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민영화는 실수였다

2050년 시작된 파업으로 우리나라는 위기에 처했다.

2020년 2월 3일

 

맥스 브룩스(Max Brooks)

 

편집자 주: 이 글은 SF작가, 미래학자, 철학자, 과학자들이 5년, 10년, 50년, 나아가 200년 후 우리가 읽으리라 상상하며 쓴 칼럼을 소개하는 “미래로부터 온 칼럼” 시리즈 중 하나다. 이들이 예측하는 과제는 현재로서는 상상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오늘날 시급한 문제를 조명하여 내일을 준비하게 할 것이다. 아래 오피니언 기사는 픽션이다. (각주는 모두 옮긴이의 주이다)

 

미군이 파업 중이다. 특히 지금과 같은 시기에 미국과 계약을 맺은 군인들이 무턱대고 임무를 저버린다는 것은 믿기 힘든 일이다. 계약 협상이 3개월 째 지연되는 가운데, 전 세계는 분열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분열된 왕실이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을 벌이고 있다. 북한에서는 김씨 왕조를 무너뜨린 쿠데타가 핵무기의 위협을 동반한 내전으로 치닫고 있다. 캐나다에서는 중-러 평화유지군이 퀘백에서의 철수를 공개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최근의 이런 위기로 인해 최소 4개로 확인된 기계화 보병대대와 1개 완전무장 사이클론 여단이 워싱턴 D.C.를 초음속 사정거리 안에 두게 되었다. 이 와중에 미군 기지는 폐쇄되었고 미군 함선은 항구로 복귀하였으며 미군 항공기는 비행을 멈추었다. 심지어 국가 방위의 핵심인 미군의 공동 사이버스페이스망조차 “일시적으로 사용할 수 없음” 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동안 망운영자들은 자택에서 임금인상, 노동시간, 휴가일수, 그리고 무국적 시민 자격으로 전쟁 범죄 뿐 아니라 미국 법률에 의한 모든 범죄행위로부터의 면책 소식이 들려오기만 기다리고 있다.

 

옛날 군대였다면 이런 행위는 반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반란”이라고 하려면 민간 계약자들이 아니라 정부군의 반란이어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 민간 계약자들은 바로 우리가 안보를 맡긴 이들, 즉 용병들이다. 지난 20년 동안 우리나라는 마니플사(Maniple Ltd.)의 최고 경영자부터 외국 전장의 장병들까지 이윤을 목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의 경계 아래 잠들고 있었다. 반역이란 충성 맹세를 어겼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반역자”라고 부를 수 없다. 그들은 미국 헌법을 보호하고 수호하겠다는 맹세를 결코 어긴 것이 아니다. 애초에 그런 맹세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들은 왜 이래야 하는가? 우리는 공무원이 아닌 기업 직원에 대해 말하고 있다. 직원들이 만든 노조가 합법적으로 더 넓은 범위의 복리후생를 요구한다면 우리는 당연하다 생각할 것이다. 만일 이를 탐욕이라고 여긴다면 애초에 문제를 일으킨 것은 우리의 탐욕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민영화 추진은 2032년 국방개혁법에서 시작하지 않았다. 일부의 주장처럼 2001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쇼핑몰로 가라”라는 연설에서 시작된 것도 아니다.[1] 미국인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 국가 수호자의 역할에서 서서히 물러났으며, 역설적이게도 이 후퇴는 정확히 한 세기 전에 이루어졌다는 냉정하고 냉혹한 진실을 보아야 한다.

 

1950년 1차 한국전쟁 동안, 우리는 혁명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 즉 전쟁채권과 결별했다. 그 이전까지 모든 미국시민은 국방채권을 사서 국방에 기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당신이 아직 중국어가 아닌 오픈 소스 검색엔진에 접근할 수 있다면 “2차 세계대전 채권 모금 운동”을 검색해 보라(나는 여전히 퀘존이나 웰렌버그를 신뢰한다). 다양한 유명인사들이 국가 안보에 투자하라고 대중을 규합하는 많은 동영상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전쟁 중에 이런 투자는 더 큰 대의와 개인과의 연관과 함께 종말을 맞았다. 그리고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1970년대 징병제 폐지는 당시로서 좋은 생각으로 여겨졌을지 모른다. 베트남 전쟁은 우리 사회를 갈기갈기 찢어놓았고, 지금까지도 메워지지 않는 문화적 균열을 만들어 냈다. 부유한 중산층(우리가 언제 중산층이었는지 기억해 보라) 아이들은 어떤 위험에도 처하지 않는 반면, 가난한 아이들을 전쟁터로 내모는데 사람들은 신물이 났다. 군당국도 진정한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징병제의 위험을 피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모병제를 찬성했다.

 

전문적인 전사 계급을 만드는 것이 확실한 해결책으로 보였겠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그것은 사회 전체가 끝없는 전쟁에 소모할 고립된 공동체를 만들어 낸 셈이다. 이들은 더 이상 우리의 아들, 아버지, 친구가 아니었다. 이들은 영화나 공항에서 가끔 볼 수 있는 우리와는 먼 수퍼히어로였다. 우리는 그들에게 “당신의 봉사에 감사드린다”고 말했을지 모르지만, 진짜 의미는 “내가 하기 싫은 일에는 나보다 네가 더 낫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낭비하고 잇따른 분쟁에 투입했다. 9/11 테러 이후 거의 20년 동안 미군은 전 세계 최소 일곱 곳의 주요 격전지에 투입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곱 곳이라니! 당시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사람이 있었는가?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관심을 가졌는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슬픔에 잠긴 전쟁 미망인에게 남편이 “무슨 일이 생길지 알고 입대했다”고 말했을 때, 그는 우리 모두가 느낀 감정을 대변한 것은 아니었는가?[2]

 

2020년대 후반, 민영화가 얼마나 매력적으로 보였는지 이제는 쉽게 알 수 있다. 입대자 수는 감소했다. 자살률은 높아졌다. 심지어 끔찍할 정도의 교육과 영양 섭취 기준 탓에 미국 청년 전체의 71%가 군 복무에 부적합하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사정이 이러한데 모병제를 계속 고집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정부가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 정부가 문제다”라고 공표했던 1980년대 초부터 민영화는 시작됐다. 이러한 철학은 1990년대 빌 클린턴 대통령이 “큰 정부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하면서 더욱 힘을 얻었다.

전 국민이 자기애에 빠졌는데 세기를 뒤바꾼 모든 혁신이 지금의 사태와 전혀 관련이 없었다고 볼 수 있는가?  나와 같이 나이든 X세대 일부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 석유 전쟁 시기에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가 대체 에너지를 소리 높여 요구하고 있을 때, 우리가 들은 것이라곤 스티브 잡스가 휴대폰으로 드라마 <더 오피스 The Office>를 본다며 자랑하던 일 뿐이었다. 

 

모두가 세금 절감과 이윤 극대화에 몰두하는 마당에, 교육부, 농업부, 교정국 민영화에 이어 국방이라는 거대 기업이 다음 순서임은 당연해 보인다. 이는 밀러 대통령의 “두 마리 새”라는 주장 이후 더욱 분명해 졌다. 무엇보다 군인이 없어진다는 것은 재향군인이 없어진다는 것을 뜻했고, 이는 곧 보훈부(Department of Veterans Affairs)도 없어진다는 의미였다. 국가 재정의 관점과 정서적 관점 모두에서 보기에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참전용사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는 대신 죄책감을 외주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국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다.

 

불과 25년 전만해도 이런 느낌이었다. 더 이상 “공공 방어”에 대한 의무도, 부양도 필요없다고 말이다. 이제 다른 누군가가 우리의 행복과 안전을 지켜줄 어떤 고통도 감당할 수 있으니 우리가 할 일은 “기도”하고 “자녀를 안아주며” “경제에 참여”하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우리는 국가에 대한 의무를 “나는 우리 군대를 지지합니다”거나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라는 범퍼 스티커 크기만큼 줄여버렸다.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되었는지,

그리고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라.

 

이렇게 말하면 미국인이냐고 되물을지 모르지만 빠른 해결책은 없다. 물론 용병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단기 해법 같은 것은 있다.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 칼은 손에 쥐어주고 몸값은 지불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칼을 내려 놓는 것보다 더 안 좋은 일, 즉 그 칼을 우리에게 겨누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여러 국가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베네수엘라, 서콩고(West Congo),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한 때 아랍에미리트 “연합”으로 불렸던 곳에서 그랬다. 이 모든 나라에서 살인청부업자들은 은행의 지시에 따라 일하느니 은행을 소유하는 것이 더 이익이라 판단했다. 미국에서 이런 일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그리고 민간 계약자들이 손바닥 뒤집듯 고용주를 바꾸는 일을 막으려면 무엇을 해야하는가?

 

고용주가 바뀌는 일은 우리는 이미 목격했다. 2019년, 블랙워터의 설립자 에릭 프린스가 자신의 전투수행력을 중국에 판매했다.[3] 2031년, 중국은 우리가 소비하는 거의 모든 옥수수와 대두 종자권을 가진 몬산토를 계열사로 둔 바이엘을 인수하여 대만발 불안을 부추켰다.[4] 당장이라도 지금의 미국 용병 파업은 중국-러시아가 매니플을 인수하겠다고 나선다면 불난 곳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 될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의 적은 우리 군대와 싸울 필요가 없어진다. 우리 군대를 합법적으로 소유하게 되니까 말이다.

 

이것이 우리의 새로운 정상상태인가? 모든 계약협상이 파업, 쿠데타, 또는 최고입찰자에 대한 배신을 위협하는 과정이 될 것인가? 그럴지 모른다. 아마도. 우리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급여를 지급하길 멈추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시작하지 않는 한 말이다. 그렇다면 다시 징병제로 돌아가자는 말인가? 물론 아니다. 오늘날 전쟁은 방아쇠를 당길 군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고도로 훈련되고 전문화된 전사가 필요하지만, 이들에게는 범퍼 스티커 이상의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하다. 

 

우리는 전쟁채권과 전쟁세를 다시 도입해야 하며, 우리 아이들에게 자신들보다 더 위대한 것의 일부라는 것을 몸이 기억할 수 있도록 국가 봉사와 같은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혁신 분야는 그저 편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을 더 낫게 만드는 독창성에 노력을 기울이도록 해야 한다. 그러한 독창성을 구축하기 위해 이윤을 조금 줄여야 한다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미국이 미국의 기업을 보호한다면, 미국 기업도 미국을 보호해야 한다.

 

끝으로 우리는 개인화된 모바일 화면에서 <더 오피스> 다시보기보다 더 많은 것을 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배워 필요한 갈등과 언제든지 발생할 갈등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전쟁을 막는 최선의 방법은 전쟁이 일어나는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야 전쟁은 덜 일어나고, 동료 시민들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거는 위험에 나설 때란 모든 선택지가 사라졌을 때라는 것을 우리도 알고 그들도 알아야 한다는 확신을 줄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혁명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는 아마 진화에 더 가까울 것이다. 결국 지금 우리가 빠진 무덤을 파는 데 한 세기가 걸렸고, 이 무덤에서 빠져나오는데 또 한 세기가 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권자, 납세자, 이웃, 부모로서 오늘부터 시작한다면, 내일을 구할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맥스 브룩스는 『월드워 Z』와 곧 출간될 『데몰리션』의 저자이다. 또한 웨스트포인트 현대전쟁연구소의 비상임 선임연구원이기도 하다.


[1] 2001년 9/11 테러 직후 조지 부시 대통령은 국민에게 희생보다 쇼핑을 독려했다. “플로리다 디즈니월드로 갑시다. 가족들과 함께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인생을 즐기십시오”라는 발언이 그것이다. 이는 신용에 기반한 과잉 소비를 부추겨 이라크전의 총사령관인 부시 자신에 대한 불만을 막으려 했다는 정치적 해석을 낳았다.

 

[2] 2017년 서아프리카 니제르에 벌어진 IS와의 전투에서 사망한 라 데이비드 존슨 병장의 미망인에게 트럼프은 “그는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입대했겠지만, 그래도 가슴 아픈 일”이라며 전화를 했다. 트럼프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당시 미망인과 동승했던 민주당 의원이 사실임을 주장하며 진실 공방이 벌어졌다.

 

[3] 2015년 5월, 홍콩에 본사를 둔 프런티어서비시스그룹(FSG) 회장 에릭 프린스는 아프리카 내전 지역에 진출한 중국기업을 보호할 용병 투입 계약을 중국과 맺었다. 이 기업의 가장 큰 후원자는 중국 최대 국영업체 시틱그룹이다. 그러나 미군 네이비실 장교 출신이었던 에릭 프린스는 1997년 2009년 매각 때까지 미정부로부터 총 20억 달러에 달하는 계약을 따낸 용벙회사 “블랙워터”의 설립자였다. 블랙워터는 9/11 직후 최대 매출을 기록헀다. 

 

[4] 지금도 바이엘(Bayer) 그룹은 중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국가에 현지법인을 두고 있다. 중국과 긴장관계에 있는 대만에도 바이엘 현지법인이 있다. 저자는 중국이 바이엘사를 인수하면 친미 관계를 유지하던 대만으로부터 미국을 위협할 수 있다는 가정으로 쓴 것이다.

 

※ 원문은 <The New York Times> 2019년 2월 3일자 "An Op-Ed From The Future"에 실린 칼럼입니다.

Posted by WYWH

2003 Edition New Preface

 

Todd Gitlin 2003 preface

Todd Gitlin(1980/2003), The Whole World Is Watching,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3년판 서문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 the Whole World is Watching』는 내가 쓰라린 불일치의 감정, 즉 잘못 알고 있었다는 충격을 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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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링크의 문서는 Todd Gitlin(1980), <The Whole World Is Watching>, 2003 edition, University California Press.의 New Preface를 번역한 글입니다.

번역본의 모든 주는 옮긴이가 쓴 것이며 저자의 주는 [원주]로 표기했습니다.

 

Posted by WYWH

두 건의 기사가 있다. 한 기사의 제목은  <문어의 지능, 강아지만큼 높다>는 생물학 관련 기사이고, 다른 하나는 <후쿠시마 앞바다 문어에서 방사능 발견>이라는 환경 오염 기사다. 두 기사 중 어떤 기사가 더 많은 독자의 클릭을 받을지 예측하는 인공지능을 만든다고 가정하자. 인공지능에게 이런 명령을 내린다. 첫째, 두 기사의 제목에 포함된 단어, 본문 글자수, 사진이나 그래픽 등 이미지, 기자 이름, 기사 작성 시간 등을 숫자와 벡터로 변환하라. 둘째, 숫자와 벡터로 변환된 두 기사 중 어떤 기사를 독자들이 더 오래 보고 많이 볼 지 예측하라. 셋째, 기사를 포털 뉴스에 올려서 예측이 맞았는지 확인하라. 인공지능이 ‘똑똑한 문어’보다 ‘방사능 문어’가 더 많은 조회수와 체류시간을 얻을 것이라 예측했고 그것이 맞았다면, 이후에는 ‘똑똑한 갑오징어’가 아니라 ‘방사능 갑오징어’ 기사를 추천할 것이다.

 

너무 단순한 설명일지 모르지만 방사능 문어가 더 좋은 기사라고 추천하는 알고리즘은 네이버 포털 뉴스 서비스의 자랑인 인공지능 AiRS다. 개발자들은 AiRS가 위와 같이 학습하는 과정을 심층신경망(Deep Neural Network) 학습이라고 불렀다.[주1] 우연인지 몰라도 AiRS의 학습 과정은 오랫동안 생물학에서 당연하게 여겨온 생물체의 신경계 원리와 상당히 유사하다. 

 

인공지능은 인간이 작성한 기사 두 개를 전달받아 이를 숫자와 벡터로 변환한다. 방사능 문어든, 똑똑한 문어든,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인공지능은 단지 자기가 처리할 수 있는 신호로 받아든 문자와 이미지를 변환한다. 생명체의 기본적인 반응도 다르지 않다. 빛이나 소리 등 외부 자극이 감각기관으로 전달되면 이를 신체 내부에서 전달할 신호로 바꾼다. 인공지능은 이렇게 바뀐 신호로 자신에게 주어진 명령, 즉 더 많이 보고 오래 볼 기사를 선택한다. 생명체 또한 감각기관에서 변환되어 전달받은 신호에 대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선택한다. 이 선택의 장소가 바로 신경계, 인간에게는 뇌라는 기관이다. 동해 경포대 바다의 해파리가 여러분의 종아리를 쏜 것도 다 해파리의 신경계가 내린 명령 때문이다. 인공지능도 다르지 않다. 다만 침을 쏘지는 않고 ‘방사능 문어'라는 기사를 독자의 네이버 앱 화면에 노출시켜 불안감을 주는 정도다.

 

더 단순하게 말하면 네이버 뉴스 추천 알고리즘이 마치 생물체, 정확히 말해 높은 지능을 가진 척추동물의 신경계처럼 학습하고 작동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지렁이를 연상시킨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조상님의 말씀은 자극을 받으면 반응한다는 신경계의 원리를 꿰뚫어 보신 통찰이었던 것이다. 밟으면 꿈틀하는 지렁이는 생물학과 심리학에서 오랫동안 전제로 삼아온 신경계의 작동원리였다. 이러한 자극-반응 모델은 단순하지만 강력했는데, 그 이유는 예전 고등학교 선생님들이 잘 아셨다. 대입 모의고사 한 과목에서 틀리는 문제 수 만큼 맞아야 한다는 자극을 우리에게 전달하면 성적이 오르기는 했으니까. 우리는 시속 50Km로 야구배트가 엉덩이 근육을 자극하면 온 몸이 꿈틀대며 반응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구 역사상 가장 똑똑하다는 호모 사피엔스에게 무려 1천억 개에 달하는 뉴런(neuron)으로 구성된 신경계가 생긴 이유를 야구배트를 맞고 꿈틀대기 위해서라고 말하면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 밟으면 꿈틀하는 지렁이와 맞으면 꿈틀대는 호모 사피엔스 사이에 차이가 없다면 4억 년 전 바다에서 육지로 나올 이유가 없었으니 말이다. 

 

다행히 이 책의 저자인 고프리스미스는 아주 공평하게 지렁이와 호모 사피엔스의 신경계가 자극-반응만을 위해 진화하지는 않았다고 말하며 그 예로 해파리를 든다. 조금 전 경포대에서 여러분의 종아리를 쏘았던 해파리를 찾아보자.

 

노무라입깃해파리

 

해파리에게도 자극-반응의 신경계가 있다. 사진 오른쪽 둥그런 풍선 같은 부위에는 수면에서 들어오는 빛을 탐지하여 신체 내부의 리듬과 호르몬을 조절하는 신경계가 있다. 그런데 왼쪽에 동충하초처럼 무성한 촉수에는 또 다른 신경계가 있다. 이 신경계는 수십 개에 달하는 촉수의 움직을 통제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여기서는 자극에 따른 반응이 아니라 먹이를 먹거나 수중을 이동하거나 여러분의 종아리를 만났을 때 침을 쏘도록 촉수들을 통제한다. 이 신경계는 8인승 조정경기에서 뱃머리에 앉아 배의 방향과 속도를 보면서 노를 잡은 선수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키잡이(coax)에 비유할 수 있다. 

 

해파리 촉수의 신경계는 ‘행동 형성’을 위해 진화된 신경계로 자극-반응의 신경계와는 다르다. 우리에게도 이런 신경계가 있다. 시속 50Km의 야구배트가 주는 자극이 선생님의 분노와 팔뚝이라는 ‘외부’에서 온다면, 열 몇 대 맞은 후 점심 시간이 되어 밀려오는 배고픔은 ‘내부’에서 내리는 명령이다. 이 명령은 절대적이어서 얼얼한 엉덩이의 고통을 이겨내며 식당으로 이동하도록 다리와 허리 근육을 움직이게 한다.

 

꿈틀대는 지렁이와 동급일 수 있었던 호모 사피엔스는 이 해파리와의 비교에서 확실한 차이를 보인다. 4억 년 전 최초의 수륙양용 생물체가 육지로 올라왔을 때 가지고 있었던 척추는 어류, 조류, 파충류, 포유류 등 다양한 척추동물에서 진화하며 놀라운 기적을 이루었다. 행동 형성을 위한 신경계가 척추 산맥을 등반하여 자극-반응의 신경계와 만났던 것이다. 이런 만남의 장소가 바로 ‘뇌’가 되었다. 각종 감각기관에서 오는 자극을 신호로 바꾸고 중추신경계로 연결된 신체 곳곳의 신경계에 행동을 명령하는 뇌가 바로 호모 사피엔스를 만들어 냈다. 아래 그림과 같은 신경계를 ‘중앙화된 신경계’라고 한다.

 

여러분과 나의 신경계


신경다발이 신체 가운데 축을 중심으로 나무가지처럼 퍼져 있고 한 쪽 끝에 뇌가 있는 신경계 구조에는 큰 뇌가 필요하다. 뇌는 자극-반응의 기능 뿐 아니라 행동 형성을 위해 명령을 내리는 신경계의 컨트롤 타워와 같다. 우리는 이와 유사한 신경계 구조를 가진 유인원, 코끼리, 돌고래, 까마귀 등 척추동물의 뇌 용량이나 뉴런 개수를 따지며 호모 사피엔스의 우월함에 빠져든다. 하지만 우리와 같은 호모 사피엔스인 고프리스미스는 척추 뿐 아니라 딱히 뼈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없는 문어의 신경계를 보여주며 그런 우월함의 근거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문어의 신경계

 

위 그림처럼 문어는 양쪽에 약 1억 2천만 개의 뉴런을 가진 시엽(optic lobes) 신경계, 척추동물의 뇌와 유사한 기능을 하며 중앙에 위치한 약 5천만 개의 뉴런을 가진 신경계, 한 개에 약 4천만 개(3억 2천만 개)의 뉴런을 가진 팔 신경계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종마다 다르지만 문어는 약 5억 개의 뉴런을 갖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무척추동물의 뉴런은 다수의 ‘신경절’(ganglion)로 구성되는데, 위 그림의 팔 신경계에 교차점이 여기에 해당한다. 두족류의 조상은 신경절만 가졌으나 진화를 거치며 몸의 상단에 집중된 신경절은 뇌에 가까운 형태를 갖추었다. 하지만 문어의 팔 여덟 개의 뉴런을 모두 합치면 뇌보다 많을 뿐 아니라, 각 팔은 독자적인 촉각, 후각, 미각 신경계를 갖고 있다. 팔에 붙은  빨판 하나에만 10만 개의 뉴런이 있을 정도니까. 뇌를 컴퓨터 CPU에 비유하며 중앙화된 신경계를 당연히 여기는 우리 사고로는 이해하기 힘든 구조다. 문어도 CPU와 같은 뇌가 있지만 여덟 개의 팔이나 입은 더 작은 뇌(신경절)들을 갖고 있다. 

 

따라서 문어의 여덟 개 팔은 각각의 국지화된 통제(미세조정)를 내리는 신경계와 몸의 상단에 위치한 신경계의 하향식 통제(중앙통제)를 함께 받을 수 있다. 문어의 팔을 ‘다리’라고 부르며 잘려진 다리가 꿈틀대는 것을 보고 징그럽다고 말하는 호모 사피엔스에게는 이해하기 힘들 수 밖에 없다. 호모 사피엔스는 돌멩이를 깨뜨려 망치를 만들 때부터 이렇게 이해하기 힘든 존재들을 터부시하거나 악령으로 여겨왔다. 2021년에도 이런 습관은 여전하다. 다만 아래 그림처럼 상상력이 조금 더 발휘될 뿐이다.

 

Dr. Octopus in Spider Man: No Way Home

 

문어의 눈으로 보면 호모 사피엔스나 척추동물은 답답하기 그지 없는 생명체다. 일정한 각도 안에서만 움직이는 관절로 구성된 신체는 전혀 자유롭지 않으니까. 게다가 척추동물의 팔과 다리는 알아서 움직이지도 않는다. 눈으로는 상어가 다가오는지 감시하면서 여덜 개의 팔이 알아서 움직이며 먹이를 찾을 수 있는 문어는 우리가 생각하는 뇌와 신체의 구분을 넘어선 생명체다. 중앙화된 신경계를 진화의 최종 단계라 여기는 호모 사피엔스가 자신과 유사한 기능을 갖춘 인공지능을 만들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 인공지능 학습을 신경 학습에 비유하는 것은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에게 지나친 걱정이나 그릇된 오해를 부를 수 있다. 

 

앞서 말한 네이버 뉴스서비스의 인공지능 AiRS를 다시 보자. AiRS가 뇌와 같은 신경계라면 1분에 수백 개의 기사가 쏟아지는 ‘자극’에 반응해야 한다.  AiRS는 독자들이 많이 클릭하고 오래 볼 기사를 예측하고 추천하여 예측 능력을 계속 향상시킨다. 그런데 AiRS가 독자의 모바일 앱 화면에 기사를 노출하는 결과값, 즉 기사 추천을 과연 ‘행동’라고 부를 수 있을까? 5억 4,200만 년 전인 캄프리아기에 나타난 원시 생명체의 뇌조차 자극을 인지하고 근육에 신호를 주어 반응할 뿐 아니라 신체 각 기관이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행동을 조율했다. 하지만 AiRS가 받는 수 천 개의 기사라는 자극은 천차만별의 역량을 가진 기자들이 쓴 행동의 결과다. AiRS가 이 자극을 받아 독자들이 많이, 그리고 오래 볼 기사를 선택하는 것은 반응에 가깝다. 물론 개발자는 AiRS가 학습을 많이 할수록 높은 조회수를 얻을 기사를 더 잘 추천하여 노출한 결과를 행동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그러나 이 행동이 또 다른 학습을 위한 자극이 되려면 독자는 기사를 클릭해야 하고 몇 초라도 읽어야 한다. 굳이 비유를 하면 AiRS라는 인공지능 뇌는 독자라는 근육에 ‘이런 행동을 하면 어떻겠니?’라는 신호를 보낼 뿐, 클릭하는 근육은 인공지능의 것이 아니라 독자라는 사람의 눈, 뇌, 그리고 손이다. 

 

이렇게 보면 인공지능의 신경 학습이란 가장 초보적인 신경계의 기능, 즉 자극-반응 모델에만 국한된다. 게다가 학습을 위해 다시 받게 되는 자극은 인공지능이 수행한 행동이 아니라 몇천 만 명의 독자가 각자 수행한 뉴스 클릭과 읽기라는 행동의 결과다. 그것도 인공지능보다 훨씬 똑똑한 뇌가 내린 행동 명령이기도 하다. 그래서 AiRS와 같은 인공지능을 설명할 때 인간의 뇌와 신경계에 비유하는 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설명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신경계를 모방했다고 하는 인공지능은 때로 문어나 지렁이보다 더 멍청할 수 있다. 무엇보다 자신이 받아들이는 자극이 자신이 보인 반응의 결과인지, 자극을 준 인간의 행동이 자기로부터 얼마나 영향을 받은 것인지 당최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의 행동으로 발생한 외부의 변화(자극)와 그렇지 않은 변화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은 경험과 의식에서 매우 중요하다. 문어가 인공지능보다 더 똑똑하다는 의미는 인공지능보다 월드컵 경기의 승무패를 정확히 맞출 확률이 높다는 뜻이 아니다. 문어는 인공지능과는 전혀 다른 경험을, 그리하여 의식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질문이 나온다. 대체 경험이란, 그리고 의식이란 무엇인가?

 

To be continued

 

[주1] 유봉석, 최재호, 최창렬(2020), “네이버 뉴스 알고리즘은 이렇다”, <관훈저널> 2020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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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더 마인드] 영어판 표지

Peter Godfrey-Smith, 김수빈 옮김(2019), 『아더 마인즈: 문어, 바다, 그리고 의식의 기원』, 서울: 이김

 

문어 한 마리가 표지에 그려진 책이 한 권 있다.  「문어, 바다, 그리고 의식의 기원」이라는 부제만으로는 내용을 짐작하기 어렵다. 문어에 조금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독일대표팀의 승패를 예언했다는 ‘파울’(Paul)을 떠올릴 수 있겠다. 문어의 지능을 이야기하는 책이라면 생물학 대중서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바다’라는 단어는 기후나 생태 위기에 대한 경고를 연상시킨다. 그런데 갑자기 ‘의식’이 나온다. 세 단어의 연관도 아리송한데, 저자 소개를 보면 더 난감하다. 생물철학과 정신철학 전공자라니. 민트초코치킨만큼이나 짐작이 안되는 분야다. 

 

민트초코치킨 같은 분야를 전공한 저자는 피터 고프리스미스(Peter Godfrey-Smith)이며 문어를 표지에 넣은 그의 책은 『아더 마인즈(Other Minds)』이다. 이런 책을 읽기로 작정하는 사람은 두 유형 밖에 없겠다. 저자의 ‘명성’을 잘 아는 민트초코치킨 전공자이거나, 아니면 과감하게 민트초코치킨 맛을 보겠다고 덤비는 무모한 야식 중독자다. 어떤 경우든 일찌감치 수학과 담을 쌓은 내 친구와는 다른 사람일 것이다. 

 

과장이 아니다. 이 책은 절대로 대중서가 아니다. 표지에 그려진 문어에 속으면 안 된다. 저자인 고프리스미스는 호주 동부 해안에서 스쿠버다이빙을 하며 찍은 문어와 대왕갑오징어 사진을 보여주고 절대 어려운 얘기가 아니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럴 때는 그냥 스쿠버다이빙만 가르쳐 달라고 하면 된다.

 

그래서 이 책은 호주 동부 해변에서 스쿠버다이빙을 배우기보다 “민트초코치킨 정도는 아니지만 나도 통닭이나 오골계 정도는 안다”는 사람들이 읽으면 좋은 책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진화생물학, 해양생물학, 신경과학, 고생물학을 오가며 수시로 지각, 감각, 경험과 의식이란 대체 무엇인지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철학으로 답한다. 그래서 이 책의 서평 또한 저자에 대한 복수의 심정으로 내가 그나마 조금 안다는 커뮤니케이션 이론과 대조하며 쓰려 한다. 그러니까 이 서평은 새벽 1시 쯤에 잘못 배달된 민트초코치킨을 오골계 백숙이라 생각하며 억지로 먹어본 경험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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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불교, 천주교와 같은 종교보다 2022년 한국에는 더 강력한 종교가 있다. 정치와 언론, 정확히 말해 제왕적 대통령과 공정 언론이라는 종교다.

제왕적 대통령과 공정 언론은 시민이 바라는 이상적이며 완성된 정치와 언론의 상이다. 마치 종교가 억압받는 이들에게 천국의 완벽한 삶을 약속하듯, 제왕적 대통령과 공정 언론은 현실의 정치와 언론이 닿아야 할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다.

87년 민주화 이후 독재에 맞선 영웅 신화와 고착화된 거대 양당 체제는 대통령을 민중(people), 또는 시민(citizen)의 열망을 투영하는 인격체로 만들었다. 김대중과 노무현은 서로 다른 열망을 반영했다. 김대중은 박정희 정권에 맞섰던 민중의 항거가 낳은 정권교체의 상징이, 노무현은 신군부에 맞섰던 87년 민주항쟁으로 탄생한 시민의 열망이 투영되고 좌절된 상징이었다. 박정희와 박근혜는 어떠했는가. 이들의 독재와 불통은 ‘한강의 기적'을 만든 제왕의 혈통에 대한 숭배에서 얼마든지 눈감을 수 있는 흠결이었다. 이들의 적통을 잇는다는 두 정당은 이 인격체를 수호하고 재생산하는 폐쇄적인 정치 단위가 되었다.

대통령을 향해 시민의 열망을 투영하는 경로가 바로 언론이다. 이 열망의 투영은 두 가지 방향으로 작동한다. 한 축은 ‘사실에 근거하여' 자신들이 지지하는 대통령의 편을 드는 언론이며, 다른 한 축은 양당체제에서 대통령 선거를 놓고 경쟁하는 정당을 적으로 만드는 언론이다. ‘우리와 그들'이라는 구도에서 공정 언론은 두 정당, 두 후보에 대한 정파적 균형을 뜻한다. 우리 편의 잘못 만큼 그들의 잘못도 지적해야 한다. 우리에 대해 비판하는 언론은 그들 편을 드는 언론으로 사라져야 할 절대 악이다.

다수 언론은 이러한 정파적 열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어떤 언론은 자신이 ‘공정 언론'이라는 종교의 전도사가 되기를 서슴지 않는다. 공정 언론이라는 낙원은 발 딛고 선 땅이 ‘기울어진 운동장’이라 한탄하는 근거가 된다. 이들을 위한 예배당이 바로 ‘합리적 의혹'과 ‘가려진 진실'을 밝히겠다는 TV와 유튜브 채널들이다.

유튜브 채널 &lt;전광훈 TV&gt; [국민혁명당 LIVE] 화면 캡쳐


“마귀들과 싸울지라 죄악 벗은 형제여. 담대하게 싸울지라 저기 악한 적병과…” 같은 찬송, 문서와 사진을 흔들며 의혹이 진실임을 주장하는 간증, 그리고 악마를 향한 분노의 설교에 ‘아멘'으로 화답하고, 수퍼챗으로 헌금을 내면 예배가 끝난다. 반복되는 일상과 회사에 갇힌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는 이 예배당에서 신도와의 친교로 맺어지고 공정 언론을 향한 십자군을 결성하기도 한다.

예배당을 나온 신도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도 신도가 아닌 사람들, 그러니까 대통령 선거결과가 월세값 인상보다 의미가 없는 사람들, 공정 언론보다 감염병과 산업재해 대책 보도가 더 필요한 사람들은 결코 눈에 보이지 않는다. 행여 이런 사람을 만나면 ‘전도'에 나서기도 한다.

‘기울어진 운동장’은 환상이 아니라 공정 언론과 제왕적 대통령을 위한 제단이다. 제단이 없으면 제사장도, 신도도 없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바라는 기도문은 그렇지 못한 정치와 언론에 대한 비판으로, 예컨대 시민의 열망을 온전히 담은 인격체의 창출과 공정 언론을 위한 대책으로 나아간다. 진보 종편의 꿈은 더 큰 예배당을 향한 소망이지만, 개척교회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은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다.

제왕적 대통령과 공정 언론이라는 낙원으로 현실을 비판하는 신앙은 그 낙원을 꿈꾸게 한 현실의 실상을 잊게 만든다. 제왕적 대통령제가 과연 당연한 것인지, 이를 배출할 굳건한 양당체제가 정말 시민의 넓은 정치적 지향을 대의하는지 묻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정치 세력에게 ‘공정’은 무엇인지, 왜 언론은 표면적이고 선정적이며 인용이 쉬운 기사만을 쏟아내는지, 그럼에도 이들이 여전히 수익을 낼 수 있는 구조는 무엇인지도 묻지 않는다.

분명히 제왕적 대통령과 공정언론이라는 종교는 사람들, 특히 신도들에게 평안을 안겨준다. 이룰 수 없는 꿈이라도, 우유부단한 대통령과 편파적인 언론에 받은 상처의 진통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통제의 약효는 오래가지 않고, 더 많은 투여량이 필요해 진다.

정말 필요한 것은 정치와 언론이라는 종교가 만들어진 현실의 개혁이다. 양당체제와 제왕적 대통령 권한의 해체, ‘매체 영향력’이라는 무형 자산으로 수익을 내는 뉴스 콘텐츠 시장의 재편, 자본가 유한계급의 대리 여가를 수행하는 부속품으로 전락한 언론의 지배구조 개혁이 그것이다. 제왕적 대통령과 공정 언론을 숭배하는 신앙은 바로 이런 개혁의 가장 큰 장애물이다.

마르크스가 말했듯 “천상의 비판은 지상의 비판으로, 종교의 비판은 법의 비판으로, 신학의 비판은 정치의 비판으로 전환"(헤겔 법철학의 비판을 위하여)되어야 할 때, 비판은 어떤 행위인지 다시 고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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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후보 두 명의 유튜브 경제전문채널 출연이 화제다. 대선 국면 언론의 역할을 유튜브 채널이 했다는 평가- “3PRO TV가 나라를 구했다” 등 -는 유튜브 이용자 뿐 아니라 지상파 방송 종사자들에게서도 나오고 있다. 기존 언론에서 볼 수 없었던 선거 콘텐츠라는 우호적인 평가에는 관행적이고 경직된 방송사 토론과 달라지지 않은 대선 보도에 대한 비판이 깔려있다. 그러나 3PRO TV의 대선후보 특집을 기존 언론과 비교할 때, 유튜브 포맷이나 ‘이용자 중심’이라는 표면의 차이에만 주목할 수 없다. 

 

3PRO TV 채널 캡처

 

토론이 아닌 인터뷰

3PRO TV의 대선 특집은 말 그대로 ‘특집 인터뷰’이지 방송 토론이 아니었다. 미리 전달한 질문을 두 명의 후보가 따로 녹화하여 편집한 콘텐츠다. 공직선거법 등 각종 법령과 규칙 제한을 받는 TV 방송 토론에서는 이런 질문과 답변 시간이 불가능하다. 뉴스 프로그램 내 인터뷰 편성도 정당과 캠프의 공정성 항의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럼에도 주식과 부동산 같이 압축된 주제의 질문에 1시간 반 분량의 충분한 답변을 후보에게 듣는 방식은 경제에 대한 후보의 인식과 깊이를 시청자에게 체감하게 해 준다.

물론 제작 환경의 차이도 있다. 3PRO TV는 진행자 3명 이외에도 다수 제작 인력과 조직을 갖추었지만 방송사에 비할 바는 아니다. 거대 조직, 제작 규정, 질문의 사전 데스킹, 캠프와의 사전 조율에 후보 도착시 의전과 동선 설정까지(가끔은 방송사 사장님도 나오신다) 일이 커져도 너무 커진다. 방송사는 3PRO TV처럼 빠른 결정과 지시를 내릴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서로 다른 목표

유튜브와 팟캐스트 플랫폼 콘텐츠인 3PRO TV는 이번 대선 특집의 목표가 명확했다. 아침 라이브 방송의 동시 시청자가 5만 명에 이를 정도의 안정된 시청취자를 가진 이 채널은 이번 특집으로 조회수 증가는 물론 구독자와 인지도 제고라는 목표를 달성했다. 물론 이런 목표는 수익과 직결된다. 

그러나 지상파를 비롯 레거시 방송사에 대선 후보 토론회나 인터뷰의 편성 목표는 모호하다. 방송 토론은 법으로 정해진 의무이고 한 분야가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외교 등 여러 분야에 백화점식 질문을 던지면서 상호 토론 시간 등 룰(rule)도 적용해야 한다. 높은 시청률이 나와도 얻게 되는 보상은 딱히 없다. 이러다 보니 레거시 미디어의 대선 후보 콘텐츠는 후보자의 실언, 태도, 진위 여부 등 다른 언론이 보도할 아이템만을 제공하게 된다. 보도의 확산 과정에서 각 후보 캠프는 방송 토론 진행의 공정성에 대해 항의할 수도 있다. 

물론 여기에는 후보와 시청자가 정치적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여기는 각 방송사의 정체성도 작용한다. 결국 레거시 미디어의 대선 후보 토론과 인터뷰는 각 매체가 유지하고 있는 영향력 확인에만 머문다. 

 

 

중산층과 유권자

3PRO TV 대선 특집을 향한 호평에는 후보 간 상호비방이 없는 경제 문제를 다루었다는 점도 작용했다. 해외 증시 정보와 투자 상담 등을 진행하는 3PRO TV의 강점은 시청자의 정치적 지향과 무관한 공통 관심사인 증권과 부동산 등을 다루는데 있다. 국내 증시의 저평가, 다가구 양도세, 암호화폐에 대한 규제 등 한 푼이라도 재산 증식을 바라는, 그래서 눈 앞에 어른대는 중산층을 향한 욕망을 가진 이들에게 정치란 외적 변수일 뿐이다. 

그래서 3PRO TV 대선 특집에서는 후보에 대한 의혹이나 검증이 필요 없었다. 늘 듣고 보는 시청자들의 공통 관심사에 대한 질문을 후보에게 전달했을 뿐이고, 질문을 더 잘 설명하거나 답변을 확인하는 절차만을 거쳤다. 두 후보의 발언이 무겁지 않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레거시 미디어의 시청자는 다르다. TV 앞에 앉는 순간부터 후보의 한 마디 발언과 작은 몸짓까지 비교와 평가 대상이 된다. 후보에 대한 지지가 강할수록 시청자의 이런 평가는 방송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지기 쉽다. 소위 ‘부동층’이라도 서너 개에 달하는 다양한 분야에 모두 관심을 갖지는 않는다. 후보가 준비를 잘해서 전문용어를 사용하면 이해는 더 어려워진다. 

지상파 방송이나 언론인 단체(관훈클럽 등)가 제작, 또는 주최하는 토론회가 어려운 점도 이 때문이다. 불특정 다수에, 다양한 소득 차이가 있고, 사는 지역이 다른 ‘유권자’ 공통 질문이 무엇인지 찾기란 쉽지 않다. 결국 각 언론사가 보도해 온 이슈를 후보 당사자에게 직접 확인하거나 기자 자신이 궁금해 하는 질문들 밖에 던지지지 못하는 이유다. 

 

3PRO TV 댓글 중 일부

 

정치와 경제의 뚜렷한 경계

3PRO TV 대선 특집이 보여준 것은 디지털 콘텐츠의 의제 설정 능력이나 지상파의 몰락이 아니라 지극히 합리적인 개인(homo economicus)의 출현이다. 다수 구독자를 가진 유튜브 채널들이 경제가 아닌 정치, 사회, 노동, 복지, 환경, 교육을 주제로 두 후보에게 같은 형식의 인터뷰를 진행한다고 생각해 보자. 어떤 분야든 정치적 입장이 포함될 수 밖에 없다. 차별금지법, 노동자 법적 지위 확대, 기후 위기와 원전 정책, 대입과 대학 개혁 등 무엇하나 쉬운 이슈가 없다. 

그러나 경제 문제는 다르다. 언제부터인지 정치적 입장을 막론하고 우리 모두가 한 푼이라도 더 벌고 한 푼이라도 손해보지 않겠다는 합리적 개인이 되었다. 중년의 전유물인 줄 알았던 주식과 코인시장에 2030세대가 진입했고, 역대 최고 수준의 가계 부채는 아파트 값 하락을 결코 눈 뜨고 볼 수 없게 만들었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전환 문제가 그랬듯, 교육이든 취업이든 투자한 비용만큼 얻지 못하는 모든 지위는 ‘불공정’하다. 이재명을 지지하든, 윤석열을 지지하든 경제 문제는 지극히 비정치적이며 모두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정책 분야가 됐다. 

그래서 3PRO TV의 대선 특집은 좋은 기획과 콘텐츠 제작일지는 몰라도 ‘뜰 수 밖에 없는’ 분야였다. 1시간 반이나 되는 긴 인터뷰에서 각 후보가 말한 발언에 흥미를 가질 시청자들은 많았다. 그러나 주가 변동에 눈을 떼지 못하고 양도세 정책에 분노하며 코인 폭락에 한탄할 사람들만이 ‘시민’은 아니다. 두 후보의 발언이 ‘먼 나라’ 얘기로 들리는 사람도 결코 적지 않다. 다만 이들에게 두 후보 중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삶이 그닥 나아지지 않을 것이란 점은 분명하다. 가장 정치적인 콘텐츠인 경제 콘텐츠는 이렇게 비정치적이 된다. 중산층이라는 신기루를 욕망하는 이들과 그 조차 포기하는 이들의 간극은 철저히 ‘비정치적’이다.

 

 

더욱 정치적이어야 할 레거시 미디어

3PRO TV와 지상파 등 레거시 미디어를 동일한 잣대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기술적 인프라 뿐 아니라 조직과 재원 구조, 그리고 규제까지 전혀 다른 미디어이기 때문이다. 지상파 방송사에게 왜 3PRO TV와 같은 대선 특집을 못 만드냐고 묻는 것은 포병에게 기마병처럼 왜 빨리 가지 못하느랴고 다그치는 꼴이다. 유튜브 플랫폼과 실시간 본방 중심 지상파 등 레거시 미디어의 차이는 오래 전에 확인됐다. 이제는 “왜 우리는 저렇게 못하는가?”라는 자조가 아니라 서로 다른 영역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해야 할 미디어라는 인정이 더 필요하다. 

이 인정은 3PRO TV와 같이 충성스러운 합리적 개인의 집합을 가진 미디어, 지극히 ‘중립적인’ 이슈로 더 많은 구독을 끌어내는 미디어가 아니라, 대선과 같은 협소한 정치에서 벗어나 더 넓은 정치의 영역을 만들어낼 과감한 시도로 이어져야 한다. 갈등과 충돌을 두려워하지 않는 미디어. 이런 용기를 ‘사회적 책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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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 민주주의 아래 대통령, 또는 행정수반에 대한 몇 개의 인용문

 

이처럼, 헌법은 대통령에게 실제적인 권력을 부여해 주는 한편, 국민의회에게는 도덕적 힘을 보장해 주려 한다. 법 조문을 통해 도덕적 힘을 만들어 내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점은 차치해 두고라도, 헌법은 대통령이 모든 프랑스인들의 직접 선거권을 통해 선출되게 함으로써 다시 자기 자신을 폐기한다. 프랑스 전체의 투표가 국민의회의 750명의 의원들 사이에 분산되어 있는 반면, 이 경우에는 그 투표가 한 개인에게 집중된다. 각각의 개별적 인민 대표자들은 단지 이러저러한 정파, 이러저러한 도시, 이러저러한 교두보를 대표할 뿐이며, 또한 실태도 인물도 자세히 모른 채 누구든 간에 750명을 선출해야 한다는 필요를 대표할 뿐이다. 반면에 대통령은 국민에 의해 선출된 자이며, 대통령 선거 행위는 주권 인민이 4년마다 내놓는 강력한 으뜸패이다. 선출된 국민의회는 국민과 형이상학적 관계를 맺고 있지만, 선출된 대통령은 국민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 있다. 실제로 국민의회는 개별적인 대표자들을 통해 국민 정신의 다양한 측면들을 대변하고 있지만, 대통령은 이 국민정신의 화신이다. 국민의회에 비하면 대통령은 일종의 신권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인민의 은총을 입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 1869년.

 

직접 선거를 통해 행정수반을 뽑는 국가에서, 대통령 선거가 정치적 삶 전체를 결정하는 주요 선거가 되는 경향이 있다. 의회 내 다수파의 지도자가 행정수반인 국가에서는, 지도자 개인이 입법 운동과 선거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물론, 정당은 여전히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정당은 중계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과 영향력 있는 사람의 연결망, 자금 조달 능력, 그리고 활동가들의 자발적 봉사와 같은 결정적 자원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들은 지도자를 위해서 봉사하는 도구가 되는 경향이 있다. 의회 정치와는 반대로, 하원보다 정부의 수반이 전형적인 대표로 이해된다. 그러나 의회 정치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와 같이 규정한 대표자와 그를 선출한 사람 간의 연계는 본질적으로 사적인 성격을 띤다.

 

버나드 마랭, <선거는 민주적인가>, 1997년.

 

시민운동이 대통령 권력이나 행정 권력에 의존해 그 가치를 실현하려고 하면 어떻게 될까? 반대로 시민운동을 정부 운영의 동력으로 삼는다면 어떻게 될까? 어느 경우든 민주주의 발전에 긍정적인 기여를 하기 어렵다. 운동의 방법으로 통치할 수 없고, 통치의 방법으로 운동을 이끌 수 없듯이, 정부는 정부의 길이 있고 운동은 운동의 길이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문재인 대통령은 내 기대와는 아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적폐 청산과 직접 민주주의를 들고 나온 것은 민주주의를 ‘정부의 문제’가 아닌 ‘운동의 문제’로 접근하겠다는 의지로 보였다. 박근혜 정부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청와대가 중심이 되어 여론을 직접 이끌고 내각을 수직적으로 지휘하는 정부 운영방식이 재현되었다. 박근혜의 ‘보수판’ 청와대 정부와 비견될 만한 ‘진보판’ 청와대 정부의 등장으로 보였다.

 

박상훈, <청와대 정부>,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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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8. 14. 16:00

우리는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우리를 찌르는 그런 종류의 책만을 읽어야 한다고 난 생각한다. 만일 우리가 읽고 있는 책이 머리를 치는 일격으로 우리를 깨우치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 책을 무엇 때문에 읽어야 하는가? (…) 우리는 우리에게 재앙과도 같은 영향을 주는,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사랑하는 어떤 사람의 죽음처럼, 모든 이들로부터 멀리 숲속으로 추방당한 것처럼, 자살처럼, 우리를 비탄에 젖게 하는 그런 책들을 필요로 한다. 책이란 우리 내부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기 위한 도끼가 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나의 믿음이다.

카프카(F. Kafka)가 오스카 폴락에게 쓴 편지



카프카가 이 편지를 썼을 때 나이는 스물한 살이었다. 프라하의 독일계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던 시기였다. 문학에 대한 열정과 법학 박사학위 취득이라는 전혀 다른 두 언어의 공간을 왕래하던 그에게 책은 이런 의미였다. 만족을 위한 수단이 아닌 ‘머리를 치는 일격’으로 자신을 깨우치는 책, ‘우리 내부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기 위한 도끼’인 책.

카프카에게 책이 갖는 의미는 오늘날 지식인에게, 특히 한국의 지식인에게도 그러한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사회과학 분야 박사학위 소지자들로만 좁혀서 예를 들어보자. 학위 논문 심사를 받거나 심사를 할 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왜 이 주제를 택했나요?”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흔히 논문 초반에 ‘연구 배경’이나 ‘연구 목적’으로 쓰여 진다. 그러나 여기에 쓰여 지는 문장은 연구자의 내면을 드러내지는 못한다. 전공 분야의 각종 문헌과 선행연구들의 한계, 학문 장 내 논문이 차지하는 위치를 설명할 뿐이기 때문이다.

정작 특정 주제를 택하는 동기는 자신이 흥미를 가졌던 분야의 독서 이력, 자신의 성장 배경이 반영된 사적 관심사거나 때로는- 사실 이런 경우가 더 많은데 -지도교수의 선택인 경우가 부지기수다. 대학 내 위계와 형식을 따라야 하는 학위 논문의 주제 선택은 불가피하다 해도, 연구자로서의 지위를 획득한 이후에도 “왜 내가 이 주제로 글을 쓰고 발언을 해야 하는가?”라는 자문을 하지 않음이 더 심각한 문제다.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란 바로 이 질문에서 시작되며, 모든 독서와 학술 토론회는 부단히 이 질문의 답을 찾거나 질문을 바꾸어 가는 과정이다. 지식인에게 책은 카프카의 책처럼 어떤 연구를 할 것인지, 어떤 문제를 설정할 것인지 고민하는 사유를 위한 ‘도끼’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자신이 읽은 책은 이미 정해 놓은 주제의 글쓰기를 위한 ‘재료’일 뿐이며, 때로는 가설과 결론을 위한 지적 권위- 대표적으로 참고문헌 -로 사용된다.

지식인에게, 특히 인문학과 사회과학 연구자들에게 독서는 논문, 칼럼, 강연 등 자신이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는지, 어떤 행위를 해야 할지, 그 행위가 사회적으로 어떤 효과를 가져 올지 끊임없이 자문하는 과정이다. 이런 이들에게 독서량과 생산하는 텍스트의 양이 비례하기는 힘들다. 사유가 아닌 글과 발언을 하기 위한 재료로 독서를 할 때, 그 글과 발언은 자신의 신념이나 믿음, 또는 기대의 산물일 뿐이다. 그 독서조차 자신의 믿음에 확신을 주거나 찾고 싶은 답을 주는 책만을 대상으로 한다. 지식인 ‘내부의 얼어붙은 바다’는 더욱 단단해지고 그에 호응하는 독자만을 찾아 헤매는 자기만족만이 목적이 된다.

최근 언론중재법 개정안- 소위 언론보도 피해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 -을 둘러싼 학계의 행위를 단순히 찬성과 반대로 나누고 그 배경이 되는 학문적 입장만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개정안이 아니더라도 이미 문재인 정부 기간 동안 숱한 이슈와 쟁점과 관련된 학계 및 지식인들의 토론회, 세미나, 칼럼, 강연 등을 생각하면 과연 한국사회 지식인의 책무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언론개혁’, ‘허위조작 정보’(가짜뉴스), ‘언론혐오’, ‘시민의 요구’라는 추상적이고 도덕적인 용어가 난무한다. 이런 용어들은 그 자체로 사유의 대상이지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지식인은 대중의 직접적 요구의 근거와 합리성을 제공해 주는 사람이 아니라, 왜 그런 요구가 나오는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설령 징벌적 손해배상과 같이 대중의 요구와 일치하는 결론이 나오더라도 그 결론에 이르는 과정은 자신이 가졌던 개념과 이론, 그리고 입장에 대한 부단한 회의의 결과여야 하며, 그 수단이 바로 독서다. 교수나 연구원이라는 사회적 지위는 이런 독서와 사유를 위한 자율성을 주기 위한 사회적 배려이지 권위가 아니다.

분석해야 할 언론의 낮은 신뢰도나 ‘징벌’에 대한 시민의 압도적 지지를 도리어 자기주장의 근거로 삼는 이들에게 과연 지식인이라는 호칭을 붙일 수 있을지 의문이다. 토론회 기사에서 자기 발언이 얼마나 인용되었는지 확인하고, 강연 동영상의 조회수를 자랑하며, 페이스북 응원 댓글에 만족하는 이들이 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언론’이든 ‘시민’이든 지식인이 쓰고 말하는 개념은 철저한 사유의 과정이자 결과여야 한다. 미루어 두었다 최근 다 읽은 데이빗 그레이버(D. Graeber)의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은 내가 사용해 온 개념의 반성과 사유를 위한 훌륭한 안내서였다. 토론회 발표문, 칼럼, 강의 때마다 마음에 걸린 것은 마르크스의 가치(value)와 물신성(fetishism)이었다. “우리 모두가 물신성의 세계에서 산다면, 대안은 무엇인가요?”라는 학생들의 질문은 언제나 나를 망설이게 했다. 이 책은 정리하거나 인용할 ‘재료’가 아니다. 더 많은 책을 읽고, 현상을 더 넓게 볼 수 있는 사유의 수단이다.

지식인에게 독서란 바쁜 일정과 각종 업무 중 여유 있을 때 하는 행위가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다. 이 의무는 결코 ‘언론개혁’과 같은 목적을 정해 놓은 사유 과정의 결과가 될 수 없다. 개념과 범주의 열려짐을 위한 사유 과정은 그 목적지가 어디인지 정하지 않은 모험과 같다. 모험보다 안위를 고민하는 지식인의 사회, 2021년 한국 사회다.

대문에서 그가 나를 가로막으며 물었다. “어딜 가시나이까? 주인나리”, “모른다” 내가 대답했다. “그냥 여기를 떠난다. 그냥 여기를 떠난다. 그냥 여기를 떠나 내처 간다. 그래야만 나의 목표에 다다들 수 있노라.”, “그렇다면 나리의 목표를 아시고 계시는 거지요?” 그가 물었다. “그렇다.” 내가 대답했다. “내가 ‘여기를 떠난다’고 했으렸다. 그것이 나의 목표이니라.”

카프카, <돌연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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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영길 교수가 민주언론시민연합의 <언론 포커스>에 기고한 “‘언론 징벌적 손해배상제’와 합법성의 문제”는 언론개혁이라는 담론에 중요한 층위를 지적하고 있다.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은 민주당 정청래 의원의 <언론중재법> 개정안과 법무부의 상법 개정안이 제출되면서 “허위조작정보 처벌이냐, 언론의 자유냐”라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되고 있다. 물론 처벌과 자유의 이분법이 아니라 경실련, 언론개혁시민연대 등 시민단체와 학자들은 ‘가짜뉴스’의 모호함, 과잉입법의 우려, 위자료 현실화와 같은 대안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이 글은 처벌과 자유의 양자택일이나 그 중재안이 아니라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배에 찬성하는 시민의 입장- 미디어오늘에서 실시한 두 차례의 여론조사 결과로 확인된 -에 더 주목하고 있다. 과반이 넘는 찬성 여론은 고려하지 않고 징벌적 손배에 대한 현행 법체계 내 정합성이나 절충안을 제시하는 것에 그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언론의 자유와 열망의 도덕성

 

이 글은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배 찬성 여론에서 정의의 문제를 보고 있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이념이나 특정 직업군(언론인, 예술가 등)의 권리가 아닌 시민권의 하나로서 모든 시민이 평등하게 누려야 할 권리다. 이런 권리를 평범한 시민보다 주류 언론사나 기자가 더 많이 누리고 그로 인해 이익을 얻는다면 결코 정의롭지 않다. 현행법이든, 개정안이든 법에는 론 풀러가 말한 열망의 도덕성, 즉 법이란 지켜야 할 의무를 명시하려는 강제가 아니라 정의에 대한 갈망과 그것을 실현하려는 의지가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언론인 등 일부에게만 부여된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시민 또한 누려야 한다는 정의의 열망이 이번 개정안에 대한 찬성 여론으로 드러났다고 본다. 

 

이 분석은 징벌적 손배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 이분법이 아니라 언론개혁을 위한 시민의 열망이 드러난 계기로 보자는 뜻으로 읽힌다. 법안에 대한 사회적 논의과정에서 일반 시민 목소리는 없거나 무시되는 반면, 법안에 반대하는 언론 및 관련 전문가들의 목소리가 지배적이라는 불평등한 상황에 대한 지적은 중요하다.

 

그러나 법에 정의에 대한 갈망과 그것을 실현하려는 의지가 반영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대안은 될 지라도 징벌적 손배에 이입하기란 쉽지 않다. 언론개혁에 대한 시민의 열망은 여러 형태로 표현된다. 현 정권이 과제로 삼은 검찰개혁과 언론개혁은 보수 양당체제의 정치 구도에서 ‘적과 아군’이라는 담론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두 개혁 모두 그 대상의 인격화를 필요로 한다. 검찰개혁은 검사 조직과 검찰총장을, 언론개혁은 조중동과 종편 뿐 아니라 수구 집단을 대상으로 상정하고 있다. 적과 아군이라는 담론의 한계는 바로 여기에 있다. 부정해야 할 대상은 분명하지만, 앞당겨야 할 미래는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론답지 않은 언론”이라는 규정은 어느새 언론 일반에 대한 부정이 되어 버렸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언론인 등 소수에 치우쳤을 뿐 아니라 남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언론개혁을 향한 시민의 열망, 그 열망의 도덕성이 어떻게 법에 반영될지는 철저히 제도권 정치- 정확히 여의도 정치라 쓰겠다 -의 역학관계에서 왜곡되고 있다. 언론개혁의 범위는 너무도 넓다. 방송통신위원회 등 규제기관의 재구성에서 공영방송 지배구조를 거쳐 한 언론사의 저널리즘 책무까지 어떤 것을 먼저 시작해야 할지 선뜻 꼽기 어렵다. 언론개혁에 대한 시민의 열망은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의 금지, 사회적 재난에 대한 대처와 점검, 노동인권에 충실한 보도부터 종편 재승인 거부, 보수 유튜버 처벌 등 미디어의 영역을 넘어 검찰 같은 관료제에 대한 반발까지 포괄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열망이 정부여당의 법 개정안으로 구체화될 때, 시민이 원하는 언론이 무엇인지보다 처벌해야 할 언론이 무엇인지를 먼저 떠올리게 만든다. ‘열망의 도덕성’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의지가 아니라, ‘시민이 원하는 처벌의 정당성’으로 왜곡된다. 

 

언론보도 중재가 없다는 픽션적 공백

 

언론개혁은 분명히 필요하다. 그러나 언론개혁이 조선・동아・중앙・매경의 종편 재승인 거부와 한겨레・경향의 종편 승인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채영길 교수의 글처럼 이 문제를 단지 법리적 정합성이나 개정안에 대한 찬반으로 접근할 수는 없다. ‘열망의 도덕성’보다 더 타당한 개념은 차라리 아감벤(G. Agamben)이 말했던 예외상태, 그것도 정치적으로 만들어진 ‘픽션적 공백’으로서의 공백지대다. 법이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는 순간은 법체계 내 정합성이 아니라 현실에서 벌어진 사태에 그것이 적용될 때다. 법 조항의 모든 단어가 현실에 일대일로 대응할 수는 없다. 문자와 현실 사이 존재하는 공백을 해석과 판례로 메우는 것이 바로 권력이다. 그런데 때로 권력은 작동하고 있는 법이 현실을 포괄하지 못한다며 개정을 요구한다. 당연할 수 밖에 없는 법과 현실 간 공백의 경계- 법 적용의 한계 -는 지워버리고 애초에 그런 법이 존재하지 않은 예외상태로 상정하는 것이다.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배 개정안은 허술하지만 존재하며 그 작동은 미미한 언론에 대한 시민의 항의와 배상 경로를 공백지대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배 반대 의견은 시민의 항의와 정당한 요구를 거부하겠다는 집단 이기주의로 읽히고 만다. 징벌적 손배는 필요하다. 그러나 그 개정안은 지난 몇 년 간 언론중재위원회의 중재결정과 배상액, 민・형사 소송의 부족한 결과만을 놓고 정당성을 얻기는 어렵다. 시민의 피해와 항의가 왜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지, 예컨대 방송사의 시청자위원회나 언론사의 독자권익위원회 같은 곳은 왜 중재 역할을 하지 못하는지, 시민의 피해 사례와 부족했던 배상의 전례를 지적하며 시민사회단체가 적극적으로 개정안을 내놓아야 했다. 물론 이러한 형식적 절차의 부족함은 언론이 먼저 인정하고 대처했어야 할 문제다.

 

시민이 아닌 정부여당이 징벌적 손해배상 개정안을 제출한 것은 국회의원이나 장관이 언론을 통해 입은 피해 때문으로 읽히기 쉽다. 그럼에도 부정의 요구로서 제기된 언론개혁의 ‘열망’을 지지정당을 떠난 모든 국민의 요구라고 말하며 개정안의 찬반으로 진영을 가르는 행위는 지극히 협소한 정치적 행위다. 1980년대 영국의 대처 수상이 노동당 뿐 아니라 보수당까지 싸잡아 비판하며 자신의 발언이 곧 국민의 목소리임을 자처했던 ‘복화술’과 다를 바 없다.

 

채영길 교수의 글은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배 적용 여부를 법리의 문제가 아닌 그 이상의 문제와 담론의 층위로 접근하자는 주장으로 읽힌다. 징벌적 손배의 법적 문제는 이미 충분히 논의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지금 지식인과 언론인, 그리고 시민사회에 필요한 것은 징벌적 손배에 대한 찬성 여론의 퍼센트라는 숫자 너머 그 언론개혁 열망을 분석하고 구체화하는 것이다. 언론개혁은 분명히 정치적 문제다. 그러나 그 정치는 여의도 정치가 아니라 더 넓고 구체적인 정치의 영역이다. 

 

주: 이 글은 연구자, 언론인, 시민들의 논의를 풍부하게 만들기 위한 글이지, 특정 언론사가 따옴표로 인용하거나 간접 인용할 소재로 쓰지 않았음을 알립니다. 아울러 이 글은 연구자의 자격으로 쓴 것이며 제가 속한 조직이나 단체의 공식 입장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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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를 창출하는 인간의 활동은 노동이라 부를 수 있지만, 그가 노동자인지의 여부는 노동의 종속성에 달렸다. 거대한 공장이나 특정 공간의 사업장에서 수행되는 노동에 기반한 이 종속성은 노동을 지시하고 감독하며 징계할 수 있는 사용자를 전제로 한다. 노동을 수행하는 이는 사용자의 지시권한에 종속되었음을 증명할 수 있을 때, 그리고 노동의 성과와 책임은 노동과정을 구상하고 관리하는 사용자에게 귀속될 때 노동자로 인정받는다.

몇 년째 미국 캘리포니아, 영국, 프랑스에서 계속되고 있는 드라이버의 노동자 확인 소송에서 패소하고 있는 우버(Uber)는 이들이 자신들에게 종속된 노동이 아니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산업노동의 패러다임에서 노동이란 사람이 누군가에게 노동력을 팔지 않고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상대방이 제시한 불리한 노동조건에도 불구하고 계약을 맺어야 하는 관계, 즉 경제적 종속을 의미한다. 또한 사람은 노동력을 자신의 신체 및 인격과 분리하여 제공할 수 없기 때문에 노동력을 제공할 때 사용자의 지휘와 감독을 받는 인적 종속이 노동자의 여부를 결정한다.

반면 스스로 근무시간을 정하고 노동 대가를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의 노동은 독립 노동, 예컨대 자영업자의 노동으로 구분된다. 플랫폼 자본은 이러한 종속 노동과 노동자 지위에 근거하여 작업 지시는 어플리케이션과 같은 시스템에 의해 내려지며, 그 수용 여부는 노동을 제공하는 이들이 자유롭게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우버 드라이버와 같은 이들은 불리한 계약관계를 거절할 수 있으며,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노동을 제공하여 그에 따른 대가를 받기 때문에 경제적 종속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출처: https://platformlabor.net

 

플랫폼 노동의 종속된 자유

 

그러나 플랫폼 노동의 종속성은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우버 드라이버나 배달앱 라이더’(rider)처럼 어플리케이션에 의해 서비스 이용자의 요청을 접수하고 노동의 수행 여부를 결정하는 이들은 사용자에게 직접적으로 종속되어 있지 않더라도 알고리듬과 같은 정보처리 테크놀로지 플랫폼에 종속되어 있다. 플랫폼 노동자는 자신이 제공하는 서비스의 가격과 고객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 두 가지 모두 플랫폼이 설정하는 특정한 범위 안에서만 자유롭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플랫폼 노동자는 공장 노동자와 달리 특정한 근로시간과 장소에 묶여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플랫폼이 전달하는 정보 안에는 이미 시간과 장소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플랫폼 자본이 말하는 서비스 제공자의 자유로운 결정이란 이윤 창출의 극대화를 위한 알고리듬과 같은 시스템을 통해 그 범위가 제한된 종속된 자유인 셈이다. 최근 플랫폼 노동의 확산에 따라 노동법의 종속개념을 재고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플랫폼 노동을 이렇게 규정한다면, 신문과 방송이라는 미디어 노동은 그 생산물, 콘텐츠의 특징으로 인해 플랫폼 노동의 가능성을 오래 전부터 내포하고 있었다. 1회 편성되는 프로그램의 제작진은 스스로 사전 기획과 준비, 촬영 및 편집 일정을 정한다. 신문 기자 또한 명확한 취재 시간 없이 자료조사, 인터뷰 미팅, 대기 시간 등을 스스로 정한다. 이러한 자율성은 노동조합이 제작 자율성편집권 독립을 요구할 수 있는 노동조건이기도 하다. 이와 달리 전통적인 대공장 노동, 즉 산업노동은 정해진 작업시간과 장소가 명확하고 사용자의 직접적인 지시, 감독, 징계를 받는다. 자동차 산업처럼 이러한 노동 생산물은 대량생산 체계에서 동일한 상품을 지속적으로 생산해 낸다. 그러나 신문과 방송 등 미디어 노동 생산물은 매일, 또는 매주 달라야 하는 경험재이다. 그래서 표준화된 공정이나 품질의 측정이 불가능한 이 생산물은 노동자에게 전문직주의(professionalism)를 요구한다.

그러나 플랫폼 노동이 그러하듯, 신문과 방송사의 근로시간과 장소는 24시간 방송 프로그램의 편성, 또는 구독자와 약속한 시간에 맞춘 한에서만 자유롭다. 매주 수요일 저녁 7시에 방송되는 프로그램은 기획, 촬영, 후반작업(최종편집)의 일정을 제작진이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지만 본방송 시간이라는 제약에 묶여 있다. 마찬가지로 노동을 제공하는 장소 또한 프로그램을 어떻게 기획하고 기사의 아이템을 무엇으로 정하는가에 달라진다. 예능 프로그램 1회를 제작하더라도 야외촬영과 스튜디오 촬영의 분량을 어떻게 정하는가에 따라 장소와 시간이 수시로 변한다. 노동의 대가인 임금 또한 다르지 않다. 방송영상 콘텐츠나 기사의 단위 당 거래 가격이 정해진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이전까지 방송영상 콘텐츠나 신문 기사는 그 가격을 임의로 정할 수 없는 상품으로 양면 시장의 특성 상 광고시장에 종속된 상품가치- 시청률, 청취율, 유가구독수 -로 인정받았다.

 

누가 더 자유로운가

 

문제는 전통적인 방송과 신문의 노동이 결코 자영업자의 독립노동과 같이 한 개인이 수행하는 노동이 아니라는 점이다. 위에서 말한 노동조건의 결정은 높은 수준에서는 프로그램 편성전략에, 또는 지면기사의 배치에 따라 정해진다. 그러나 각각의 콘텐츠를 기획하고 제작하는 노동의 자율성과 비종속성은 담당 PD나 담당 부장에게만 국한된다. 함께 일하는 작가, 촬영, 음향, 조명 등 스태프나 보도사진, 조판, 배송을 담당하는 노동자에게 그러한 자율성이란 종속된 자유일 뿐이다. 흔히 방송산업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PD소사장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그래서 외주제작 또는 프리랜서란 종속된 자유에서 그 자유도가 어느 정도 보장되는가에 따라 천차만별의 노동 및 임금조건에 놓인다. 방송사는 이런 식으로 플랫폼 노동의 형태를 갖춘 노동자를 오랫동안 사용해 왔고 노동자성을 부인해 왔다. 거꾸로 오랜 기간 숙련을 거치고 사회적 자본을 구성한 방송의 일부 플랫폼 노동자들은 단순히 비정규직이라는 한 단어로 포괄하기 어려운 지위로 상승한다.

출처: 전국언론노동조합

 

방송과 신문으로 대표되는 오래된 미디어 노동은 고용기간의 지속적 보장(정규직)이라는 점에서만 차이가 날 뿐 비정규직 등 불안정 노동으로 언제라도 대체될 가능성이 높은 노동시장이었다. 방송산업에서 비정규직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은 1998년 노동법 개악 이후였다. 이전까지 방송사는 이들을 노동자로 인정할 필요도 없었고, 노동자 스스로도 자신이 노동자임을 증명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물론 여기에는 소수의 방송사와 언론사라는 노동시장의 규모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방송산업의 성장과 노동시장의 확대는 종속된 자유노동의 직무와 직군을 대규모로 만들어 냈다.

전통 매체인 방송과 신문 산업이 정체 국면에 접어들면서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해 질 것이다. 제작 자율성과 편집권 독립을 요구하고 행사할 수 있는 직위와 직급은 상층으로만 국한되고 독특한 노동의 특징, 즉 매일 새로워야하는 경험재의 생산에 필요한 전문직주의는 극히 일부의 정규직 노동자에게만 인지된다. 배달앱 플랫폼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에 경제적 보상 이외의 어떤 의미와 가치도 부여하지 못하듯, 미디어 산업의 오래된, 그리고 더 확대되는 플랫폼 노동은 언론의 공정성이나 독립성이라는 가치에 공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미디어의 오래된 플랫폼 노동은 오늘날 비로소 그 이름을 얻을 수 있겠지만, 그리고 노동자성 인정의 가능성은 더욱 높아지겠지만, 오직 화폐에 종속된 노동에의 열망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어쩌면 언론 노동자가 방송의 독립성, 언론의 공정성을 주장하는 것은 사치일 뿐이라고 여겨질 때가 너무 빨리 올지도 모르겠다.


참고문헌

박제성(2019), “종속 개념의 재검토”, 매일노동뉴스, 2019910.

임종률(2017), 노동법, 서울: 박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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