 한 카툰>

 

2. 19세기의 프랑켄슈타인: 노동자 대중이라는 괴물


  작품에 나타난 박사와 괴물의 관계를 둘러싸고 다양한 논의가 있었지만 그 중 모레티(Franco Moretti)의 해석은 매우 흥미롭다. 그는 이 관계를 19세기 영국의 계급관계, 즉 '자본과 임노동의 관계'로 해석한다. 19세기 영국에서 노동자들(노동자 대중)은 자본가들에게 '괴물(monster)'의 이미지로 다가왔다. 동시대의 엥겔스(F. Engels)가 <영국노동계급의 처지>에서 묘사했듯이 그들은 돼지와 함께 잠을 자고 한 벌의 옷으로 겨울을 나는 처참한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파업을 방해하는 자본가와 어용 노동자들에게 염산 테러까지도 불사하는 두려운 존재이기도 했다. 셜리의 작품이 발표되고 오래지 않아 영국 보수파들은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은 모든 민주적, 진보적 요구의 주체들을 "역겨운 폭도들(revolting mobs)"로 몰아세운다. 이 때 그들에게 사용된 은유(metaphor)가 바로 "영혼 없는 육체, 프랑켄슈타인의 괴물(Frakenstein monster)"이었다.  

  모레티가 지적한 이런 은유가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된 원작의 또 다른 부르주아적 전유라면, 여기서의 대립은 단지 외면적인 대립, 계급 갈등의 표면적인 투영에 그치고 만다. 도리어 작품 속 박사와 괴물의 적대는 더욱 복잡하다. 괴물을 만든 직후 사라진 박사의 가장 큰 죄악은 사실 자신이 만든 창조물의 존재를 망각하려 했다는 것이다. 2미터 40센티에 달하는 거구에 끔찍한 외모를 가진 그 괴물은 그 탄생의 순간에 그저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였을 뿐이다. 자신의 눈에 맺히는 상이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그것을 가리키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복잡한 소리들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모르는 존재였다. 그런 '괴물'이 이후의 끔찍한 고독과 배신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저주하게 되었을 때 박사에 대한 복수가 시작된다. 괴물은 박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의 창조자인 바로 당신이 나를 끔찍히도 미워하고 멸시했소. 당신의 피조물인 나를 말이오. 당신과 나를 얽어맨 이 속박은 둘 중 하나가 사라져야만 풀릴 것이오."(102)
  이런 분노는 결코 화해할 수 없는 두 계급의 적대로 읽어내기에 충분한 근거가 된다. 그러나 작품의 결말에서 괴물은 박사의 죽음을 앞에 두고 결국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음을 고백한다. 결국 박사와 괴물의 적대는 하나의 소멸이 다른 하나의 소멸로 이어지는 내적으로 연관된 적대이다. 자본은 임노동을 두려워할지 모르지만, 임노동의 소멸은 자본의 소멸을 의미한다. 물론 이런 식의 해석이 작가인 셜리의 의도와 부합할리는 없다. 그러나 자신들이 불러내어 마주한 대상에 대해 느끼는 공포는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말한 부르주아들의 공포, 곧 램프 속 요정을 불러내고 느끼는 두려움. 바로 그것이다.

  과학의 정점에서 불러낸 괴물과 인류 역사상 가장 경이로운 생산력인 임노동은 박사와 부르주아 모두에게 두려움의 존재들이다. 19세기 에드가 알런 포(E. A. Poe)가 소설에서 그려낸 군중에 대한 두려움(군중 속의 남자)은 바로 이런 부르주아적 공포의 또 다른 표현이다. 비록 그녀의 부모가 급진적 사상가들이었다고 해도 프랑켄슈타인의 작가 셜리 역시 이런 부르주아적 공포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이런 의미에서 모레티가 프랑켄슈타인을 가리켜 "부르주아 문명화가 낳은 공포(the fear of bourgeois civilization)"라고 말한 것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그러나 그가 간과한 것은 공포를 느끼는 주체가 박사와 작가임에도 정작 그 공포의 현실적 실체인 노동자들 또한 이런 공포에 동참해 왔다는 사실이다. 대중문화가 부르주아적인 것은 그 내용이 아니라 바로 이런 전도의 과정에 있다. 부르주아의 공포에 그 공포의 현실적 대상을 동참케 하는 것.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이 되고 20세기에 와선 아예 희화화되어 버린 이 역사적 과정이 20세기 대중문화의 전형이라고 말하면 지나친 비약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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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현대의 프랑켄슈타인: 대중문화


  언젠가 마르크스는 부르주아들에게 공포의 대상인 프롤레타리아를 가리켜 "아무 것도 아닌 존재, 그러나 모든 것일 수밖에 없는 존재(I'm nothing, but I must be everything)"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그가 독일 혁명의 유일한 주체로 당시 형성 중이었던 프롤레타리아를 지목한 것은 오직 그들만이 자신의 정체성(identity)을 부정할 수 있는 계급이었기 때문이다. 근대 이후 자본주의에서 노동운동의 역사는 노동자 계급을 형성하는 역사이자, 동시에 노동자라는 계급을 부정하려는 모순된 역사에 다름 아니다.

  흥미롭게도 원작에서 '괴물'은 바로 이런 정체성의 부정을 시도한다. 괴물은 탄생 직후 자신의 흉측한 외모가 사람들에게 어떤 이미지로 여겨지는지 뼈져리게 경험한다. 괴물이 외딴 시골집의 창고에서 혼자 언어를 배우고 글을 익혀 <실락원>, <플루타크 영웅전> 그리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는 광경은 차라리 애처로움마저 느끼게 한다. 그러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거부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꿈꾸던 괴물이 유일한 친구라 여겼던 이들에게 내쫓긴 순간. 그는 자신의 창조자가 속한 족속 전체를 절멸시키리라 다짐하는 '괴물'의 정체성에 스스로를 가두어 버린다.

  셜리의 프랑켄슈타인 역시 20세기 대중문화 속 수많은 변종과 아종에서 이렇게 갇혀진 정체성만으로 재현되어 왔다. 당연히 이 재현의 핵심은 바로 괴물의 '외모'를 얼마나 끔찍하게 그려내는가에 있었다. 노동자들에게 바로 자신들이 공포스런 존재임을 잊게 하는데 이러한 시각적 재현이야 말로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1930년대 시작된 헐리우드의 프랑켄슈타인 시리즈의 흥행은 바로 이런 전도의 시작이 아닐런지. 이 때 괴물은 비로소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창조자의 이름을 얻고, 자신의 역사적 분신인 노동자 대중들에게 하나의 유희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더 이상 노동자들은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아니며, 자신들이 19세기에 부르주아들을 떨게 만들었던 바로 그 공포였음을 기억하지 못한다. 원작 속 괴물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보여짐’(시각적 이미지)은 1930년대 이후 영상매체에서 현실이 되었다. 셜리가 기대했던 작품 전체의 구성이 주는 공포는 이제 단순한 몇 컷의 시각적 공포로 대체되었다. 어디선가 아도르노(Th. Adorno)가 '부분에 의한 전체성의 전복'이라고 통탄했던 '문화산업'의 악몽은 이렇게 나타났다.

  1818년 이후 <프랑켄슈타인>이 거쳐온 변형과 전유의 역사는 하나의 부르주아 장르가 노동자 대중들이 즐기는 문화로 이입되는 과정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자신이 만든 괴물에게서 느낀 공포는 이제 작가인 셜리의 몫일지도 모른다. 19세기 초의 한 소녀가 쓴 공포소설은 그 자체로 괴물이 되어 버렸다.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지난 180여년 동안 <프랑켄슈타인>은 대중문화 속에서 스스로 언어를 익히고 모습을 만들어 왔다. 그리고 이렇게 자란 프랑켄슈타인은 소설 속 자신을 만든 박사와 소설을 쓴 작가의 존재마저 잊혀지게 만들었다. 자신을 만든 주체를 잊게 하고 그 주체를 지배하는 상품의 속성이 오늘날 대중문화의 성격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더욱 강력한 대중문화의 힘은 자신이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대중들의 힘을 표상 뒤에 감추고 전도시키는 과정에 있다. 프랑켄슈타인을 만들어낸 부르주아의 공포가 노동자들의 힘이었다면, 노동자들에게 프랑켄슈타인은 결코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괴물을 보고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고 즐거워해야 할 이들은 흥행사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이다. 만일 우리가 '괴물' 프랑켄슈타인이라면, 누가 프랑켄슈타인을 두려워할 것인가.


Mary Shelley(1818/2003), Frankenstein or the modern prometheus, London: Penguin Books.

Hindle, M(2003), "Introduction" in Frankenstein or the modern prometheus, London: Penguin Books.

Moretti, Franco(1983), 'Dialectic of Fear', in Signs Taken for Wonders, London: Verso Editions and NLB.

Marcuse, H(1960), Reason and Revolution: Hegel and the Rise of Social Theory, Boston: Beacon Press.

[2008년 대중문화의 이해 강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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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mmunication Paradox

  인간 커뮤니케이션을 설명하는 대다수의 모델들은 커뮤니케이션의 발생 혹은 그 조건을 커뮤니케이션의 결과 혹은 목적에 일치시키고 있다. 특히 피스크가 말하는 과정학파 모델들은 송신자 의도의 충실한 전달이라는 면에서 커뮤니케이션 행위의 발생조건을 그 결과의 완수 속에서 확인하려 한다. Shannon과 Weaver의 수학적 커뮤니케이션 모델이 보여주듯, 송신자가 의도한 메시지는 그 “의도”를 가로막는 노이즈(noise)를 최소화시켜야 하는 임무(목적) 속에서 전달되어야 한다. 또한 Newcomb을 비롯한 대칭, 균형 모델 역시 인간 커뮤니케이션의 발생을 균형을 향한 욕구, 달리 말하면 불균형과 비대칭을 극복하려는 욕구로 설명하여 그 균형의 달성을 커뮤니케이션의 결과로 본다. 어느 것이건 이러한 커뮤니케이션 모델들은 발생의 조건(기원)에 그 목적이 내재되어 있다는 점에서 분명한 ‘결정론’이자 ‘목적론’을 이룬다. 메시지에 앞서 의도가 전제되고(과정학파), 의미에 앞서 구조가 전제된다(기호학파).

  그러나 이 모델들을 ‘전도(inversion)’ 시켜 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수학적 커뮤니케이션 모델에서 설명하는 것은 사실상 노이즈를 제거하기 위한, 즉 엔트로피(entropy)를 낮추기 위한 정보(information)의 양에 관련된 커뮤니케이션이다. 그렇다면 커뮤니케이션을 애초에 발생시키는 것은 메시지를 통한 의도의 전달이 아니다. 이는 커뮤니케이션의 목적이지 그 발생조건이 아니며, 도리어 발생조건은 “노이즈의 존재” 그 자체에 있다. 마찬가지로 균형, 대칭 모델의 삼각형들은 발생조건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루고자 하는 균형, 곧 목적 그 자체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균형을 향한 욕구, 즉 참을 수 없는 비대칭의 상태가, 비록 잘못된 표현이지만, 바로 커뮤니케이션의 발생조건을 말해 주고 있다. 역설적으로 이 모델들이 상정하는 커뮤니케이션의 균형상태는, 더 이상 커뮤니케이션이 발생하지 않는, 있을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셈이 된다. 그렇다면 목적으로서의 커뮤니케이션을 상정하지 않는 커뮤니케이션 그 자체의 발생조건, 즉 과정학파 모델 ‘자체’의 발생조건은 노이즈, 비대칭, 불균형인 셈이다. 커뮤니케이션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커뮤니케이션 이론 강의록 일부 5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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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이후 지금의 구성주의적 접근이 등장하기까지 매스 커뮤니케이션 효과이론 교과서는 그 최신판으로 침묵의 나선(the spiral of silence), 다원적 무지(the pluralistic ignorance), 제3자 효과(the 3rd person effect)등을 열거했다. 이들은 사회심리학으로부터 여론과 미디어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도입되었다는 공통점을 갖지만, 한편으로 소위 주류 커뮤니케이션 이론이 얼마나 철저히 관념론 적인가를 보여주는 사례도 된다.

  무엇보다 이 이론들은 그 정도가 어떻든, 개개인의 “관념 속에 존재하는 타인들”과 “실제의 타인들”이 다르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이론들의 차이가 있다면 두 ‘타인들'이 서로 어떤 점에서 다른가, 그리고 그 다름으로부터 어떤 행동이 도출되는가에 있다. 단순하게 요약하면, 수용자 개인이 관념 속의 타인에게 복종한다거나(침묵의 나선), 실제의 타인들이 설득을 당하는 정도(effect)를 오판하거나(제3자 효과) 아니면 다수의 여론(opinion)을 오판하는 경우(다원적 무지)로 나누어진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이 이론들의 대상은 관념 속에 타인들을 갖고 있는 “개인”(수용자)과 그 개인들 각각의 “집합(set)”이다. 이들은 매스 미디어에 의해 ‘관념 속 타인들’을 만들어 내는 수동적인 존재들이며(다원적 무지, 제3자 효과) 자신들이 만들어 낸 타인들에 종속되는 허위의식의 소유자들(침묵의 나선, 제3자 효과)이다. 이론의 대상이 되는 수용자들이 이런 존재라면, 이론의 주인공인 수용자들이 만드는 “관념 속 타인들” 역시 동일한 존재들이다. 텔레비전의 음란물을 보고 자신은 덤덤하나 다른 이들(관념 속 타인들)은 ‘잠재적인 성범죄자’가 되리라고 생각하는 수용자 개인들이 존재한다.(제3자 효과) 이 개인들은 그 음란물을 보여주는 텔레비전에 의해 관념 속 타인들을 만드는 수동적 존재이며, 동시에 그들이 관념에서 만든 타인들 역시 음란물에 어쩔 줄 몰라하는 ‘잠재적 성범죄자들’이다. 1930년대에 만들어진 탄환효과 이론의 무기력한 수용자들은 이렇게 7,80년대 이론의 안과 밖에서 두 번 부활한다.

  위 이론들을 만들고 검증해온 ‘이론가’들은 결국 무기력한 수용자라는 관념을 그들이 말하는 현실의 수용자- 아마도 그 이론을 읽고 있는 바로 당신 -에게 투영하고, 그 현실의 수용자 개개인의 관념 속에 한 번 더 투영한다. 어쩌면 제3자 효과- “미디어의 효과는 그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사람에게 나타난다” -는 그 이론을 만든 '이론가'의 자기 독백일 뿐이다. “매스 커뮤니케이션을 모르는 너희들은 그렇게 되겠지만 전문가인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이론가이다.” 바로 여기서 관념의 무한한 투영이 벌어진다. 이론가의 관념은 이론에 투영되고 이론 속 주인공에 투영되며 그 주인공의 관념에까지 투영된다. 이 끔찍한 동어반복(tautology)이야 말로 헤겔이 그토록 거부한 악무한(vicious circularity)이자 자본주의 고유의 이데올로기기다.

  여기서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관념 속 타인들이 아닌 실제 타인들은 나와의 ‘현실적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며, 그렇기 우리 모두는 이 관계를 떠나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럼에도 이 이론들은 내가 날마다 일상에서 부딪히는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타인’이 아니라, 거꾸로 ‘관념 속에서 먼저 타인들이 만들어지고 이로부터 그들과 나의 관계가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관념 속의 ‘잠재적 성범죄자’는 나로 하여금 그들을 통제할 ‘방영금지’와 ‘특별법’을 지지하게 만들어 현실적 관계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사회적 관계는 현실이 아니라 개인의 관념에서 시작되어 만들어지는 셈이다. 결국 이 이론들이 말하는 유일한 현실적 관계는 나와 당신의 관계가 아니라 거역할 수 없는 사물(thing)인 매스미디어와 수용자 개인의 관계이며 이로부터 타인과 나의 관계가 만들어진다. “생산자들의 사회적 관계를 그들 외부에 존재하는 관계 즉, 물건들의 사회적 관계로 보이게”하는 물신성(fetishism)은 맑스의 <자본론>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몇 십 년 동안 대학 강의실에서 소개된 이 효과이론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2007년 1학기 <커뮤니케이션 이론> 강의노트 중 일부
Posted by WYWH
2008. 1. 7. 0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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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정립되어 온 모든 것들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필연적이거나 예측가능한 원인으로서의 텔레비전에 대한 이론도 아니며, 실천도 아니다. 도리어 현재의 공인된 이론과 실천은 효과이다. 따라서 그 이론과 실천이 도전받을 수 있는지의 여부는 매체의 고정된 소유권 혹은 그 제도의 필연적 성격에 달려있지 않으며 끊임없이 갱신가능한 사회적 활동과 투쟁에 좌우될 것이다.

Raymond Williams, Television: Technology and cultural form, Routledge, 2003(1974). pp.137-138.

  신문방송학과- 요즘은 ‘언론정보학’이라는 못지않게 모호한 이름으로 불리는 학과 - 강의를 하다보면 한 번은 말하고 넘어가는 테마가 “매스 미디어 효과연구”다. 태생부터 2차 대전 징병과 정치광고에 연원을 둔 이 접근법은 소위 “과학적 연구”라는 명찰을 달고 70년을 넘게 버텨오고 있다. 몇 년 전, 태평양 너머의 소식통에 따르면, 프레임 분석(Frame Analysis)류의 구성주의적 접근(constructive approach)이 한동안 유행했다는데, 미국의 저널리즘 연구라는 동네는 유럽의 무슨 학문 분과가 건너가건, 실증과 모델이라는 블랙홀로 빨아들이는 놀라운 재주를 발휘해 왔다.

  70년대 무렵, 윌리엄스가 저렇게 매스 커뮤니케이션 사회학(효과연구)에 대해 한바탕 성토대회를 벌였음에도 효과연구는 여전히 그 질긴 생명력을 유지 중이다. 왜? 여러 가지 대답이 있겠다. 자본주의의 합리적 사유에 가장 알맞은 형식이기 때문에, 미국 도처의 기업들이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래서 막대한 펀드로 밥줄을 이어주기 때문에 등등... 뭐 어려운 얘기 집어치우고 딱 잘라 말하자면 공부를 안해서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

  몇
차례 강의를 하다 소위 기호학 마케팅 혹은 기호학을 통한 문화 컨텐츠 분석을 배웠다는 학생들에게서 어이없는 발표를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이데올로기란 의미나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라는 말을 수 없이 했음에도, 상당수는 그 형식인 ‘이데올로기’로 말만 다른 컨텐츠들을 ‘이데올로기라고 분석’해 냈다. 굳이 비유하자면 이런 식이다. 어떤 훌륭한 스승이 도끼는 “이런 식으로 만드는게 아니다”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었다. 제자들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기뻐하며 사람들에게 그런 식으로 만든 돌도끼, 쇠도끼, 나무도끼, 알루미늄도끼, 플라스틱도끼를 무한히 펼쳐 놓고 “이 도끼들이 나쁜 도끼다!”라고 말했다. 결국 제자들이나 사람들은 스승이 말한 나쁜 방식을 나쁜 도끼를 구별하는 기준으로 써먹으며 수많은 나쁜 도끼들을 만들어 냈다. 이데올로기는 이렇게 순식간에 “모델”이라는 이름을 달고 “과학적 기준”으로 바뀌어버린다.

  윌리엄스와 같은 이들이 쓴 저런 “오래된 책”이 아직도 출판되는 이유, 그리고 그것을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덮어놓지 않고 다시 봐야 하는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다. 윌리엄스 자체가 아니라 윌리엄스에 “대한 지식과 정보”로 윌리엄스를 다 이해했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저 못된 제자가 될 충분한 자격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수많은 고전들은 다 이렇게 이해되고 있다. Forever! Canned Knowl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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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착륙의 진실>

  인류의 기록에서 가장 오래된 음모론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20세기 이후 가장 많은 음모론이 만들어진 나라는 바로 “미국”이다. 최근 가장 설득력 있는 음모론으로 여겨지는 딜런 애버리(Dylan Avery)의 <Loose Change> 역시 9/11테러의 배후가 다름 아닌 미국임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음모론의 역사에서 미국의 ‘지위’를 확인시켜 준다.

  대다수의 음모론에서 그 ‘배후’는 막대한 자본과 조직, 전 세계적인 활동반경, 사유에 앞서는 행동의 기민함을 특징으로 한다. 묘하게도 이러한 배후의 특징은 어네스트 만델(E. Mandel)이 설명한 후기 자본주의 범죄소설 속 탐정- 특히 007 -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와는 달리, 이 음모론을 최초에 제기하고 그것에 증거를 덧붙여 가는 이들은 철저히 개인적인 존재이며 때로는 상상력을 동반하기도 하는 사유의 능력에 의존한다. 음모론자들이 갖는 이러한 특징은 ‘배후’와는 반대로 초창기 탐정의 전형인 홈즈나 뒤팽을 떠오르게 한다. 요컨대 “구식 탐정과 최신식 범죄자”라는 대결구도가 음모론 텍스트의 생산과 수용의 장을 구성한다. 한 명의 외로운 탐정이 거대한 조직의 음모에 맞서 추론을 제기한다면, 그것을 읽는 우리는 그 탐정의 수사에 동조하도록 초대받는 셈이다. 이런 까닭에 음모론을 만들고 그것을 읽는 행위는 저 너머 어딘가의 진실을 찾는 일종의 “모험”이 된다.

당신이 바라는 모험으로...

  대다수의 정치경제학자들이 지적하는 자본주의의 태생적 한계는 바로 축적을 향한 자본의 과도한 경쟁이 낳는 “무정부성”이다. 특히 공황의 국면에서 잘 나타나는 이 무정부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삶의 조건에 일어난 변화를 일종의 ‘미스터리’로 여기게 한다. 우리의 경우 정말로 ‘새벽에 도적같이 찾아온’ 97년 외환위기가 이러한 미스터리의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나날이 세분화되는 분업화, 실체를 알 수 없는 가상자본의 가공할 속도 등은 우리로 하여금 몇 달 앞의 예측조차 불가능하게 할 정도이다. 그람시(A. Gramsci)는 이러한 자본주의 속 우리의 삶을 ‘강요된 모험의 과잉’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이 넘쳐나는 모험의 과잉에서 안정을 찾고자 하지만 동시에 진정한 모험, 즉 고난에 찬 현세를 벗어나려는 탈주를 꿈꾼다. 이러한 탈주는 분명히 자본주의라는 강요된 삶의 방식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주도 하에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는 모험’을 뜻한다. 바로 이 열망이 우리를 음모론이 초대하는 모험으로 인도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Loose Change>는 자본주의 속에 내재한 우리의 열망과 미국의 전쟁사가 결합한 절묘한 음모론이다. 9/11 직후 시작된 아프카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침공은 빈 라덴의 생포는 커녕 대량살상무기의 색출조차 이루지 못했고, 이라크 전의 (공식)전사자 수는 벌써 3000여명에 육박하고 있다. 더욱이 미국 내 테러에 대한 공포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 같은 미국의 상황은 9/11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의구심과 미스터리를 낳기에, 즉 음모론이 자라기에 가장 좋은 토양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결국 <Loose Change>를 통해 탐정으로 초대받은 미국인들은 설령 배후가 끝내 밝혀지지 않고, 그 결과를 알 수 없더라도 정부에 의해 강요된 미제사건으로서의 모험을 더 이상 바라는 것 같지는 않다. 도리어 그들은 이 한편의 ‘음모론’을 통해 9/11이 개인의 의지에 따른 미제사건으로 남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제기하는 추론의 타당성을 떠나 <Loose Change>가 일으킨 “효과”는 지금의 미국이 처한 상황의 중요한 징표임에 틀림없다.

위계의 텍스트

  그러나 모험으로의 초대가 음모론의 생산과 수용에서 벌어지는 반면, 음모론 자체의 텍스트는 역설적이게도 전혀 ‘모험’의 특징을 갖고 있지 않다. 음모론은 무엇보다 논리(추상)의 사다리 혹은 피라미드라는 구조를 갖는다. 예컨대 그 추론 형식의 최상위에는 ‘의혹’이 자리하고 그 의혹의 근거가 되는 몇 가지 사건들이 중간에 위치한다. 다시 각 사건들은 목격자, 보도자료- 특히 시각적 이미지 -, 과학적 근거 등의 세부적인 증거자료들을 하위에 갖는다. 이렇듯 위계(hierarchy)에 기반한 논리 구조는 아도르노(Th. Adorno)가 말한 계몽의 논리, 자본주의라는 합리성의 대표적인 사유형식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 사다리 혹은 피라미드는 워낙에 강력한 것이어서 하나의 증거자료에 대한 답변이 제기된다고 해도, 또 다른 의혹자료들이 피라미드의 한 자리를 채운다. 의혹에 대한 답변은 이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올라탄 ‘의혹’이라는 감정 자체가 사라지지 않는 한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견고함을 “황우석 교수를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서 이미 확인한 바 있지 않은가.

  음모론의 생산과 수용에 반영된 우리들의 ‘열망’과 음모론 텍스트 자체에 내재한 합리적 ‘사유’는 바로 “소외”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마치 상품은 그 자체의 회로를 가진 듯 나와 무관하게 움직이지만, 그것을 만들어 내는 활동력은 바로 나의 것이다. 자본주의를 부정하려는 탈주를 향한 나의 ‘열망’과 자본주의 체제가 만들어 낸 ‘사유’는 각기 다른 장소(topos)에서 작동하는 분명한 분리이다. 음모론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장소가 미국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미국이 자본축적에 가장 선진적인 국가라면, 음모론 역시 가장 자본주의적인 소외의 한 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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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renzo Quaglio II, <Aloys Senefelder>(1818, Lithograph, 28*23cm)

요즘 연일 TV와 신문에 매일뉴스가 되버린 “바다 이야기”와 정권실세 의혹설, “도박중독자”의 심각성 등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얼추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박정희 시절 소위 ‘회전당구기’ 수입 논란, 김영삼 시절 파친코의 대부 ‘정덕일, 정덕진’ 형제 사건, 그리고 카지노 대부 ‘전낙원’ 사건 등이 떠오른다. 정권과 도박의 밀애가 이렇게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니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면, 바다 이야기 사건은 이전 사건들과 달리 밀애설에 덧붙여 전국에 ‘도박중독’ 경계경보를 날리는 놀라운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런 시국엔 어디 호기심으로라도 과천 경마장에 가면 당장 ‘도박중독 양성반응자’로 몰릴 판국이다.

도박의 원칙은 간단하다. “돈놓고 돈먹기”다. 그러면 도박 이전에 돈이 있어야 하고 이 돈은 바로 자본주의 사회관계가 낳은 “화폐”라는 권력을 뜻한다. 영화 <바람의 파이터>에서 양동근의 친구로 나온 정태우의 ‘비즈니스’는 “파친코”였다. 서구에서 도박이 시민계급의 보편적인 오락으로 된 시기가 19세기라고 하니, 당시 일본에서 그런 나무통 “파친코”를 찾아보기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도 아마 도박이 일상 오락이 되고 중독자를 양산하기 시작한 때는 자본주의라는 삶의 방식이 곳곳에 스며들기 시작한 때와 일치할 지도 모른다.

도박이 그토록 매혹적인 것은 지루했던 기다림과 아까움을 한 번에 내쳐주는 ‘대박’의 기쁨 때문만이 아니다. 도박은 내가 이전 판에서 아무리 많이 잃었다고 해도 매번 ‘새로운 판’으로 다가온다. 하나의 판이 이전 판과 연관성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 그래서 도박이 갖는 ‘日新又日新’의 반복성은 벼락 맞아 죽을 확률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로또를 집어들게 하며 슬롯머신을 당기게 한다. 비연관성과 반복성에 우리가 이처럼 익숙할 수 있는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다. 먹고 살기 위해 행하는 “노동”, 그 자체가 이미 우리에게 비연관성과 반복성을 가르쳐 주지 않았던가. 아무리 정보기술이 도입되고 IT 종사자가 늘었다고 해도, 사무직이니 고급기술이니 하는 ‘정신노동’은 일순간 지루한 업무를 반복하는 “탈숙련 노동”으로 변한다. 더군다나 노동의 탈숙련화는 시각이나 청각과는 무관한 촉각, 즉 손동작에 의한 기계적 반응으로 행해진다. 끊임없이 볼트를 조이고 키보드를 두드리던 그의 손이 퇴근 후 끊임없이 슬롯머신을 당기는 되는 관성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도박의 목표가 돈이듯, 도박의 방식은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과 다르지 않다.

도박문제를 왜 사회 탓으로 돌리냐고 비난한다면, 내친 김에 더 가보자. 오늘날 자본이 증식되고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신용’이다. 한 기업의 총자본 중 순수한 자기 자본비율이 100%인 곳은 정말 드물다. 대부분의 자본은 ‘빌린 돈’으로 생산을 하고 그 생산한 상품이 우연의 바다인 시장에서 판매가 되어야만 자신의 가치를 증식시킬 수 있다. 물론 판매조차 대부분 신용카드 같은 소비자 신용이라는 또 다른 ‘빌린 돈’에 의해 가능하다. 금융 자본의 지위가 지배적이 될수록 자본의 증식과 생존은 이렇게 ‘외상 거래’에 의지한다. 이 거래에서 어느 한 마디가 끊어진다면, 곧바로 ‘공황’이라는 최악의 상황이 도래한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 전체가 공황/생존을 놓고 벌어지는 도박의 세계라고 하면 지나친 비약인가. 도박중독자가 일가족을 피폐하게 했다면, 금융자본의 도박은 97년 외환위기처럼 수백만의 사람을 거리로 내몰았다. 어느 쪽이 더 중증의 도박중독인가.

“전국민 도박중독 경계경보”는 반복의 일상화를 가르쳐준 노동과 노동자의 생계를 걸고 도박판을 깔아 놓은 자본을 개인의 병리학으로 은폐하고 있다. 진단을 내리는 의사, 처벌을 명령하는 판사, 그리고 이들을 한데 모아주는 미디어는 2006년 9월, 수많은 노동자들의 육체와 정신을 “감시하고 처벌”하는 중이다. 자본주의라는 삶의 방식이 범죄에 어떤 성격을 부여하는지 150여년전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경우든지, 범죄자는 한편으로는 도덕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비극적인 인상을 만들며, 이런 식으로 대중들의 도덕적이고 미적인 감정들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봉사’를 하게 된다. 범죄자는 형법 개론, 즉 형법 체계와 이 분야에서 이를 집행하는 법률가뿐만 아니라, 뮐러의 『죄악』과 실러의 『군도』, 『외디푸스왕』과 『리차드 3세』같은 비극은 물론이고, 미술과 순문학까지 생산해 낸다. 범죄자는 부르주아적 삶의 단조로움과 일상의 안전을 깬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그 사회가 정체하는 것을 막으며 불안정한 긴장과 민첩함을 야기시키는데, 만일 이런 것이 없다면 경쟁심의 자극조차도 무뎌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생산력에 자극을 준다.”(K. Marx, 『잉여가치학설사』, 제1부)

From W. Benjamin, 반성완 옮김(1983),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브에 관해서”,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강의노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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