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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5.13 열정과 노동 사이: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오래된 논쟁이지만 1990년 즈음, 이른바 영국 신좌파(New Left)들 중 일부는 포스트 포디즘이라는 조절양식의 도래와 함께 새로운 노동계급의 출현을 다음과 같이 예견했다. 베네통과 같이 새로운 유연적 생산/유통 방식은 기존 제조업 노동자들이 아닌 디자인, 기획, 마케팅이라는 신직종의 종사자들을 사회변화의 선도(leading edge)로 만들 것이다. 이들은 무엇보다 유통과 소비의 영역에서 기존 노동계급들이 발견하지 못한 사회적 열망(aspiration)을 찾아낼 수 있으며, 그들 또한 그러한 열망의 소유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앞장서 만들어 낼 새로운 세상. 신좌파들은 이런 세상을 ‘디자이너 사회주의(designer socialism)’라 불렀다. 이들의 주장은 훗날의 회고에서도 엿보이지만 당시 영국의 골수좌파(hard left)들을 염두에 둔 ‘이론의 정치’이기도 했다.
일례로 이 진영의 대표적 학자였던 맥로비(A. McRobbie)는 골수좌파들(?)의 저널 <Capital & Class>에 실렸던 사이먼 클락(S. Clarke)의 글을 두고 맑스주의자들은 소비자들의 열망을 언급하면서도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고 비판했다. 흥미롭게도 맥로비의 이러한 비판에는 클락이 속했던 이론 진영이 견지하고 있던 열망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었다. 주로 자율주의자들과 열린 맑스주의자들(open marxists)로 이뤄진 이 그룹에서 열망이란 새로운 직종이나 소비 방식에 대한 욕구가 아니라 자신들의 노동이 화폐로, 이윤으로 전환되는 과정에 대한 거부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최저임금 인상이라는 요구는 더 높은 소비수준에 대한 바램을 넘어, 더 나은 삶을 위한 노동자들의 욕구에서 비롯된, 임금이라는 굴레(화폐제약)를 벗어나려는 거부(rejection)이자 부정(negation)인 것이다. 굳이 두 진영의 열망을 단순화시켜 구분하면 신좌파들의 열망이란 ‘새로운’ 임노동 관계를 향하고 있고, 자율주의(혹은 열린 맑스주의)자들의 열망은 임노동관계 ‘그 너머’를 향하고 있는 셈이다.
열망과 다른 개념이긴 하나 ‘열정노동’을 다루고 있는 이 책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는 어떻게 보면 위 두 이론 진영의 중간에 위치해 있다. 이 열정을 영어로 번역하면 passion이 되겠으나 책을 읽다보면 “내가 하고 싶은/좋아 하는 일을 끝내 해내려는 개인의 의지” 정도로 생각된다. 저자들이 인터뷰한 청년들의 다양한 직종들- 프로 게이머에서 노조의 상근자까지 -의 목록만을 나열해도 20년 전 신좌파들이 말하는 신직종이자 사회 변화의 선도가 쉽게 떠오른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2011년 지금도 여전히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창의산업’이나 ‘창의지성’이니 하는 포스트 담론 부스러기들에 대한 훌륭한 비판서라 해도 무리가 없다. 신좌파들이 꿈꾸었던, 아니 1990년대 한국의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이 고리타분한 좌파 정치운동에 대안으로 내세웠던 문화운동과 신세대 담론에 대한 그 당사자들의 저널리즘(native journalism)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이 책을 덮고 나면 “어느덧 착취의 언어가 된”, 그리고 “제도화”된 이 열정을 어떻게 볼 것인지의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고, 창업을 꿈꾸며, 진실을 알리는 기자가 되겠다는 이들에게 ‘너의 바로 그런 열정은 네 꿈이 아니라 자본의 꿈을 이루게 할 뿐’이라는 냉정한 충고만을 던지고 돌아설 수는 없지 않겠나. 저자들 역시 이 지점에서 열정 노동을 만드는 구조와 열정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열정의 반복이다. 열정의 착취로 인해 생긴 이 순환을 끊어내기 위해서라도, 어떤 형태로든 새로운 열정을 불러와야 한다. 운동이 파편화된 시대에 활동가들은 새롭게 노동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지 못했고, 새로운 친구들은 자신들의 삶에 도움을 주는 운동의 역할을 찾지 못했다. 이들이 서로에게 도움을 주려면 여전히 열정이 필요하며, 사라져 가는 열정이 되살아나야 한다. 우리는 열정 노동을 만드는 구조를 비판한다. 하지만 ‘열정적이어야 한다’는 시대의 요구는 따르려 한다. 여기에 우리의 모순이, 혹은 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 존재할 것이다.”

달리 말해 “열정 노동을 만드는 구조”란 비정규직으로 대표되는 임노동 관계이며 “시대의 요구”로서의 열정은 임노동에 종속되지 않은, 혹은 종속되기 전의 ‘하고 싶음’ 정도가 될 듯하다. 지극히 타당한 지적이지만 후자의 열정에는 조금 더 정교화가 필요하다. <내 이름은 김삼순>과 <커피 프린스 1호점>을 보고 파티시에나 바리스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는 이들이 열정 노동의 참담함을 느끼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바로 그 순간에 느끼는 갈등을 다이너스타인(Ana C. Dinerstein)은 “내가 지금 누구이며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what I am and need)”와 “내가 지금 누구이며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가 과연 자본주의적 발전에 유용한 것인가(where what I am and need is useful for capitalist development)” 사이의 긴장으로 묘사한다. 이 긴장 속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로서의 열정은 어떻게 해서든 취업을 해야 한다는, 즉 노동력 상품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는 절박한 욕구로 변하고 만다.
결국 열정 노동을 만드는 구조와 다른 “새로운 열정”, “시대의 요구로서의 열정”은 열정 그 자체가 아니라 임노동 관계에 대한 거부, 즉 열정 노동을 만드는 구조에 대한 거부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해서 이 책에서 잠시 대안으로 언급하고 있는- 그러나 그 실현 가능성에는 회의적인 -기본 소득제 등은 열정을 이루기 위한 기본적인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물론 고용의 안정성과 최저 임금의 인상 등 열정 노동 각각의 분야가 아닌 각 부문을 아우르는 보편적인 사회적 임금 구조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이 조차도 한국의 상황에선 높은 기대수준에 해당하겠지만, 만일 그러한 고용안정과 임금구조가 정착된다면 열정의 임노동화를 축복하며 샴페인을 터트릴 것인가. 적어도 현재의 상황에서 열정 노동(자)들은 그 다양한 꿈과 기대에도 불구하고 잔혹한 임노동 관계라는 공통의 지점으로 수렴하고 있다. 열정을 부추기는 미디어의 판타지들은 역설적으로 현실에선 노동착취가 제조업의 노동자들 뿐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에서도 예외가 아님을 깨닫게 해주는 출발점이 되어 주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양상이 과거 오래된 운동권들의 말처럼 “사태가 나빠질수록, 상황은 좋아진다(The worse things are, the better things are)”는 뜻은 아니다. 열정과 노동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함께 연대할 수 있는 공통의 지점들이 만들어 질 수 있으며, 바로 거기에서 무엇을 거부해야 할지, 그리고 그 열정의 순수함을 어떻게 지속시킬 수 있을지의 고민들이 생겨날 것이다.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의 결론은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다. 나 역시 이 서평 아닌 서평에서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문제는 희망을 꿈꾸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E. Bloch).

 

Posted by WYW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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