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메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중)



 

기형도의 시 속 화자가 평생을 미친 듯이 찾아 헤맨 사랑의 대상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후에 이르러 그 대상이 자신이 될 수 있음을 알았다면, 그 헤메임 속 어딘가에는 사랑의 대상이 이미 숨어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정서(Affekte)란 느낌이나 표상(Vorstellung)과 달리 그 분명한 외부의 대상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현실에 그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러한 정서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메”일 수 있었겠는가? 정서란 막연한 어떤 대상을 자신 안에 이미 갖고 있다는 의미에서 “감정의 확실한 상태”라고 부를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사랑처럼 희망도 이렇게 정서라고 말할 수 있다면, 희망의 대상이 현실에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그 희망의 정서조차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이런 까닭에 정서란 “반쯤은 직접적으로 전해지는 자신의 감정으로서 우리의 의식에 가까이 와 닿는 것”이다.(Bloch, 2004: 142)

사랑을 찾는 헤메임을 불분명한 표상을 대상으로 하면서 끊임없이 그 대상을 찾기 위해 나아가는 갈망이라고 한다면, 희망 역시 그 표상이 불분명하다 할지라도 그것을 통해 자신이 바라는 내용을 지닌 갈망으로 이행하게 된다. 이를 “희망의 목표 없는 진행”이라고 부를 수 있다.(ibid: 143) 정서를 이렇게 아직 의식되지 못한 대상을 향한 나아감으로 보는 관점은 매우 중요하다. 후설의 현상학에서 정서란 ‘성분(Gehalt)’을 내용을 갖는다. 이 때 성분이란 현실에서 인식이 가능하나 아직은 불투명한 대상을 의미한다. 그러나 블로흐의 정서는 이 성분을 뛰어넘는다. 즉 정서에는 이 불투명한 대상을 구체적인 상으로 추적하려는 경향, “아직 체험하지 못한 바를 체험하려는 전의식적 인간의 의향”이 포함된다. 따라서 그는 성분과 같이 정서의 내용이 의식에 아직 인지되지 못한 경우는 “추상적 사고(Gedahke)”로, 구체적으로 인지한 경우를 “구체적 생각 혹은 표상(Vorstellung)”으로 구분한다. 지향행위로서 정서를 파악하는 관점은 앞서 말한 “확실한 상태”로서의 정서란 무엇인지를 보다 정확히 알려준다. 즉 여기서 상태란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건강한 신체를 보존하려는 적극적인 지향으로서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블로흐가 말하는 상태란 “건강(Befinden)”과 같이 자기보존의 욕망이자 목표와 구체적 대상을 찾아가려는 지향행위로서의 정서이다. 이에 반해 사고와 표상은 인간의 의지와 따로 존재하기에 그 지향성을 의지를 통해 갖게 되지만, 정서는 그렇지 않다. 정서는 이미 그 안에 지향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ibid: 144)

무엇인가를 향해 나아가려는 경향에는 추구, 충동, 의향, 그리고 무엇보다 관심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무엇인가를 느끼려는 이러한 경향이 바로 정서를 정적이 아닌 동적인 지향을 자신의 특징으로 갖게 만들어 준다. 정서의 이러한 지향성은 배고픔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배고픔은 무엇인가를 먹어야 한다는 지향을 이미 내부에 갖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배고픔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정서의 개념화란 많은 주의를 요한다. 블로흐는 이렇게 말한다. “정서는 가까이 존재하는 것을 포괄하며, 자신 속에 커다란 방향성을 내포한다. 바로 이를 통해서 정서는 어떤 생명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라 정서는 존재의 방식이기도 하다. 감정은 오직 ‘감정의 움직임’을 표방하는 총체적 개념으로서, 실존적인 개념이 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어떤 ‘직결성(Betroffenheit; Shock)’일 뿐, 이론적이고 객관적인 ‘정신’은 아니다.”(ibid: 145) 블로흐는 자신의 이러한 입장을 키에르케고르와 같은 실존주의나 데카르트, 스피노자의 정서 개념과 명확히 선을 그으며 전개하고 있다. 요컨대 근대 합리주의 철학에서 인간감정은 합리성과 이성의 왕국에 들어오면 안될 속인들의 “수다스러움의 세계”였다는 것이다.

[블로흐 독서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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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답을 요구하는 충동 이론에 관해 말하자면, 우리는 정신분석학자들을 요리사에 비유할 수 있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음식물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오로지 충동이라는 매운 양념에 대해서만 골몰하고 있다. 그들은 신비로운 개념을 동원하여, 인간의 여러 충동들을 살아있는 인간의 육체에서 일탈시키고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형성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리비도, 혹은 권력에 대한 의지, 원초적 디오니소스와 같은 우상들이며, 무엇보다 이러한 우상을 절대화시키는 입장이다. 기실 인간의 몸이란 그 자체를 보존할 뿐, 다른 어떤 것을 지니려고 하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도 절대화된 우상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인간의 몸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하기에 프로이트, 아들러 그리고 융은 그것을 ‘경제적, 사회적 전제조건의 변수’로서 한 번도 토론하지 않았던 것이다.”(E. Bloch, 2004: 131)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는 무엇인가? 욕망(desire)이나 욕구(need)니 하는 엄격한 학문적 개념 구분을 하지 말고 질문의 방향을 바꾸어보자. 우리는 어떤 이들을 볼 때 가장 동정심을 느끼는가? 아마도 그 동정심이 깊을수록 내 자신에게는 그러한 결핍이 없다는 안도감 또한 깊을 것이며 바로 그것이 우리의 기본적인 욕구가 무엇이었는지를 돌아보게 해 줄 것이다. 여기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사랑을 잃고 몇 날을 슬픔과 자학 속에서 보내고 있다. 또 한사람은 바로 굶주린 사람이다. 한 발짝을 내딛을 힘도, 구걸할 소리를 지를 힘도 없이 거리의 한 모퉁이에서 쓰러져 있는 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동정심에 깊이가 있다면 누구를 더 동정하겠는가? 우리는 실연의 아픔으로 죽은 이들에겐 “왜 그랬나, 좀 이겨내지...”라고 할지언정, 굶주려 죽은 사람에겐 도저히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성욕’이라 했던 정신분석학이 방기한 욕구, 혹은 보려하지 않은 욕구가 바로 ‘식욕’, 달리 말해 ‘배고픔’이다. 흥미롭게도 이 ‘배고픔’과 ‘성욕’이라는 두 욕구를 어떻게 충족시키거나 통제할 것인지에 대한 답은 오늘날까지도 화해하기 힘든 학문의 두 갈래로 이어져왔다. 무의식에 자리한 성욕과 이를 억압하는 자아와 초자아, 그리고 이 억압의 우회로인 욕구의 ‘승화’가 풍성한 문화의 자양분이 된다는 정신분석학의 주장은 무의식의 구조, 상징과 의미에 대한 분석, 그리고 넓게 보자면 소위 ‘상부구조’라 불리우는 분야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의 흐름으로 이어져왔다. 반대로 배고픔의 기원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를 어떻게 충족시킬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물질적 재화의 생산과 분배에 대한 분석으로, 곧 ‘토대’라 일컫는 영역을 다루는 정치경제학의 분야에서 이뤄져왔다.

이런 구분을 너무 지나친 단순화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프로이트 시대 오스트리아 빈의 정신분석상담소와 당대의 정신분석학자들에게 배고픔은 그들의 문제가 아니었다. 빈에서 자살하는 이들의 90퍼센트가 생활고 때문이었음에도, 목놓아 배고픔을 호소하는 그 어떤 이도 상담소의 환자가 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정신분석상담소의 벽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 “경제적, 사회적 문제는 여기서 취급하지 않습니다.” 결국 당시 정신분석상담소를 찾던 이들은 중산층 이상의 출신들이었고, 이들을 상담하면서 정신분석학자들이 접한 욕구는 은밀한 성충동과 성도착에 대한 괴로움, 그것도 “위선적인 말투와 생각”으로 자아에게 검열당하고 있던 리비도였을 뿐이다. 그에 비해 프롤레타리아의 배고픔은 명료하고도 거짓이 없었다. 어차피 그들의 욕구는 안락의자와 소파가 놓여 진 거실에서 상담해야 할 “유복한 자들의 병”이 아니라, 거리에서 분노와 좌절로 토해내야 할 “고상하지 못한 괴로움”이었던 것이다.(ibid: 135)

“유복한 자들의 병”이라는 말처럼 프롤레타리아의 병과 부르주아의 병은 확연히 구분된다. 오늘날로 비유한다면 집세 걱정 없이, 다음 날 급여가 제때 들어올지에 대한 걱정 없이 살아가는 이들 또한 병을 앓고 힘겨움을 느낀다. 그러나 이들의 힘겨움은 “유복한 자들의 병”이기에 그 해법은 사적인 곳에서 은밀하게, 때로는 뇌물과 같은 어둠의 경로에서만 찾을 수 있다. 달리 생각하면,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의 병은 증세의 문제로 진단된다기보다 그들의 호소가 들려오는 장소와 그 해법의 차이로 밝혀질지도 모른다.

배고픔의 장소와 해법에 대한 이야기는 이것을 대상으로 삼았던 정치경제학의 흐름을 또한 돌아보게 한다. 정신분석학이 간과한 ‘배고픔’이라는 고통과 그 충족에의 욕구를 정치경제학은 어떻게 다루었던가? 이왕 저지른 과도한 단순화를 더 밀고 가보자. ‘토대’ 혹은 ‘경제’라는 배고픔의 장소는 그 욕구의 파악이 양과 척도로 측정가능한, 그리하여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의 너무도 다른 ‘배고픔’은 효용(utility)의 이름으로 동질화되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프롤레타리아의 노골적인 고통과 분노는 또 어떠한가? 이들의 솔직함과 난폭함이 거리에서 폭발할 때, 이는 자본주의 경제의 필연적인 ‘산물’이며 그렇기에 조금 더 나은 인간적인 자본주의를 향한 과도기이자, ‘계획된 사회주의’로의 경로로만 취급되어 왔다. 정신분석학이 ‘성욕’을 전면에 내세우며 “인간의 여러 충동들을 살아있는 인간의 육체에서 일탈”시켰듯이, 정치경제학은 배고픔과 그 갈망의 문제를 인간이 어쩔 수 없는 ‘경기순환’과 ‘축적체제’라는 이름으로 다시 추방시켜 버리지는 않았는가? 결국 배고픔을 다루었던 ‘토대’와 ‘경제’에 대한 학문의 흐름 또한 그 해법이 사적이고 은밀하지 않은 대신, 인간 주체의 갈망과 희망이 결여된 제도와 구조라는 물신(fetish) 속에 가두어 버리고 말았다.

[주]
이 글은 요즘 읽고 있는 E. Bloch(1959), Das Prinzip Hoffnung, Frankfurt am Main: Suhrkamp; 박설호 옮김(2004), 희망의 원리, 서울: 열린책들 의 독서노트입니다. 글 중간의 페이지와 인용은 모두 별도의 언급이 없는 한 이 책에서 온 것입니다. “독서노트”라는 변명이 허락된다면 글의 주장과 내용은 블로흐의 글에 대한 저의 오독과 과민한 반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해서 행여 이 글을 읽으실 때 비판의 대상이나 내용이 모두 블로흐의 것이라고 여기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학습의 습관일지 모르나 그저 텍스트를 눈으로 보는 것과 그것을 읽어내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고 생각됩니다. 텍스트를 읽어낸다는 것은 제가 그것을 또 다른 텍스트로 생산해 내고, 그럼으로써 제 사고의 한계를 스스로 돌아보는 기회를 부단히 만들어 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이후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를 <블로흐 읽기>에 대한 짧은 변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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