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벌적손배'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1.08.14 지식인과 독서
  2. 2020.11.29 언론개혁의 열망인가, 복화술의 정치인가
2021. 8. 14. 16:00

우리는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우리를 찌르는 그런 종류의 책만을 읽어야 한다고 난 생각한다. 만일 우리가 읽고 있는 책이 머리를 치는 일격으로 우리를 깨우치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 책을 무엇 때문에 읽어야 하는가? (…) 우리는 우리에게 재앙과도 같은 영향을 주는,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사랑하는 어떤 사람의 죽음처럼, 모든 이들로부터 멀리 숲속으로 추방당한 것처럼, 자살처럼, 우리를 비탄에 젖게 하는 그런 책들을 필요로 한다. 책이란 우리 내부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기 위한 도끼가 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나의 믿음이다.

카프카(F. Kafka)가 오스카 폴락에게 쓴 편지



카프카가 이 편지를 썼을 때 나이는 스물한 살이었다. 프라하의 독일계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던 시기였다. 문학에 대한 열정과 법학 박사학위 취득이라는 전혀 다른 두 언어의 공간을 왕래하던 그에게 책은 이런 의미였다. 만족을 위한 수단이 아닌 ‘머리를 치는 일격’으로 자신을 깨우치는 책, ‘우리 내부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기 위한 도끼’인 책.

카프카에게 책이 갖는 의미는 오늘날 지식인에게, 특히 한국의 지식인에게도 그러한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사회과학 분야 박사학위 소지자들로만 좁혀서 예를 들어보자. 학위 논문 심사를 받거나 심사를 할 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왜 이 주제를 택했나요?”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흔히 논문 초반에 ‘연구 배경’이나 ‘연구 목적’으로 쓰여 진다. 그러나 여기에 쓰여 지는 문장은 연구자의 내면을 드러내지는 못한다. 전공 분야의 각종 문헌과 선행연구들의 한계, 학문 장 내 논문이 차지하는 위치를 설명할 뿐이기 때문이다.

정작 특정 주제를 택하는 동기는 자신이 흥미를 가졌던 분야의 독서 이력, 자신의 성장 배경이 반영된 사적 관심사거나 때로는- 사실 이런 경우가 더 많은데 -지도교수의 선택인 경우가 부지기수다. 대학 내 위계와 형식을 따라야 하는 학위 논문의 주제 선택은 불가피하다 해도, 연구자로서의 지위를 획득한 이후에도 “왜 내가 이 주제로 글을 쓰고 발언을 해야 하는가?”라는 자문을 하지 않음이 더 심각한 문제다.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란 바로 이 질문에서 시작되며, 모든 독서와 학술 토론회는 부단히 이 질문의 답을 찾거나 질문을 바꾸어 가는 과정이다. 지식인에게 책은 카프카의 책처럼 어떤 연구를 할 것인지, 어떤 문제를 설정할 것인지 고민하는 사유를 위한 ‘도끼’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자신이 읽은 책은 이미 정해 놓은 주제의 글쓰기를 위한 ‘재료’일 뿐이며, 때로는 가설과 결론을 위한 지적 권위- 대표적으로 참고문헌 -로 사용된다.

지식인에게, 특히 인문학과 사회과학 연구자들에게 독서는 논문, 칼럼, 강연 등 자신이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는지, 어떤 행위를 해야 할지, 그 행위가 사회적으로 어떤 효과를 가져 올지 끊임없이 자문하는 과정이다. 이런 이들에게 독서량과 생산하는 텍스트의 양이 비례하기는 힘들다. 사유가 아닌 글과 발언을 하기 위한 재료로 독서를 할 때, 그 글과 발언은 자신의 신념이나 믿음, 또는 기대의 산물일 뿐이다. 그 독서조차 자신의 믿음에 확신을 주거나 찾고 싶은 답을 주는 책만을 대상으로 한다. 지식인 ‘내부의 얼어붙은 바다’는 더욱 단단해지고 그에 호응하는 독자만을 찾아 헤매는 자기만족만이 목적이 된다.

최근 언론중재법 개정안- 소위 언론보도 피해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 -을 둘러싼 학계의 행위를 단순히 찬성과 반대로 나누고 그 배경이 되는 학문적 입장만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개정안이 아니더라도 이미 문재인 정부 기간 동안 숱한 이슈와 쟁점과 관련된 학계 및 지식인들의 토론회, 세미나, 칼럼, 강연 등을 생각하면 과연 한국사회 지식인의 책무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언론개혁’, ‘허위조작 정보’(가짜뉴스), ‘언론혐오’, ‘시민의 요구’라는 추상적이고 도덕적인 용어가 난무한다. 이런 용어들은 그 자체로 사유의 대상이지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지식인은 대중의 직접적 요구의 근거와 합리성을 제공해 주는 사람이 아니라, 왜 그런 요구가 나오는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설령 징벌적 손해배상과 같이 대중의 요구와 일치하는 결론이 나오더라도 그 결론에 이르는 과정은 자신이 가졌던 개념과 이론, 그리고 입장에 대한 부단한 회의의 결과여야 하며, 그 수단이 바로 독서다. 교수나 연구원이라는 사회적 지위는 이런 독서와 사유를 위한 자율성을 주기 위한 사회적 배려이지 권위가 아니다.

분석해야 할 언론의 낮은 신뢰도나 ‘징벌’에 대한 시민의 압도적 지지를 도리어 자기주장의 근거로 삼는 이들에게 과연 지식인이라는 호칭을 붙일 수 있을지 의문이다. 토론회 기사에서 자기 발언이 얼마나 인용되었는지 확인하고, 강연 동영상의 조회수를 자랑하며, 페이스북 응원 댓글에 만족하는 이들이 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언론’이든 ‘시민’이든 지식인이 쓰고 말하는 개념은 철저한 사유의 과정이자 결과여야 한다. 미루어 두었다 최근 다 읽은 데이빗 그레이버(D. Graeber)의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은 내가 사용해 온 개념의 반성과 사유를 위한 훌륭한 안내서였다. 토론회 발표문, 칼럼, 강의 때마다 마음에 걸린 것은 마르크스의 가치(value)와 물신성(fetishism)이었다. “우리 모두가 물신성의 세계에서 산다면, 대안은 무엇인가요?”라는 학생들의 질문은 언제나 나를 망설이게 했다. 이 책은 정리하거나 인용할 ‘재료’가 아니다. 더 많은 책을 읽고, 현상을 더 넓게 볼 수 있는 사유의 수단이다.

지식인에게 독서란 바쁜 일정과 각종 업무 중 여유 있을 때 하는 행위가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다. 이 의무는 결코 ‘언론개혁’과 같은 목적을 정해 놓은 사유 과정의 결과가 될 수 없다. 개념과 범주의 열려짐을 위한 사유 과정은 그 목적지가 어디인지 정하지 않은 모험과 같다. 모험보다 안위를 고민하는 지식인의 사회, 2021년 한국 사회다.

대문에서 그가 나를 가로막으며 물었다. “어딜 가시나이까? 주인나리”, “모른다” 내가 대답했다. “그냥 여기를 떠난다. 그냥 여기를 떠난다. 그냥 여기를 떠나 내처 간다. 그래야만 나의 목표에 다다들 수 있노라.”, “그렇다면 나리의 목표를 아시고 계시는 거지요?” 그가 물었다. “그렇다.” 내가 대답했다. “내가 ‘여기를 떠난다’고 했으렸다. 그것이 나의 목표이니라.”

카프카, <돌연한 출발>

Posted by WYWH

 

채영길 교수가 민주언론시민연합의 <언론 포커스>에 기고한 “‘언론 징벌적 손해배상제’와 합법성의 문제”는 언론개혁이라는 담론에 중요한 층위를 지적하고 있다.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은 민주당 정청래 의원의 <언론중재법> 개정안과 법무부의 상법 개정안이 제출되면서 “허위조작정보 처벌이냐, 언론의 자유냐”라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되고 있다. 물론 처벌과 자유의 이분법이 아니라 경실련, 언론개혁시민연대 등 시민단체와 학자들은 ‘가짜뉴스’의 모호함, 과잉입법의 우려, 위자료 현실화와 같은 대안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이 글은 처벌과 자유의 양자택일이나 그 중재안이 아니라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배에 찬성하는 시민의 입장- 미디어오늘에서 실시한 두 차례의 여론조사 결과로 확인된 -에 더 주목하고 있다. 과반이 넘는 찬성 여론은 고려하지 않고 징벌적 손배에 대한 현행 법체계 내 정합성이나 절충안을 제시하는 것에 그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언론의 자유와 열망의 도덕성

 

이 글은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배 찬성 여론에서 정의의 문제를 보고 있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이념이나 특정 직업군(언론인, 예술가 등)의 권리가 아닌 시민권의 하나로서 모든 시민이 평등하게 누려야 할 권리다. 이런 권리를 평범한 시민보다 주류 언론사나 기자가 더 많이 누리고 그로 인해 이익을 얻는다면 결코 정의롭지 않다. 현행법이든, 개정안이든 법에는 론 풀러가 말한 열망의 도덕성, 즉 법이란 지켜야 할 의무를 명시하려는 강제가 아니라 정의에 대한 갈망과 그것을 실현하려는 의지가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언론인 등 일부에게만 부여된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시민 또한 누려야 한다는 정의의 열망이 이번 개정안에 대한 찬성 여론으로 드러났다고 본다. 

 

이 분석은 징벌적 손배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 이분법이 아니라 언론개혁을 위한 시민의 열망이 드러난 계기로 보자는 뜻으로 읽힌다. 법안에 대한 사회적 논의과정에서 일반 시민 목소리는 없거나 무시되는 반면, 법안에 반대하는 언론 및 관련 전문가들의 목소리가 지배적이라는 불평등한 상황에 대한 지적은 중요하다.

 

그러나 법에 정의에 대한 갈망과 그것을 실현하려는 의지가 반영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대안은 될 지라도 징벌적 손배에 이입하기란 쉽지 않다. 언론개혁에 대한 시민의 열망은 여러 형태로 표현된다. 현 정권이 과제로 삼은 검찰개혁과 언론개혁은 보수 양당체제의 정치 구도에서 ‘적과 아군’이라는 담론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두 개혁 모두 그 대상의 인격화를 필요로 한다. 검찰개혁은 검사 조직과 검찰총장을, 언론개혁은 조중동과 종편 뿐 아니라 수구 집단을 대상으로 상정하고 있다. 적과 아군이라는 담론의 한계는 바로 여기에 있다. 부정해야 할 대상은 분명하지만, 앞당겨야 할 미래는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론답지 않은 언론”이라는 규정은 어느새 언론 일반에 대한 부정이 되어 버렸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언론인 등 소수에 치우쳤을 뿐 아니라 남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언론개혁을 향한 시민의 열망, 그 열망의 도덕성이 어떻게 법에 반영될지는 철저히 제도권 정치- 정확히 여의도 정치라 쓰겠다 -의 역학관계에서 왜곡되고 있다. 언론개혁의 범위는 너무도 넓다. 방송통신위원회 등 규제기관의 재구성에서 공영방송 지배구조를 거쳐 한 언론사의 저널리즘 책무까지 어떤 것을 먼저 시작해야 할지 선뜻 꼽기 어렵다. 언론개혁에 대한 시민의 열망은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의 금지, 사회적 재난에 대한 대처와 점검, 노동인권에 충실한 보도부터 종편 재승인 거부, 보수 유튜버 처벌 등 미디어의 영역을 넘어 검찰 같은 관료제에 대한 반발까지 포괄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열망이 정부여당의 법 개정안으로 구체화될 때, 시민이 원하는 언론이 무엇인지보다 처벌해야 할 언론이 무엇인지를 먼저 떠올리게 만든다. ‘열망의 도덕성’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의지가 아니라, ‘시민이 원하는 처벌의 정당성’으로 왜곡된다. 

 

언론보도 중재가 없다는 픽션적 공백

 

언론개혁은 분명히 필요하다. 그러나 언론개혁이 조선・동아・중앙・매경의 종편 재승인 거부와 한겨레・경향의 종편 승인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채영길 교수의 글처럼 이 문제를 단지 법리적 정합성이나 개정안에 대한 찬반으로 접근할 수는 없다. ‘열망의 도덕성’보다 더 타당한 개념은 차라리 아감벤(G. Agamben)이 말했던 예외상태, 그것도 정치적으로 만들어진 ‘픽션적 공백’으로서의 공백지대다. 법이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는 순간은 법체계 내 정합성이 아니라 현실에서 벌어진 사태에 그것이 적용될 때다. 법 조항의 모든 단어가 현실에 일대일로 대응할 수는 없다. 문자와 현실 사이 존재하는 공백을 해석과 판례로 메우는 것이 바로 권력이다. 그런데 때로 권력은 작동하고 있는 법이 현실을 포괄하지 못한다며 개정을 요구한다. 당연할 수 밖에 없는 법과 현실 간 공백의 경계- 법 적용의 한계 -는 지워버리고 애초에 그런 법이 존재하지 않은 예외상태로 상정하는 것이다.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배 개정안은 허술하지만 존재하며 그 작동은 미미한 언론에 대한 시민의 항의와 배상 경로를 공백지대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배 반대 의견은 시민의 항의와 정당한 요구를 거부하겠다는 집단 이기주의로 읽히고 만다. 징벌적 손배는 필요하다. 그러나 그 개정안은 지난 몇 년 간 언론중재위원회의 중재결정과 배상액, 민・형사 소송의 부족한 결과만을 놓고 정당성을 얻기는 어렵다. 시민의 피해와 항의가 왜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지, 예컨대 방송사의 시청자위원회나 언론사의 독자권익위원회 같은 곳은 왜 중재 역할을 하지 못하는지, 시민의 피해 사례와 부족했던 배상의 전례를 지적하며 시민사회단체가 적극적으로 개정안을 내놓아야 했다. 물론 이러한 형식적 절차의 부족함은 언론이 먼저 인정하고 대처했어야 할 문제다.

 

시민이 아닌 정부여당이 징벌적 손해배상 개정안을 제출한 것은 국회의원이나 장관이 언론을 통해 입은 피해 때문으로 읽히기 쉽다. 그럼에도 부정의 요구로서 제기된 언론개혁의 ‘열망’을 지지정당을 떠난 모든 국민의 요구라고 말하며 개정안의 찬반으로 진영을 가르는 행위는 지극히 협소한 정치적 행위다. 1980년대 영국의 대처 수상이 노동당 뿐 아니라 보수당까지 싸잡아 비판하며 자신의 발언이 곧 국민의 목소리임을 자처했던 ‘복화술’과 다를 바 없다.

 

채영길 교수의 글은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배 적용 여부를 법리의 문제가 아닌 그 이상의 문제와 담론의 층위로 접근하자는 주장으로 읽힌다. 징벌적 손배의 법적 문제는 이미 충분히 논의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지금 지식인과 언론인, 그리고 시민사회에 필요한 것은 징벌적 손배에 대한 찬성 여론의 퍼센트라는 숫자 너머 그 언론개혁 열망을 분석하고 구체화하는 것이다. 언론개혁은 분명히 정치적 문제다. 그러나 그 정치는 여의도 정치가 아니라 더 넓고 구체적인 정치의 영역이다. 

 

주: 이 글은 연구자, 언론인, 시민들의 논의를 풍부하게 만들기 위한 글이지, 특정 언론사가 따옴표로 인용하거나 간접 인용할 소재로 쓰지 않았음을 알립니다. 아울러 이 글은 연구자의 자격으로 쓴 것이며 제가 속한 조직이나 단체의 공식 입장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Posted by WYW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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