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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9.29 도덕과 의지: 신정환에서 U-17 여자 월드컵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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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차나 연차를 붙였다면 일주일은 족히 쉬었을 추석 연휴가 U-17 여자 월드컵 우승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사실 어지간한 골수 “축빠”가 아니면 지난 번 4강에 오른 20세 이하 여자축구나 이번 17세 이하 여자축구 대표팀이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리 만무하다. 박지성이나 이청용, 그리고 남자 국가대표팀에 쏟아지는 관심에 비하면 이들이야말로 “인기종목 내 비인기 부문”이라고 해야 하나? 17세 이하 대표팀에 선발될 수 있는 선수자원은 고교등록 선수 345명뿐이었고, 국내 여자축구팀은 초등학교에서 실업팀까지 합쳐도 65개에 그친다고 한다. 남자 축구나 야구처럼 오랜 기대의 역사를 가진 종목들보다 여자축구와 같이 혹시나 하는 기대의 승전보가 날아오면 기다렸다는 듯 쏟아지는 기사들이 있다. 지난 시간 무관심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척박한 환경에서도 꿈을 잃지 않고...”, “○○ 종목의 불모지에서 건진 값진 승전보”가 포털 뉴스에 넘쳐난다. 물론 여기서 끝이 아니다. 각 팀 스타 선수들의 불우한 유년환경이나 혹독한 훈련 스토리가 이어서 나와줘야 한다. 이렇게 해서 누구나 다 알면서도 또 어느 한켠 뭉클할 수 밖에 없는, “꿈을 향한 의지” 만으로 잘 버텨준 우리의 태극전사들(소녀들!)이 탄생한다. 지난 8월 20세 이하 여자축구팀의 지소연이 그랬고, 이번엔 여민지와 그 동료들이 그 주인공으로 발탁될 예정이다.

추석연휴가 길긴 길었나보다. 갑작스런 폭우 피해와 여자축구 대표팀의 승전보에 희비가 오락가락하다보니 연휴 전 포털 뉴스들을 도배했던 “신정환 도박 파문”을 잠시 잊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신정환의 도박행보와 거짓말에 대한 집중포화는 이미 내각 청문회와 외교부 특채 파문에서 준비되고 있었다. 김태호와 신정환을 두루뭉수리한 ‘공인’이라는 동일체급에 놓을 생각은 없다. 단지 일국의 국무총리 후보에서 연예인에 이르기까지 전가의 보도로 적용된 원칙이 “도덕성”이었다는 점만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공정한 사회”라는, 어찌보면 자뻑에 가까운 이명박 정권의 국정기조로까지 이어진 이 “도덕성”의 효과는 공인들에게만 해당되지는 않는다. 도덕성에 대한 인정은 집권 후반기 정권 재창출을 노리고 엄선했던 충신들마저 쳐내게 했다. 이 과감한 “결단” 뒤에 공인만이 아닌 모든 ‘국민’들에게 “공정하게” 적용되어야 할 도덕성의 경고가 숨겨져 있다면 지나친 추측일까? 신정환의 도박 행보와 거짓말은 분명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지상파 방송사조차 김태호에게도 하지 않던 ‘연예 탐사 저널리즘’을 행하고, 스토리까지 엉망으로 만드는 예능프로그램의 ‘급편집’이란 강수를 두는 건 분명히 오버다.

여민지의 “의지”나 신정환의 “도덕성 결여”에 딴지를 걸자는 얘기가 아니다. 의지와 도덕은 그 자체만으로는 마땅히 지켜야할 규범이자 덕목이다. 그러나 문제는 의지에 대한 찬양과 도덕에 대한 강박이 분출되는 특수한 국면에 있다. 1997년 말 공황을 기점으로 한국의 거의 모든 공동체 운동과 조직들이 붕괴되던 시기, 해고와 퇴직의 광풍 속에서 우리가 배운 것은 “스스로 버텨내야 한다”는 의지의 습득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개인적 학습의 과정은 박세리와 박찬호, 그리고 2002년 월드컵 ‘전사’들의 기적으로부터 충분한 정당성을 확보했다. 그리하여 2000년대 중반 이후 위기를 함께 극복하기보다 혼자서 버티기에 익숙한 20대들이 등장했다.(혹자들은 이들의 개인주의를 두고 “20대 절망론”을 펴기도 했다) 개인이 감당해야 할 고난의 극복, 곧 “의지의 강자”라는 이미지는 2000년대 중반 한국사회에서 본격화된 보수화의 바람과 그 맥을 같이 했다. 그 보수화의 중심에서 바로 개인의 의지를 온 국가에 육화시켰던 박정희가 부활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도덕(moral)”은 또 어떠했던가? 97년 공황에서 가장 많이 듣던 말 중 하나가 “모럴 해저드(moral hazard)”였다. 경제의 3주체인 정부, 기업, 가계 모두에 공히 적용되던 이 용어는 2000년 신용카드 대란 이후 어느새 “갚을 능력도 없으면서 일단 쓰고 보는 무책임한 개인”(신용불량자)으로 점점 확산되어 갔다. 개인의 무책임으로 협소해진 이 용어가 이번 내각 청문회와 외교부 공채 파문에서 다시 등장한 것 역시 우연이 아니다.

17세 이하 여자축구 대표팀의 우승은 당연히 기뻐할 일이다. 문제는 그 소녀들의 “꿈을 향한 의지”가 모든 국민들에게 암묵적으로 강요될 때 벌어진다. 324명의 여자 고교등록 선수들 모두가 그러한 의지를 불태우지 못한다고 탓할 수는 없으며, 무수한 자기 소개서를 쓰면서도 취직이 안되는 청년들을 소녀들보다 못한 의지박약아로 몰수는 없다. 김태호에서 신정환으로 이어지는 도덕적 책망 또한 당연하다. 그러나 신정환의 도박 중독과 직장인의 로또 중독(?)은 같은 수준이 아니며, 박연차를 몰랐다고 한 김태호의 거짓말과 갚을 돈이 없다며 버티기에 들어가는 신용불량자의 거짓말은 동급이 아니다. 의지와 도덕은 사회경제적 상황을 떠난 진공상태의 개인을 대상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권이 위기에 닥쳤을 때, 혹은 한 사회의 거대한 구조조정이 시도될 때, 이 의지와 도덕이라는 담론은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다. 1980년대에 ‘영국병’을 고치겠다던 철의 여인 대처의 구호는 바로 자유로운 시장과 도덕적인 사회였다. 지당한 말이었다. 그러나 시장의 자유란 사실 금융의 자유였음을, 그리고 도덕적 사회란 긴축재정으로 복지시스템을 뒤흔들며 그 수혜자들을 ‘등쳐먹는 자들(scroungers)’이라 몰아간 훈육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사람들은 이를 신자유주의라 부르기 시작했다. 대처의 1980년대와 이명박의 2010년대는 분명히 다르다. 그럼에도 여민지의 의지와 신정환의 부도덕이 집권 후반기 이명박 정권의 정치적 담론에 포섭되리라는 걱정은 지울 수가 없다. 정치적 담론 투쟁에서 가장 결정적인 것은 지배세력들의 거짓말이 아니라 의지와 도덕 같이 모두가 거부할 수 없는 “당연한 말”이기 때문이다.

[2010.09.28미디어스기고문]

Posted by WYW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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