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불교, 천주교와 같은 종교보다 2022년 한국에는 더 강력한 종교가 있다. 정치와 언론, 정확히 말해 제왕적 대통령과 공정 언론이라는 종교다.

제왕적 대통령과 공정 언론은 시민이 바라는 이상적이며 완성된 정치와 언론의 상이다. 마치 종교가 억압받는 이들에게 천국의 완벽한 삶을 약속하듯, 제왕적 대통령과 공정 언론은 현실의 정치와 언론이 닿아야 할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다.

87년 민주화 이후 독재에 맞선 영웅 신화와 고착화된 거대 양당 체제는 대통령을 민중(people), 또는 시민(citizen)의 열망을 투영하는 인격체로 만들었다. 김대중과 노무현은 서로 다른 열망을 반영했다. 김대중은 박정희 정권에 맞섰던 민중의 항거가 낳은 정권교체의 상징이, 노무현은 신군부에 맞섰던 87년 민주항쟁으로 탄생한 시민의 열망이 투영되고 좌절된 상징이었다. 박정희와 박근혜는 어떠했는가. 이들의 독재와 불통은 ‘한강의 기적'을 만든 제왕의 혈통에 대한 숭배에서 얼마든지 눈감을 수 있는 흠결이었다. 이들의 적통을 잇는다는 두 정당은 이 인격체를 수호하고 재생산하는 폐쇄적인 정치 단위가 되었다.

대통령을 향해 시민의 열망을 투영하는 경로가 바로 언론이다. 이 열망의 투영은 두 가지 방향으로 작동한다. 한 축은 ‘사실에 근거하여' 자신들이 지지하는 대통령의 편을 드는 언론이며, 다른 한 축은 양당체제에서 대통령 선거를 놓고 경쟁하는 정당을 적으로 만드는 언론이다. ‘우리와 그들'이라는 구도에서 공정 언론은 두 정당, 두 후보에 대한 정파적 균형을 뜻한다. 우리 편의 잘못 만큼 그들의 잘못도 지적해야 한다. 우리에 대해 비판하는 언론은 그들 편을 드는 언론으로 사라져야 할 절대 악이다.

다수 언론은 이러한 정파적 열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어떤 언론은 자신이 ‘공정 언론'이라는 종교의 전도사가 되기를 서슴지 않는다. 공정 언론이라는 낙원은 발 딛고 선 땅이 ‘기울어진 운동장’이라 한탄하는 근거가 된다. 이들을 위한 예배당이 바로 ‘합리적 의혹'과 ‘가려진 진실'을 밝히겠다는 TV와 유튜브 채널들이다.

유튜브 채널 <전광훈 TV> [국민혁명당 LIVE] 화면 캡쳐


“마귀들과 싸울지라 죄악 벗은 형제여. 담대하게 싸울지라 저기 악한 적병과…” 같은 찬송, 문서와 사진을 흔들며 의혹이 진실임을 주장하는 간증, 그리고 악마를 향한 분노의 설교에 ‘아멘'으로 화답하고, 수퍼챗으로 헌금을 내면 예배가 끝난다. 반복되는 일상과 회사에 갇힌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는 이 예배당에서 신도와의 친교로 맺어지고 공정 언론을 향한 십자군을 결성하기도 한다.

예배당을 나온 신도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도 신도가 아닌 사람들, 그러니까 대통령 선거결과가 월세값 인상보다 의미가 없는 사람들, 공정 언론보다 감염병과 산업재해 대책 보도가 더 필요한 사람들은 결코 눈에 보이지 않는다. 행여 이런 사람을 만나면 ‘전도'에 나서기도 한다.

‘기울어진 운동장’은 환상이 아니라 공정 언론과 제왕적 대통령을 위한 제단이다. 제단이 없으면 제사장도, 신도도 없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바라는 기도문은 그렇지 못한 정치와 언론에 대한 비판으로, 예컨대 시민의 열망을 온전히 담은 인격체의 창출과 공정 언론을 위한 대책으로 나아간다. 진보 종편의 꿈은 더 큰 예배당을 향한 소망이지만, 개척교회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은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다.

제왕적 대통령과 공정 언론이라는 낙원으로 현실을 비판하는 신앙은 그 낙원을 꿈꾸게 한 현실의 실상을 잊게 만든다. 제왕적 대통령제가 과연 당연한 것인지, 이를 배출할 굳건한 양당체제가 정말 시민의 넓은 정치적 지향을 대의하는지 묻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정치 세력에게 ‘공정’은 무엇인지, 왜 언론은 표면적이고 선정적이며 인용이 쉬운 기사만을 쏟아내는지, 그럼에도 이들이 여전히 수익을 낼 수 있는 구조는 무엇인지도 묻지 않는다.

분명히 제왕적 대통령과 공정언론이라는 종교는 사람들, 특히 신도들에게 평안을 안겨준다. 이룰 수 없는 꿈이라도, 우유부단한 대통령과 편파적인 언론에 받은 상처의 진통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통제의 약효는 오래가지 않고, 더 많은 투여량이 필요해 진다.

정말 필요한 것은 정치와 언론이라는 종교가 만들어진 현실의 개혁이다. 양당체제와 제왕적 대통령 권한의 해체, ‘매체 영향력’이라는 무형 자산으로 수익을 내는 뉴스 콘텐츠 시장의 재편, 자본가 유한계급의 대리 여가를 수행하는 부속품으로 전락한 언론의 지배구조 개혁이 그것이다. 제왕적 대통령과 공정 언론을 숭배하는 신앙은 바로 이런 개혁의 가장 큰 장애물이다.

마르크스가 말했듯 “천상의 비판은 지상의 비판으로, 종교의 비판은 법의 비판으로, 신학의 비판은 정치의 비판으로 전환"(헤겔 법철학의 비판을 위하여)되어야 할 때, 비판은 어떤 행위인지 다시 고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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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후보 두 명의 유튜브 경제전문채널 출연이 화제다. 대선 국면 언론의 역할을 유튜브 채널이 했다는 평가- “3PRO TV가 나라를 구했다” 등 -는 유튜브 이용자 뿐 아니라 지상파 방송 종사자들에게서도 나오고 있다. 기존 언론에서 볼 수 없었던 선거 콘텐츠라는 우호적인 평가에는 관행적이고 경직된 방송사 토론과 달라지지 않은 대선 보도에 대한 비판이 깔려있다. 그러나 3PRO TV의 대선후보 특집을 기존 언론과 비교할 때, 유튜브 포맷이나 ‘이용자 중심’이라는 표면의 차이에만 주목할 수 없다. 

 

3PRO TV 채널 캡처

 

토론이 아닌 인터뷰

3PRO TV의 대선 특집은 말 그대로 ‘특집 인터뷰’이지 방송 토론이 아니었다. 미리 전달한 질문을 두 명의 후보가 따로 녹화하여 편집한 콘텐츠다. 공직선거법 등 각종 법령과 규칙 제한을 받는 TV 방송 토론에서는 이런 질문과 답변 시간이 불가능하다. 뉴스 프로그램 내 인터뷰 편성도 정당과 캠프의 공정성 항의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럼에도 주식과 부동산 같이 압축된 주제의 질문에 1시간 반 분량의 충분한 답변을 후보에게 듣는 방식은 경제에 대한 후보의 인식과 깊이를 시청자에게 체감하게 해 준다.

물론 제작 환경의 차이도 있다. 3PRO TV는 진행자 3명 이외에도 다수 제작 인력과 조직을 갖추었지만 방송사에 비할 바는 아니다. 거대 조직, 제작 규정, 질문의 사전 데스킹, 캠프와의 사전 조율에 후보 도착시 의전과 동선 설정까지(가끔은 방송사 사장님도 나오신다) 일이 커져도 너무 커진다. 방송사는 3PRO TV처럼 빠른 결정과 지시를 내릴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서로 다른 목표

유튜브와 팟캐스트 플랫폼 콘텐츠인 3PRO TV는 이번 대선 특집의 목표가 명확했다. 아침 라이브 방송의 동시 시청자가 5만 명에 이를 정도의 안정된 시청취자를 가진 이 채널은 이번 특집으로 조회수 증가는 물론 구독자와 인지도 제고라는 목표를 달성했다. 물론 이런 목표는 수익과 직결된다. 

그러나 지상파를 비롯 레거시 방송사에 대선 후보 토론회나 인터뷰의 편성 목표는 모호하다. 방송 토론은 법으로 정해진 의무이고 한 분야가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외교 등 여러 분야에 백화점식 질문을 던지면서 상호 토론 시간 등 룰(rule)도 적용해야 한다. 높은 시청률이 나와도 얻게 되는 보상은 딱히 없다. 이러다 보니 레거시 미디어의 대선 후보 콘텐츠는 후보자의 실언, 태도, 진위 여부 등 다른 언론이 보도할 아이템만을 제공하게 된다. 보도의 확산 과정에서 각 후보 캠프는 방송 토론 진행의 공정성에 대해 항의할 수도 있다. 

물론 여기에는 후보와 시청자가 정치적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여기는 각 방송사의 정체성도 작용한다. 결국 레거시 미디어의 대선 후보 토론과 인터뷰는 각 매체가 유지하고 있는 영향력 확인에만 머문다. 

 

 

중산층과 유권자

3PRO TV 대선 특집을 향한 호평에는 후보 간 상호비방이 없는 경제 문제를 다루었다는 점도 작용했다. 해외 증시 정보와 투자 상담 등을 진행하는 3PRO TV의 강점은 시청자의 정치적 지향과 무관한 공통 관심사인 증권과 부동산 등을 다루는데 있다. 국내 증시의 저평가, 다가구 양도세, 암호화폐에 대한 규제 등 한 푼이라도 재산 증식을 바라는, 그래서 눈 앞에 어른대는 중산층을 향한 욕망을 가진 이들에게 정치란 외적 변수일 뿐이다. 

그래서 3PRO TV 대선 특집에서는 후보에 대한 의혹이나 검증이 필요 없었다. 늘 듣고 보는 시청자들의 공통 관심사에 대한 질문을 후보에게 전달했을 뿐이고, 질문을 더 잘 설명하거나 답변을 확인하는 절차만을 거쳤다. 두 후보의 발언이 무겁지 않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레거시 미디어의 시청자는 다르다. TV 앞에 앉는 순간부터 후보의 한 마디 발언과 작은 몸짓까지 비교와 평가 대상이 된다. 후보에 대한 지지가 강할수록 시청자의 이런 평가는 방송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지기 쉽다. 소위 ‘부동층’이라도 서너 개에 달하는 다양한 분야에 모두 관심을 갖지는 않는다. 후보가 준비를 잘해서 전문용어를 사용하면 이해는 더 어려워진다. 

지상파 방송이나 언론인 단체(관훈클럽 등)가 제작, 또는 주최하는 토론회가 어려운 점도 이 때문이다. 불특정 다수에, 다양한 소득 차이가 있고, 사는 지역이 다른 ‘유권자’ 공통 질문이 무엇인지 찾기란 쉽지 않다. 결국 각 언론사가 보도해 온 이슈를 후보 당사자에게 직접 확인하거나 기자 자신이 궁금해 하는 질문들 밖에 던지지지 못하는 이유다. 

 

3PRO TV 댓글 중 일부

 

정치와 경제의 뚜렷한 경계

3PRO TV 대선 특집이 보여준 것은 디지털 콘텐츠의 의제 설정 능력이나 지상파의 몰락이 아니라 지극히 합리적인 개인(homo economicus)의 출현이다. 다수 구독자를 가진 유튜브 채널들이 경제가 아닌 정치, 사회, 노동, 복지, 환경, 교육을 주제로 두 후보에게 같은 형식의 인터뷰를 진행한다고 생각해 보자. 어떤 분야든 정치적 입장이 포함될 수 밖에 없다. 차별금지법, 노동자 법적 지위 확대, 기후 위기와 원전 정책, 대입과 대학 개혁 등 무엇하나 쉬운 이슈가 없다. 

그러나 경제 문제는 다르다. 언제부터인지 정치적 입장을 막론하고 우리 모두가 한 푼이라도 더 벌고 한 푼이라도 손해보지 않겠다는 합리적 개인이 되었다. 중년의 전유물인 줄 알았던 주식과 코인시장에 2030세대가 진입했고, 역대 최고 수준의 가계 부채는 아파트 값 하락을 결코 눈 뜨고 볼 수 없게 만들었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전환 문제가 그랬듯, 교육이든 취업이든 투자한 비용만큼 얻지 못하는 모든 지위는 ‘불공정’하다. 이재명을 지지하든, 윤석열을 지지하든 경제 문제는 지극히 비정치적이며 모두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정책 분야가 됐다. 

그래서 3PRO TV의 대선 특집은 좋은 기획과 콘텐츠 제작일지는 몰라도 ‘뜰 수 밖에 없는’ 분야였다. 1시간 반이나 되는 긴 인터뷰에서 각 후보가 말한 발언에 흥미를 가질 시청자들은 많았다. 그러나 주가 변동에 눈을 떼지 못하고 양도세 정책에 분노하며 코인 폭락에 한탄할 사람들만이 ‘시민’은 아니다. 두 후보의 발언이 ‘먼 나라’ 얘기로 들리는 사람도 결코 적지 않다. 다만 이들에게 두 후보 중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삶이 그닥 나아지지 않을 것이란 점은 분명하다. 가장 정치적인 콘텐츠인 경제 콘텐츠는 이렇게 비정치적이 된다. 중산층이라는 신기루를 욕망하는 이들과 그 조차 포기하는 이들의 간극은 철저히 ‘비정치적’이다.

 

 

더욱 정치적이어야 할 레거시 미디어

3PRO TV와 지상파 등 레거시 미디어를 동일한 잣대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기술적 인프라 뿐 아니라 조직과 재원 구조, 그리고 규제까지 전혀 다른 미디어이기 때문이다. 지상파 방송사에게 왜 3PRO TV와 같은 대선 특집을 못 만드냐고 묻는 것은 포병에게 기마병처럼 왜 빨리 가지 못하느랴고 다그치는 꼴이다. 유튜브 플랫폼과 실시간 본방 중심 지상파 등 레거시 미디어의 차이는 오래 전에 확인됐다. 이제는 “왜 우리는 저렇게 못하는가?”라는 자조가 아니라 서로 다른 영역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해야 할 미디어라는 인정이 더 필요하다. 

이 인정은 3PRO TV와 같이 충성스러운 합리적 개인의 집합을 가진 미디어, 지극히 ‘중립적인’ 이슈로 더 많은 구독을 끌어내는 미디어가 아니라, 대선과 같은 협소한 정치에서 벗어나 더 넓은 정치의 영역을 만들어낼 과감한 시도로 이어져야 한다. 갈등과 충돌을 두려워하지 않는 미디어. 이런 용기를 ‘사회적 책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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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 민주주의 아래 대통령, 또는 행정수반에 대한 몇 개의 인용문

 

이처럼, 헌법은 대통령에게 실제적인 권력을 부여해 주는 한편, 국민의회에게는 도덕적 힘을 보장해 주려 한다. 법 조문을 통해 도덕적 힘을 만들어 내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점은 차치해 두고라도, 헌법은 대통령이 모든 프랑스인들의 직접 선거권을 통해 선출되게 함으로써 다시 자기 자신을 폐기한다. 프랑스 전체의 투표가 국민의회의 750명의 의원들 사이에 분산되어 있는 반면, 이 경우에는 그 투표가 한 개인에게 집중된다. 각각의 개별적 인민 대표자들은 단지 이러저러한 정파, 이러저러한 도시, 이러저러한 교두보를 대표할 뿐이며, 또한 실태도 인물도 자세히 모른 채 누구든 간에 750명을 선출해야 한다는 필요를 대표할 뿐이다. 반면에 대통령은 국민에 의해 선출된 자이며, 대통령 선거 행위는 주권 인민이 4년마다 내놓는 강력한 으뜸패이다. 선출된 국민의회는 국민과 형이상학적 관계를 맺고 있지만, 선출된 대통령은 국민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 있다. 실제로 국민의회는 개별적인 대표자들을 통해 국민 정신의 다양한 측면들을 대변하고 있지만, 대통령은 이 국민정신의 화신이다. 국민의회에 비하면 대통령은 일종의 신권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인민의 은총을 입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 1869년.

 

직접 선거를 통해 행정수반을 뽑는 국가에서, 대통령 선거가 정치적 삶 전체를 결정하는 주요 선거가 되는 경향이 있다. 의회 내 다수파의 지도자가 행정수반인 국가에서는, 지도자 개인이 입법 운동과 선거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물론, 정당은 여전히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정당은 중계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과 영향력 있는 사람의 연결망, 자금 조달 능력, 그리고 활동가들의 자발적 봉사와 같은 결정적 자원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들은 지도자를 위해서 봉사하는 도구가 되는 경향이 있다. 의회 정치와는 반대로, 하원보다 정부의 수반이 전형적인 대표로 이해된다. 그러나 의회 정치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와 같이 규정한 대표자와 그를 선출한 사람 간의 연계는 본질적으로 사적인 성격을 띤다.

 

버나드 마랭, <선거는 민주적인가>, 1997년.

 

시민운동이 대통령 권력이나 행정 권력에 의존해 그 가치를 실현하려고 하면 어떻게 될까? 반대로 시민운동을 정부 운영의 동력으로 삼는다면 어떻게 될까? 어느 경우든 민주주의 발전에 긍정적인 기여를 하기 어렵다. 운동의 방법으로 통치할 수 없고, 통치의 방법으로 운동을 이끌 수 없듯이, 정부는 정부의 길이 있고 운동은 운동의 길이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문재인 대통령은 내 기대와는 아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적폐 청산과 직접 민주주의를 들고 나온 것은 민주주의를 ‘정부의 문제’가 아닌 ‘운동의 문제’로 접근하겠다는 의지로 보였다. 박근혜 정부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청와대가 중심이 되어 여론을 직접 이끌고 내각을 수직적으로 지휘하는 정부 운영방식이 재현되었다. 박근혜의 ‘보수판’ 청와대 정부와 비견될 만한 ‘진보판’ 청와대 정부의 등장으로 보였다.

 

박상훈, <청와대 정부>,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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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8. 14. 16:00

우리는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우리를 찌르는 그런 종류의 책만을 읽어야 한다고 난 생각한다. 만일 우리가 읽고 있는 책이 머리를 치는 일격으로 우리를 깨우치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 책을 무엇 때문에 읽어야 하는가? (…) 우리는 우리에게 재앙과도 같은 영향을 주는,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사랑하는 어떤 사람의 죽음처럼, 모든 이들로부터 멀리 숲속으로 추방당한 것처럼, 자살처럼, 우리를 비탄에 젖게 하는 그런 책들을 필요로 한다. 책이란 우리 내부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기 위한 도끼가 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나의 믿음이다.

카프카(F. Kafka)가 오스카 폴락에게 쓴 편지



카프카가 이 편지를 썼을 때 나이는 스물한 살이었다. 프라하의 독일계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던 시기였다. 문학에 대한 열정과 법학 박사학위 취득이라는 전혀 다른 두 언어의 공간을 왕래하던 그에게 책은 이런 의미였다. 만족을 위한 수단이 아닌 ‘머리를 치는 일격’으로 자신을 깨우치는 책, ‘우리 내부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기 위한 도끼’인 책.

카프카에게 책이 갖는 의미는 오늘날 지식인에게, 특히 한국의 지식인에게도 그러한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사회과학 분야 박사학위 소지자들로만 좁혀서 예를 들어보자. 학위 논문 심사를 받거나 심사를 할 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왜 이 주제를 택했나요?”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흔히 논문 초반에 ‘연구 배경’이나 ‘연구 목적’으로 쓰여 진다. 그러나 여기에 쓰여 지는 문장은 연구자의 내면을 드러내지는 못한다. 전공 분야의 각종 문헌과 선행연구들의 한계, 학문 장 내 논문이 차지하는 위치를 설명할 뿐이기 때문이다.

정작 특정 주제를 택하는 동기는 자신이 흥미를 가졌던 분야의 독서 이력, 자신의 성장 배경이 반영된 사적 관심사거나 때로는- 사실 이런 경우가 더 많은데 -지도교수의 선택인 경우가 부지기수다. 대학 내 위계와 형식을 따라야 하는 학위 논문의 주제 선택은 불가피하다 해도, 연구자로서의 지위를 획득한 이후에도 “왜 내가 이 주제로 글을 쓰고 발언을 해야 하는가?”라는 자문을 하지 않음이 더 심각한 문제다.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란 바로 이 질문에서 시작되며, 모든 독서와 학술 토론회는 부단히 이 질문의 답을 찾거나 질문을 바꾸어 가는 과정이다. 지식인에게 책은 카프카의 책처럼 어떤 연구를 할 것인지, 어떤 문제를 설정할 것인지 고민하는 사유를 위한 ‘도끼’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자신이 읽은 책은 이미 정해 놓은 주제의 글쓰기를 위한 ‘재료’일 뿐이며, 때로는 가설과 결론을 위한 지적 권위- 대표적으로 참고문헌 -로 사용된다.

지식인에게, 특히 인문학과 사회과학 연구자들에게 독서는 논문, 칼럼, 강연 등 자신이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는지, 어떤 행위를 해야 할지, 그 행위가 사회적으로 어떤 효과를 가져 올지 끊임없이 자문하는 과정이다. 이런 이들에게 독서량과 생산하는 텍스트의 양이 비례하기는 힘들다. 사유가 아닌 글과 발언을 하기 위한 재료로 독서를 할 때, 그 글과 발언은 자신의 신념이나 믿음, 또는 기대의 산물일 뿐이다. 그 독서조차 자신의 믿음에 확신을 주거나 찾고 싶은 답을 주는 책만을 대상으로 한다. 지식인 ‘내부의 얼어붙은 바다’는 더욱 단단해지고 그에 호응하는 독자만을 찾아 헤매는 자기만족만이 목적이 된다.

최근 언론중재법 개정안- 소위 언론보도 피해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 -을 둘러싼 학계의 행위를 단순히 찬성과 반대로 나누고 그 배경이 되는 학문적 입장만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개정안이 아니더라도 이미 문재인 정부 기간 동안 숱한 이슈와 쟁점과 관련된 학계 및 지식인들의 토론회, 세미나, 칼럼, 강연 등을 생각하면 과연 한국사회 지식인의 책무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언론개혁’, ‘허위조작 정보’(가짜뉴스), ‘언론혐오’, ‘시민의 요구’라는 추상적이고 도덕적인 용어가 난무한다. 이런 용어들은 그 자체로 사유의 대상이지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지식인은 대중의 직접적 요구의 근거와 합리성을 제공해 주는 사람이 아니라, 왜 그런 요구가 나오는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설령 징벌적 손해배상과 같이 대중의 요구와 일치하는 결론이 나오더라도 그 결론에 이르는 과정은 자신이 가졌던 개념과 이론, 그리고 입장에 대한 부단한 회의의 결과여야 하며, 그 수단이 바로 독서다. 교수나 연구원이라는 사회적 지위는 이런 독서와 사유를 위한 자율성을 주기 위한 사회적 배려이지 권위가 아니다.

분석해야 할 언론의 낮은 신뢰도나 ‘징벌’에 대한 시민의 압도적 지지를 도리어 자기주장의 근거로 삼는 이들에게 과연 지식인이라는 호칭을 붙일 수 있을지 의문이다. 토론회 기사에서 자기 발언이 얼마나 인용되었는지 확인하고, 강연 동영상의 조회수를 자랑하며, 페이스북 응원 댓글에 만족하는 이들이 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언론’이든 ‘시민’이든 지식인이 쓰고 말하는 개념은 철저한 사유의 과정이자 결과여야 한다. 미루어 두었다 최근 다 읽은 데이빗 그레이버(D. Graeber)의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은 내가 사용해 온 개념의 반성과 사유를 위한 훌륭한 안내서였다. 토론회 발표문, 칼럼, 강의 때마다 마음에 걸린 것은 마르크스의 가치(value)와 물신성(fetishism)이었다. “우리 모두가 물신성의 세계에서 산다면, 대안은 무엇인가요?”라는 학생들의 질문은 언제나 나를 망설이게 했다. 이 책은 정리하거나 인용할 ‘재료’가 아니다. 더 많은 책을 읽고, 현상을 더 넓게 볼 수 있는 사유의 수단이다.

지식인에게 독서란 바쁜 일정과 각종 업무 중 여유 있을 때 하는 행위가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다. 이 의무는 결코 ‘언론개혁’과 같은 목적을 정해 놓은 사유 과정의 결과가 될 수 없다. 개념과 범주의 열려짐을 위한 사유 과정은 그 목적지가 어디인지 정하지 않은 모험과 같다. 모험보다 안위를 고민하는 지식인의 사회, 2021년 한국 사회다.

대문에서 그가 나를 가로막으며 물었다. “어딜 가시나이까? 주인나리”, “모른다” 내가 대답했다. “그냥 여기를 떠난다. 그냥 여기를 떠난다. 그냥 여기를 떠나 내처 간다. 그래야만 나의 목표에 다다들 수 있노라.”, “그렇다면 나리의 목표를 아시고 계시는 거지요?” 그가 물었다. “그렇다.” 내가 대답했다. “내가 ‘여기를 떠난다’고 했으렸다. 그것이 나의 목표이니라.”

카프카, <돌연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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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영길 교수가 민주언론시민연합의 <언론 포커스>에 기고한 “‘언론 징벌적 손해배상제’와 합법성의 문제”는 언론개혁이라는 담론에 중요한 층위를 지적하고 있다.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은 민주당 정청래 의원의 <언론중재법> 개정안과 법무부의 상법 개정안이 제출되면서 “허위조작정보 처벌이냐, 언론의 자유냐”라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되고 있다. 물론 처벌과 자유의 이분법이 아니라 경실련, 언론개혁시민연대 등 시민단체와 학자들은 ‘가짜뉴스’의 모호함, 과잉입법의 우려, 위자료 현실화와 같은 대안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이 글은 처벌과 자유의 양자택일이나 그 중재안이 아니라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배에 찬성하는 시민의 입장- 미디어오늘에서 실시한 두 차례의 여론조사 결과로 확인된 -에 더 주목하고 있다. 과반이 넘는 찬성 여론은 고려하지 않고 징벌적 손배에 대한 현행 법체계 내 정합성이나 절충안을 제시하는 것에 그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언론의 자유와 열망의 도덕성

 

이 글은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배 찬성 여론에서 정의의 문제를 보고 있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이념이나 특정 직업군(언론인, 예술가 등)의 권리가 아닌 시민권의 하나로서 모든 시민이 평등하게 누려야 할 권리다. 이런 권리를 평범한 시민보다 주류 언론사나 기자가 더 많이 누리고 그로 인해 이익을 얻는다면 결코 정의롭지 않다. 현행법이든, 개정안이든 법에는 론 풀러가 말한 열망의 도덕성, 즉 법이란 지켜야 할 의무를 명시하려는 강제가 아니라 정의에 대한 갈망과 그것을 실현하려는 의지가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언론인 등 일부에게만 부여된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시민 또한 누려야 한다는 정의의 열망이 이번 개정안에 대한 찬성 여론으로 드러났다고 본다. 

 

이 분석은 징벌적 손배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 이분법이 아니라 언론개혁을 위한 시민의 열망이 드러난 계기로 보자는 뜻으로 읽힌다. 법안에 대한 사회적 논의과정에서 일반 시민 목소리는 없거나 무시되는 반면, 법안에 반대하는 언론 및 관련 전문가들의 목소리가 지배적이라는 불평등한 상황에 대한 지적은 중요하다.

 

그러나 법에 정의에 대한 갈망과 그것을 실현하려는 의지가 반영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대안은 될 지라도 징벌적 손배에 이입하기란 쉽지 않다. 언론개혁에 대한 시민의 열망은 여러 형태로 표현된다. 현 정권이 과제로 삼은 검찰개혁과 언론개혁은 보수 양당체제의 정치 구도에서 ‘적과 아군’이라는 담론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두 개혁 모두 그 대상의 인격화를 필요로 한다. 검찰개혁은 검사 조직과 검찰총장을, 언론개혁은 조중동과 종편 뿐 아니라 수구 집단을 대상으로 상정하고 있다. 적과 아군이라는 담론의 한계는 바로 여기에 있다. 부정해야 할 대상은 분명하지만, 앞당겨야 할 미래는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론답지 않은 언론”이라는 규정은 어느새 언론 일반에 대한 부정이 되어 버렸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언론인 등 소수에 치우쳤을 뿐 아니라 남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언론개혁을 향한 시민의 열망, 그 열망의 도덕성이 어떻게 법에 반영될지는 철저히 제도권 정치- 정확히 여의도 정치라 쓰겠다 -의 역학관계에서 왜곡되고 있다. 언론개혁의 범위는 너무도 넓다. 방송통신위원회 등 규제기관의 재구성에서 공영방송 지배구조를 거쳐 한 언론사의 저널리즘 책무까지 어떤 것을 먼저 시작해야 할지 선뜻 꼽기 어렵다. 언론개혁에 대한 시민의 열망은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의 금지, 사회적 재난에 대한 대처와 점검, 노동인권에 충실한 보도부터 종편 재승인 거부, 보수 유튜버 처벌 등 미디어의 영역을 넘어 검찰 같은 관료제에 대한 반발까지 포괄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열망이 정부여당의 법 개정안으로 구체화될 때, 시민이 원하는 언론이 무엇인지보다 처벌해야 할 언론이 무엇인지를 먼저 떠올리게 만든다. ‘열망의 도덕성’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의지가 아니라, ‘시민이 원하는 처벌의 정당성’으로 왜곡된다. 

 

언론보도 중재가 없다는 픽션적 공백

 

언론개혁은 분명히 필요하다. 그러나 언론개혁이 조선・동아・중앙・매경의 종편 재승인 거부와 한겨레・경향의 종편 승인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채영길 교수의 글처럼 이 문제를 단지 법리적 정합성이나 개정안에 대한 찬반으로 접근할 수는 없다. ‘열망의 도덕성’보다 더 타당한 개념은 차라리 아감벤(G. Agamben)이 말했던 예외상태, 그것도 정치적으로 만들어진 ‘픽션적 공백’으로서의 공백지대다. 법이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는 순간은 법체계 내 정합성이 아니라 현실에서 벌어진 사태에 그것이 적용될 때다. 법 조항의 모든 단어가 현실에 일대일로 대응할 수는 없다. 문자와 현실 사이 존재하는 공백을 해석과 판례로 메우는 것이 바로 권력이다. 그런데 때로 권력은 작동하고 있는 법이 현실을 포괄하지 못한다며 개정을 요구한다. 당연할 수 밖에 없는 법과 현실 간 공백의 경계- 법 적용의 한계 -는 지워버리고 애초에 그런 법이 존재하지 않은 예외상태로 상정하는 것이다.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배 개정안은 허술하지만 존재하며 그 작동은 미미한 언론에 대한 시민의 항의와 배상 경로를 공백지대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배 반대 의견은 시민의 항의와 정당한 요구를 거부하겠다는 집단 이기주의로 읽히고 만다. 징벌적 손배는 필요하다. 그러나 그 개정안은 지난 몇 년 간 언론중재위원회의 중재결정과 배상액, 민・형사 소송의 부족한 결과만을 놓고 정당성을 얻기는 어렵다. 시민의 피해와 항의가 왜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지, 예컨대 방송사의 시청자위원회나 언론사의 독자권익위원회 같은 곳은 왜 중재 역할을 하지 못하는지, 시민의 피해 사례와 부족했던 배상의 전례를 지적하며 시민사회단체가 적극적으로 개정안을 내놓아야 했다. 물론 이러한 형식적 절차의 부족함은 언론이 먼저 인정하고 대처했어야 할 문제다.

 

시민이 아닌 정부여당이 징벌적 손해배상 개정안을 제출한 것은 국회의원이나 장관이 언론을 통해 입은 피해 때문으로 읽히기 쉽다. 그럼에도 부정의 요구로서 제기된 언론개혁의 ‘열망’을 지지정당을 떠난 모든 국민의 요구라고 말하며 개정안의 찬반으로 진영을 가르는 행위는 지극히 협소한 정치적 행위다. 1980년대 영국의 대처 수상이 노동당 뿐 아니라 보수당까지 싸잡아 비판하며 자신의 발언이 곧 국민의 목소리임을 자처했던 ‘복화술’과 다를 바 없다.

 

채영길 교수의 글은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배 적용 여부를 법리의 문제가 아닌 그 이상의 문제와 담론의 층위로 접근하자는 주장으로 읽힌다. 징벌적 손배의 법적 문제는 이미 충분히 논의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지금 지식인과 언론인, 그리고 시민사회에 필요한 것은 징벌적 손배에 대한 찬성 여론의 퍼센트라는 숫자 너머 그 언론개혁 열망을 분석하고 구체화하는 것이다. 언론개혁은 분명히 정치적 문제다. 그러나 그 정치는 여의도 정치가 아니라 더 넓고 구체적인 정치의 영역이다. 

 

주: 이 글은 연구자, 언론인, 시민들의 논의를 풍부하게 만들기 위한 글이지, 특정 언론사가 따옴표로 인용하거나 간접 인용할 소재로 쓰지 않았음을 알립니다. 아울러 이 글은 연구자의 자격으로 쓴 것이며 제가 속한 조직이나 단체의 공식 입장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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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 마감 시간이 지났으니 글을 올려도 되겠다. 투표소에는 갔다. 그러나 지역구와 비례 모두 기표는 하지 않았다. 투표율을 낮추지는 않았지만 득표율에는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이유는 두 가지다. 불과 2주 전까지만 해도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입법 취지를 훼손한 거대 양당의 위성정당에 대한 비판이 거셌다. 소수 정당들은 한 석이라도 확보해야 한다는 현실론으로 위성정당에 줄을 서면서 진보정치의 민낯을 보여주었다. 정치적 스펙트럼을 넓혀야 할 진보 정당이 스스로의 존재 기반을 무너뜨린 선거는 처음이었다. 최악의 선거였다.

 

또 다른 이유는 망가진 선거제도에 대한 비판은 투표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정당에 투표했는지의 물음보다 왜 기권했는지의 물음에 답할 말이 더 많다. 기권 이유에 대한 답변으로 21대 총선에 대한 비판이 가능하다면 이 또한 정치적 행위가 될 것이다. 선거일 전 주변에서 "그래도 투표해야 한다"는 권유에 이제 이렇게 답하겠다.

 

최선이 없다면 차악이라도 찍어라

 

공약도 그렇고 소속 정당도 그렇고 찍을 후보가 없었다. 대개 이럴 때는 뽑지 말아야 후보/정당을 먼저 제외하고 나머지 선택을 하게 된다. 이렇게빼기 선택을 하면 남은 후보/정당에는 이른바 ‘비판적 지지 하게 된다. 말이 '지지'이지 정확히 말하면 내가 지지하는 정당/후보가 아니라 당선되어서는 안되는 후보/정당을 향해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던진 차악의 후보/정당은 내 표를 자신들을 향한 지지로 인식할 것이다. 거대 양당 체계가 싫어서 00당에게 준 표는 00당을 지지하는 표가 아니다. 그럼에도 00당은 내 한 표를 갖고 자신들의 정치 활동에 대한 민심으로 왜곡할 것이다. 내가 원하지 않은 대의(representaion)에 왜 표를 주어야 하는가.

 

진보정당에 표를 주어서 영향력을 높여야 한다

 

맞는 말이다. 진보정당에 표를 주어 위성정당으로 기득권을 지키려는 세력에 대항할 힘을 실어줄 수도 있다. 그러나 20 국회에 의석이 없고, 당선가능성이 낮은 정당이라면대학 전면 의무교육 같은 실현가능성이 낮은 공약이 아니라 선거 이후에 지역에서 어떤 활동을 하겠다는 공약이 있어야 했다. 두세 명의 의원으로는 교섭단체도 구성할 수 없고, 쟁점 법안에 캐스팅 보트의 역할도 하기 어렵다. 지역구 의석보다 비례대표를 더 많이 배출할 진보정당이라면 입법 공약이 아니라 표를 준 시민, 분야, 지역에서 어떤 정치적 조직화를 하겠다는 계획이 더 유효하다. 그래야 선거 이후에도 지역 시민이 진보정당과 함께할 기회에 기대를 걸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약속을 진보정당은 곳도 없다. 소속 정당을 알리기 위한 출마, 비례대표의 득표를 위한 출마였다면 비용과 노력으로 이루려는 구체적인 목표가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다른 제도권 정당과의 비교를 위해국회 입성을 전제로 하는 특이한 공약”을 내세울 것이라면 국가혁명배당금당의 공약이 가장 훌륭했다. 진보정당 지역구 후보는 당의 비례대표 한 명이라도 당선 가능성이 있다면정기적인 지역주민 정책 간담회’, ‘000 동대문구 청원게시판 실행 계획을 제시하는 전략도 가능했다. 그럼에도 이번 선거에서 진보정당 시민과 함께 할 생활정치 청사진을 보여준 곳은 곳도 없었다.

 

정당을 보지 말고 사람을 보고 찍어라

 

사회적 소수자들일 수록 자신들의 요구를 듣고 /개정을 실행할 명의 국회의원이 절실하다. 플랫폼 노동자, 장애인, 성소수자의 인권 아니라 언론개혁, 검찰개혁 오래된 과제를 실행하겠다는 비례후보들은 많다. 선거 기간 동안 이들은 개인의 경력, 의지, 그리고 임무를 얘기한다. 그러나 이들은 당선 이후 소속 정당에서 어떤 상임위에 들어갈지, 어떤 당무와 당직을 맡을지 전혀 없다. 선거 때는 개인의 자질을 말하지만, 국회에 들어가면 정당의 일부가 된다. 자신을 지지해 시민과 단체를 만나는 시간보다 의원회관 안에서 의원총회 당내 회의, 당직에 따른 당무 수행에 쏟는 시간이 많다. 훌륭한 경력과 인품만으로 그에게 표를 없다. 특히 재정과 인력이 부족한 진보정당에서는 의원 명이 수행해 당무가 더욱 많다. “정당을 보지 말고 사람을 보라 하지만 사람이 보이는 때는 선거운동 기간 뿐이다.

 

NOTA가 포함된 영국 총선 투표용지

 

기권을 정치적 의사 표현으로 인정하라

 

장문의 변명을 이유는 투표에서 기권이 그저 기권표 한 장으로 계산되지 않 기권했는지 알기를 바라는 의도, 선거제도와 정당체제에 대한 비판을 하기 위함이다. 좋아하지 않는 비유지만, 잘못 출제된 문제의 잘못된 객관식 보기에서 하나만을 택한다면 문제의 오류에 눈을 감는 셈이다. 문제가 잘못되었다거나 정답이 틀렸다는 항의는 종종 있었다. 그러나 시험제도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항의하는 경우는 드물다. 21대 총선이 이 상태다. 위성정당의 적법성만이 이슈가 된 문제에 차이를 구분할 수 없는 보기가 주어진 시험을 인정하라는 강요다. 투표할 수 있는 권리가 투표를 해야 할 의무가 되었다. 

 

투표란 헌법에 명시된 참정권 중 가장 낮은 수준의 정치 활동이다. 특히 시민 스스로 만들지 않은 선택지에 기표를 해야하는 투표라면 더욱 그렇다. 만일 해외 사례처럼 <지지후보 없음>(NOTA: None of the above)이라는 선택지가 있었다면 기권하지 않았을 것이다. NOTA는 여러 방식으로 영국, 인도, 그리스, 미국의 네바다주,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스페인, 콜롬비아, 방글라데시, 불가리아 등에서 이미 시행 중인 선거제도다. '지지후보 없음'이라는 칸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영국처럼 투표 거부를 요청하는 정당이 출마하기도 한다. 

 

NOTA를 시행하는 일부 국가에서는 해당 칸에 기표한 표를 유효표로 인정하기 때문에 NOTA의 득표율이 다른 후보자들보다 높아 선거에서 이길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 최다 득표를 한 후보보다 NOTA의 득표율이 높을 경우, 당선인을 선정하지 않고 공석으로 두거나, 재선거를 치루기도 한다. 재선거를 하든, 차기 선거를 준비하든 각 정당은 이전과 동일한 후보를 공천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 기권표가 정당한 정치적 의사로 인정받는 것이다. 2013년 9월 인도 대법원이 NOTA 적용의 판결을 내리며 밝힌 이유는 지금의 한국정치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판결은 투표 시스템 전체에 걸친 변화를 불러올 것이며, 정당들로 하여금 깨끗한 후보를 내보내도록 강제할 것이다. 민주주의란 어떤 선택을 하느냐의 문제인데 유권자들은 (후보자에 대한 찬성표 뿐만 아니라) 반대표를 던질 권리도 얻게 될 것이다.”

 

시민이 만들지 않은 후보, 정당의 선거 전략으로 정해지는 후보들 속에서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는 세계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지역 풀뿌리 정치가 성장하려면 NOTA와 같이 반대표를 던질 권리와 시민 스스로 후보를 만들 수 있는 조직과 지원이 있어야 한다. 시민 정치활동은 정당이 선거 때만 눈길을 돌리는 지역과 사회 분야에서 지역 개발 정책 반대, 자율적인 문화예술 활동, 지역 노동자와의 일상 모임 등을 통해 힘들지만 꾸준히 이어져 왔다. 내 정치활동의 근거지는 이런 곳이며 총선 이후에도 지역시민과 함께 정당에 명확한 정책과 실행을 요구할 것이다. 무엇보다 선거법, 국회법 정치관계법에 주목할 것이다. 이번 21 총선이 나에게 교훈이 있다면 지역 민주주의의 절박함이다. 바로 그것이 기권표를 통해 알리려는 나의 정치적 의사다.

 


참고문헌: 정혜란, "아무도 지지하지 않을 권리에 대하여 아시나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공식블로그, 201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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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광고와 정체성의 정치학

: 국가주의와 민족주의 사이에서 방황하는 광고

  

김동원(공공미디어연구소 연구팀장)


“음악은 만국의 언어”라는 말이 있다. 음악가의 국적이나 언어에 대한 이해가 없더라도 듣는 이들의 감정에 직접 호소하는 언어 그 이상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육체의 언어라 할 수 있는 스포츠의 이미지들 또한 그런 언어이다. 차이가 있다면 스포츠에서는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역동적인 육체의 움직임이 한 순간에 펼쳐지며, 그 시점이 지나면 말로는 복기가 불가능한 시각적 이미지들이 포함된다. 2005년 5월 새벽에 케이블 채널을 돌리다 눈에 띤 축구 경기가 바로 그랬다.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열리던 AC 밀란과 리버풀의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이 중계되고 있었다. 전반에만 3골을 내주며 패색이 짙던 리버풀이 후반 11분부터 6분 동안 연속으로 3골을 넣던 장면, 그리고 숨 막히던 승부차기 끝에 우승을 차지하던 그날 밤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리버풀의 역사도 잘 몰랐고, 왜 그 우승이 중요했는지의 배경도 몰랐지만 나와 아무런 연고도 없는 팀의 경기를 그토록 긴장하며 본 기억은 이전에도 별로 없었다.


스포츠가 주는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언어나 문화가 달라도 오직 육체의 이미지 하나로 지구촌 모든 이들의 감정을 흔들 수 있는 강력한 순간의 메시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 그 이상의 언어인 스포츠의 육체적 이미지들은 역설적으로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언어에 취약하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한일전 야구경기에서 이승엽의 타구가 담장을 넘어가는 순간, “후지산이 무너지고 있다”는 해설자의 말 한 마디는 예기치 못했던 경이의 순간에 두 나라 간의 역사적 갈등을 한 마디로 응축하여 의미를 부여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스포츠의 ‘비정치적인’ 정치성

공정한 심판에 의해 어떤 정치적 편견도 개입되지 말아야 한다는 스포츠는 말과 문자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에 따라 일순간에, 그것도 너무도 자연스럽게 강력한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이미지들을 만들어 낸다. 바로 이런 “비정치적인 정치성” 때문에 올림픽이나 월드컵과 같은 국가 대항전은 고도의 정치적 담론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 금메달은 해방 이후 지금까지 ‘국가=민족=대표 선수’라는 신화의 원형(archetype)이 되어 왔다. 물론 해방 이후 모든 국제 경기는 선수 개인이 아니라 국가와 국가의 승부로 여겨지던 냉전 시대의 또 다른 전쟁터였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1984년 LA 올림픽은 동서 양 진영이 각각 보이콧했던 지극히 ‘정치적’ 대회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선수 개인과 국가의 동일시(identification)는 당연한 것이었고, 금메달은 개인의 성취가 아니라 국가의 우월함을 증명하는 수단이었다.


그러나 국가만이 유일한 정치적 주체는 아니었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 육상 200m 시상식에서 1위와 3위를 한 미국의 두 흑인 선수가 성조기를 바라보지 않고 검은 장갑을 낀 손을 치켜 올린 사건은 상당한 파장을 몰고 왔다. 1960년대 미국에서 벌어지던 흑인인권운동의 연장이었던 이 사건은 올림픽 직전 흑인 선수들의 보이콧을 선언했다가 취소한 “인권을 위한 올림픽 위원회(OCHR)”가 그 배경에 있었다. 국가는 흑인 선수를 단지 자국의 영광을 위한 수단만으로 삼았고, 흑인들 역시 백인들로부터 미국인이라는 인정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스포츠를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이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들어 올린 두 개의 검은 장갑은 올림픽이 단지 국가만이 아니라 인종과 같은 정체성 정치 또한 벌어질 수 있는 장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어떤 “대한민국”인가?

올림픽이나 월드컵과 같은 국가 대항의 스포츠 이벤트는 높은 시청률과 몰입도로 광고를 비롯한 마케팅의 호기로 여겨진다. 하지만 높은 시청률과 몰입도는 단순한 영상 이미지가 아닌 국가, 인종, 민족, 지역과 같은 다양한 정치적 정체성에서 비롯되며 다시 그것을 강화하는 기능을 한다. 광고의 메시지는 이런 정체성들과 어떻게 접합하는가에 따라 천박한 상술이라는 질타를 받을 수도, 아니면 자연스러운 브랜드 가치 상승이라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이런 예측불가능성을 잘 보여준 사례가 이번 동계 올림픽을 겨냥했던 E1의 김연아 TV광고였다. 물론 주목받는 스포츠 스타를 모델로 내세운 광고들은 많았다. 예컨대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 이상화 선수를 내세운 기아 자동차의 TV광고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E1의 광고와 기아 자동차의 광고는 전혀 다른 커뮤니케이션 구조를 갖고 있었다. 많은 관심이 집중되고 모델의 인지도가 높아지는 스포츠 이벤트 기간에는 그 광고 모델이 어떤 대상과 동일시되는지가 중요하다. 앞의 언급처럼 잠재된 국가나 민족 같은 정치적 담론들은 비정치적인 스포츠 선수의 이미지에서 몇 줄의 텍스트만으로도 쉽게 촉발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광고가 재현하려는 정체성과 시청자들이 스스로 구성하는 정체성 사이에 충돌이 벌어질 때 발생한다.



기아자동차의 광고는 전형적으로 이상화 선수의 성실한 노력과 발군의 기량을 기아자동차의 “놀라움”과 연결 짓는 평범한 동일시 전략을 취했다. “좋은 날이다 / 데이트하기 좋은 날이다 / 쇼핑하기 좋은 날이다 ... 그러나 최고가 되기엔 더 좋은 날이다”라는 텍스트는 그런 성실함을 이상화 선수 스스로의 말처럼 재현해 내고, 이를 자연스럽게 기아자동차의 이미지로 이어 간다. 그러나 E1 광고는 김연아 선수와 기업 브랜드의 동일시가 아니라 거꾸로 김연아 선수를 대상화(objectification)시키는 전략을 취했다. 이는 “너는 김연아가 아니다 / 너는 4분 8초 동안 숨죽인 대한민국이다 / 너는 11번을 뛰어오르는 대한민국이고...”에서 잘 나타난다. 김연아 선수는 대한민국과 동일시가 되었는데, 이때의 대한민국은 지극히 모호한 대한민국이다. “4분 8초 동안 숨죽인 대한민국”은 국민으로, “11번을 뛰어오르는 대한민국”은 김연아 선수로 해석될 수 있다. 여기에 “대한민국이 대한민국을 응원합니다”라는 마지막 텍스트는 그 모호함을 증폭시킨다.



광고 모델과 동일시 대상의 관계가 중요한 이유는 광고의 발화자(source)와 수신자(receiver)의 관계 때문이다. 기아자동차의 TV광고에서 발화자는 여성의 목소리로 텍스트가 읽혀지는 탓에 이상화 선수로 여겨지고, 이 메시지를 듣는 수신자는 시청자가 된다. 그러나 E1의 TV광고에서는 “너는 김연아가 아니다”라는 첫 문장으로 인해 발화자는 기업(E1)이, 수신자는 김연아 선수가 된다. 이로써 김연아 선수는 특정한 기업에 의해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대한민국”이 되라는 명령을 수행할 대상이 되어 버린다. 따라서 수신자의 자리를 내 준 시청자들은 도리어 광고를 평가하는 평론가, 나아가 김연아 선수의 정체성을 강요하는 기업을 질타할 후원자(supporter)의 역할을 맡게 된다. 결국 이 광고는 김연아 선수를 기업의 이미지와 분리시키고, 시청자들에게는 김연아 선수를 어디에 동일시해야 할 지 알 수 없는 모호한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대한민국이 대한민국을 응원합니다”라는 마지막 텍스트는 그런 모호함을 잘 드러낸다. 제작 의도에서는 ‘국민으로서의 대한민국’이 ‘대한민국의 상징이 된 김연아’를 응원한다는 뜻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김연아 선수가 수신자이자 대상화되어버린 광고 텍스트에서 대한민국은 ‘국민’이 아니라 김연아 선수에게 정체성을 강요하는 ‘국가’가 되어버리고 발화자인 기업은 국가와 같은 위치에 놓인다.

 

국가를 벗어난 민족 정체성의 “우리”

이번 동계 올림픽은 국가 대항 스포츠 이벤트에서 처음으로 한국의 “국가주의(statism)”와 “민족주의(nationalism)”가 분리되어 나타난 때로 볼 수도 있다. 러시아로 귀화한 안현수 선수는 빙상연맹을 비롯한 국가 주도의 체육 시스템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몸으로 증명한 사례가 되었다. 비록 그가 한국의 국가대표가 아니었더라도 시청자들은 그를 조국을 버린 반역자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그가 버린 ‘국적’인 대한민국과 여전히 그를 응원하는 대한민국은 전혀 다르다. 국적인 대한민국은 선수 개인의 역량을 이용하며 선수를 자신과 동일시하려는 국가라면, 그를 응원하는 대한민국은 국적(국가)이 달라도 여전히 우리와 같음을 인정하는 민족이다. 제도와 체제로서의 대한민국이 국가라면, 국적을 떠나 같은 언어와 문화, 그리고 같은 경험을 가진 민족은 “우리”가 된다. 그래서 김연아 선수에 대한 심판 채점에 강력한 항의를 제기했던 국내 팬들의 분노도 ‘국가 대 국가’의 수준에서 이해될 수 없다. E1 광고에서 거부당한 대한민국이 김연아 선수에게 한없는 책임을 부여한 국가였다면, 러시아의 ‘편파 판정’에 항의한 대한민국은 누구의 지시로 구성된 ‘국민’이 아닌 역사적 경험에서 스스로 부여한 동일성의 산물, 즉 “우리”라는 민족이기 때문이다.


김연아 선수를 내세운 동계 올림픽 E1 광고는 이런 점에서 단지 부정적 반응을 낳은 TV광고의 한 사례로만 볼 수 없다. 이 광고에 대한 시청자들의 반응은 글로벌 시대에 변화하는 정체성의 문화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글로컬라이제이션(Glocalization)이라는 조어가 그렇듯, 글로벌 시대는 맥도날드와 코카콜라의 전지구적 확장을 뜻하지 않는다. 도리어 산업과 금융의 전지구적 순환이 가속화되며 자본은 균등해 지지만, 그 소비자/시청자들은 국경으로 나눌 수 없는 다양한 정체성을 구성해 나간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민족주의의 발흥이다. 달리 말하면 민족보다는 특정한 집단이 스스로 상상하는 공동체(imagined community)인 “우리”가 더 적합한 개념일 것이다. 앞으로 두 차례의 대형 스포츠 이벤트가 더 남았다. 6월에 열릴 브라질 월드컵에서 대표팀은 러시아(!)와 조별 예선 1차전을 치른다. 월드컵이 끝나고 9월에는 다시 한․중․일이 격돌하는 아시안게임이 예정되어 있다. 두 기간 동안 모두 외쳐질 “대한민국”은 어떤 대한민국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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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 논리학까지 따지지는 않더라도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전형적인 특징 중 하나는 주어와 술어의 전도이다. 언젠가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경제학의 물신성을 언급하며 이들은 “자본은 어떻게 생산하는가”를 물을 뿐, “자본이 어떻게 생산되는가”를 묻지 않았다고 날카롭게 지적한다. 생산양식의 역사에서 자본이란 노동이라는 인간의 활동이 어떠한 관계를 취하는가에 따라 만들어지는 대상(object)이다. 그럼에도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이 대상이 어떻게 노동을 만들어 내는가라는 전도된 물음으로 시작한다. 이런 문제틀은 ‘정통 마르스크주의’를 자처하는 진보 진영에서도 마찬가지로 공유하고 있기에, 이들 역시 “자본이 어떻게 노동을 착취하는가”를 얼마나 정교하고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다. 회사가 있어야 일을 할 수 있다는 상식 역시 바로 이렇게 전도된 문제틀의 반영이며 이로부터 이른바 노동조합 ‘경제투쟁’의 한계가 노정된다. 

요 며칠 간의 미디어렙 파동과 시민사회 단체들 간의 대립을 단지 미디어 운동판의 문제로만 국한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코바코(KOBACO)의 방송광고판매 독점이 위헌이라는 판결이 내려진 이후 그 판매를 대행할 미디어렙의 체제를 어떻게 구성할지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이 판결이 내려진 시점은 2008년 11월로 종합편성채널의 광고영업방식은 구체적으로 논의되지도 않던 시기였다. 오히려 이 판결로 우려되는 지점은 미디어렙사들의 난립과 지상파 방송사들의 직접영업으로 인한 언론의 전면적인 자본화였다. 개인적인 기억을 더듬어보니 2010년 말에 썼던 한 내부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현재 미디어렙 관련 논의의 핵심은 ‘1공영 1민영’, ‘1사 1렙’ 등을 결정짓는 경쟁유형 확정과 MBC의 미디어렙 위상, 종합편성채널 사업자의 방송광고 판매를 미디어렙에 위탁할지 여부를 정하는 업무영역 등으로 볼 수 있다. 특히 MBC의 미디어렙 위상은 종합편성채널 사업자의 미디어렙 위상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여야는 6월 국회에서 미디어렙 법안을 처리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함께하고 있으나 소유구조는 공영이면서도 재원은 광고를 통해 조달하는 MBC의 광고를 공영과 민영 미디어렙, 어느 쪽에 둬야 할지에 대해 여야 모두 당내 의견마저도 엇갈리고 있는 게 현실이다. MBC가 1사 1렙으로 갈 경우, 2010년 3월 제정된 방송통신기본법 제5조에 의해 동일 서비스엔 동일 규제를 적용해야 하는 ‘수평적 규제’ 체계의 원칙을 받아 종편채널사업자에게도 광고 직접영업을 제한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함의를 갖는다. 현재 MBC는 ‘1사 1렙’을 주장하고 있으며, 시민사회단체는 MBC가 공영미디어렙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피력하고 있다. 언론노조는 이에 대한 언급이 빠진 미디어렙 단일안을 내놓으며 논의에서 후퇴한 가운데 민주당은 국회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6월 중 당론을 채택할 예정이다.”(2011.12. 공공미디어연구소 내부 보고서) 

미디어렙 논의의 핵심은 지상파의 광고 직접영업을 어떻게 방지할 것인가, 그리고 지역방송과 같은 취약한 재정을 가진 미디어들에게 최소한의 생존권을 어떻게 보장해 줄 것인가의 문제였다. 여기에 종편의 미디어렙 포함 여부는 지상파 방송사들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에 따라 달라질 종속변수였다. 2010년 12월 종편 사업자가 선정되고 이들에 대한 특혜 목록을 점검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미디어렙의 논의에 종편이 포함되기 시작했다. 이때의 논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종편은 빠르면 9월 중에 개국을 하겠다는 계획을 공표한 상태에서, 이 전에 미디어렙법안을 확정하지 않으면 그 종속변수인 종편이 광고직접영업에 나설 것이며, 이로 인해 자사의 광고 직접영업을 노리고 있는 지상파 방송국들이 일제히 종편을 핑계로 법안의 부재 기간 동안 자사의 미디어렙을 설립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이러한 논의의 순서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조중동 종편 개국을 전후로 내년 총선과 대선에 미칠 이들의 영향력을 우려하면서부터였다. 안철수 신드롬을 필두로 정권교체에 대한 기대, 아니 욕망이 더욱 커질수록 자본보다 정치권력이, 더 나은 진보보다 “닥치고 반MB” 전선형성에 몰두하게 된 야권과 진보진영의 담론이 그러하다. 미디어렙 법안 역시 광고 직접영업을 통한 지상파의 자본화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내년 선거 국면에서 어떻게 매체들을 견제할 지에 대한 문제틀로 전환되었다. 이런 문제틀은 곧바로 미디어렙 논의의 한 부분이자 그 대상이었던 종편의 미디어렙 포함 여부를 전면에 내세우는 전도로 이어졌다. 요컨대 “미디어의 자본화를 막기 위한 미디어렙”에서 “조중동 종편을 막기 위한 미디어렙”으로 초점이 달라진 것이다. 이런 전도는 결코 낯설지가 않다. MB 정권의 출범은 곧 과거 노무현 정권에 대한 노스탤지어의 시작이었으며,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을 되찾기 위해 더 나은 진보보다 일단 MB를 몰아내는 것이 우선 과제라는, 갱신된 그러나 오래된 비판적 지지의 재판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미디어렙 문제에서도 미디어 시장 전체의 자본화에 대한 저항보다 일단 “조중동 말살”이라는 당면과제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등장했다. “조중동 종편을 막기 위한 미디어렙”을 주장하는 이들은 종편을 막을 수만 있다면 미디어렙 법안의 부재로 도래할 지상파(특히 MBC)의 직접영업과 자본화를 허용할 수 있다는, 그리하여 향후 반MB 전선에 유리한 미디어 진영을 구축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지금 벌어진 미디어렙 논란을 단지 언론노조와 시민사회 내부의 의견대립, 혹은 밥그릇 싸움만으로 볼 수는 없다. 설령 미디어 운동이라는 옛날식의 ‘부문 운동’이라 해도 상관없다. 부문 운동이라는 구체적 현실에서 점철되는 위험한 논리들은 다시 정권교체와 같은 보다 추상적 수준의 운동에서도 동일하게 재생산된다. 언론, 예술, 문화, 교육 등의 얼핏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운동판에서 그러한 논리가 관철될수록 정치라는 광범위한 담론의 장에서 그것은 너무 쉽게 당연시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번 미디어렙 논란에 잠재된 전도된 문제틀은 더 큰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조중동 종편을 막기 위한 미디어렙”이란 논리는 정권교체를 위해서라면 미디어 운동 또한 여기에 복무해야 한다는 전형적인 ‘도구적 언론관’의 재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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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며칠 전부터 동대문구 일대엔 묘한 플랜카드가 곳곳에 걸려있다. “부자급식 중단하고, 저소득층 급식 지원 확대하자.” 아침 출근길 건널목에 서 있는데 옆의 아주머니들 하시는 말씀. “그니까... 왜 돈 있는 얘들한테도 공짜로 밥을 준다는거야?” “그럴 돈 모으면 없는 애들 급식비 더 싸지잖아.”한동안 여러 일들로 잠시 잊고 있던 ‘보편 급식’이란 이슈가 이젠 언론에서도 사라지고, 트위터에서도 찾기 힘들건만 이렇게 동네 구석구석에서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이것저것 다 관두고 내 관점에서 정리하면 이런 얘기다. 저 플랜카드의 호소력이란 “모두가 똑같이 낸다고 생각하는 세금으로 돈 많은 얘들 밥까지 챙겨줄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읽히면서 그 힘을 발휘한다. 도대체 저소득층의 기준이 어디까지이고, 그런 기준을 어떻게 만들며 그 기준을 받아들이는 아이들의 마음이 어떨지는 너무 많은 얘기들이 나왔으니 또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겠다. 단지 모두가 알 만한 사실 몇 가지가 확실하다. 급식예산을 편성할 서울시 예산은 서울시민 모두가 똑같이 낸 세금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 이면에는 부자/저소득층이라는 고리타분한 분열 전략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2.
1970년 초 뉴욕. 좋건 싫건 지난 20여 년 동안 미국의 복지체제는 두 바퀴로 굴러갔다. 한 축은 공무원들까지 포함하는 조직화된 노동자들의 투쟁이 얻어낸 복지 시스템과 또 한축은 급격한 도시화로 불거져 나온 이민자, 소수인종, 빈민들의 ‘사회질서교란행위’로부터 당시로선 새로운 유형의 사회운동들의 요구들을 틀어막기 위해 지급했던 복지 시스템이 그것이다. 전자는 연방정부의 몫이었고, 후자는 지방정부(주)의 몫이었다. 1970년대 초 오일쇼크로 격발된 공황의 파고는 뉴욕시로 하여금 자신이 감당해 할 복지비용을 빚(채권)을 내며 충당했다. 문제는 1975년 2월 뉴욕시가 추가로 발행하려던 채권을 은행가협회에서 더 이상 못사주겠다며 버티면서 시작됐다. 다급해진 뉴욕시는 대부분의 자본가들까지 끌어들인 이른바 “비상재정관리위원회”를 만들면서 진화에 나섰다. 어쨌든 시의 돈이 없으니 긴축재정의 이름으로 복지지출과 공공서비스 노동자(병원, 학교, 교통, 청소, 공원 노동자 등)들을 쳐내면서 그 비용을 줄이고, 공공요금은 올려버렸다. 문제는 채권이었다. 뉴욕시가 이 채권을 처리한 방식이야 말로 기가 막혔다. 공무원들 중 감원을 피한 이들의 연기금으로 이 채권을 사버린 것이다. 다시 말해 복지 시스템의 한 축을 이루던 조직 노동자들의 복지급여를 떼어내어 다른 한 축인 ‘없는 놈들’의 복지비용을 충당한다는 말이었다. 그 결과는? “모두가 똑같이 힘들게 버는데 내 돈이 그 빈둥대는 놈들한테 들어가?”란 말이 대세가 돼버렸다. 이렇게 시작된 노동계급의 분열전략은 실로 성공적이었다. 1980년대 우리가 지금 기억하는 대도시 뉴욕, 그러니까 “I ♥ NY”라는 저 유명한 로고는 이처럼 끔찍한 분열전략의 공세가 성공한 이후 자랑스럽게 거리에서 휘날리게 되었다.

#3.
1970년대의 뉴욕과 2011년의 서울은 분명히 다르다. 그럼에도 적어도 담론의 수준에서만큼은 부르주아 담론의 고유함, 즉 동어반복이라는 속성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40여년 전 뉴욕에서는 “빈둥대는 놈들한테 내 돈을 줄 수 없어”였다면, 2011년 서울에서는 “잘 버는 놈들 밥값까지 내가 왜 내주나?”로 바뀌었을 뿐이다. 욕을 할 사람과 욕을 먹을 사람들이 뒤바뀌긴 했으나, 문제는 복지시스템이 결국 우리 모두의 임금으로 버텨간다는 것, 그리고 그 복지시스템을 둘러싼 소위 정책 논쟁이란 이렇듯 철저히 계급 내 분열을 목표로 한다는 점은 동일하다. 정확히 말하면 이런 담론 전략은 “계급 내 분열”이 아니라 “부자와 저소득층”이라는 또 다른 계급 정체성, 닫힌 정체성의 창출이다. 오래된, 그러나 여전히 강력한 계급투쟁과 담론의 정치. 어디까지가 정치이며 경제이고, 어디까지가 실천이며 담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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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치에서 자유롭지 않다.”

한 기자가 있었다. 1936년 취재차 갔던 스페인에서 그는 펜과 수첩 대신 낡은 소총과 허름한 군복을 입고 의용대에 입대한다. 단지 파시즘에 대항하는 전쟁이라는 이유만으로 남의 나라 전쟁에 참여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스페인에 처음 왔을 때, 그리고 그 얼마 동안도, 정치적 상황에는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알지도 못했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만 알았지, 어떤 종류의 전쟁인지도 몰랐다.” 1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 내전이 종식될 무렵 그는 모든 자유주의자들과 혁명세력들이 막아내려 했던 프랑코의 파시즘보다 더 무서운 적이 바로 곁에 있었음을 깨달았다. 전선의 참호에서 함께 싸웠던 동지들이, 자신을 비롯한 수많은 이들을 프랑코의 사주를 받아 전쟁을 패배로 이끈 “트로츠키주의자”로 몰아 즉결 처형에 부쳤던 것이다.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여 영국으로 탈출한 그는 공산당 계열의 거의 모든 신문들이 스페인에서보다 더 무서운 숙청의 펜을 휘두르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울분과 억울함에서, 아니 그보다는 자신이 처음으로 맡았던, 짧지만 강렬했던 바르셀로나 혁명의 내음을 잊지 않기 위해 그는 한 편의 르포를 써내려갔다. 그 르포의 제목은 <까딸루니아 찬가 Homage to Catalonia>, 그 기자는 바로 조지 오웰(George Orwell)이었다.

오웰은 이 전쟁 이후 “내가 어디에 서 있는가를 알게 되었다”고 회고하며 그 이후에 쓰여진 모든 글의 한 줄 한 줄이 "정치적"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기자로서 그에게 전쟁은 취재해야 할 사실들(fact)의 연속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그에게 전쟁은 끊임없는 반성과 번민, 그리고 분노를 통해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게 된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을 것이다. 그 고통을 거쳐 훗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정치적 목적이란 세계를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욕망, 성취하고자 하는 사회가 어떤 사회여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보려는 욕망이다. 다시 말하지만, 어떤 책도 진정한 의미에서 정치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견해 자체도 하나의 정치적 태도이다.”

 

“국가라는 어처구니 없는 그 무엇에 목숨을 걸어야 하나?”

한 병사가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그는 친구들과 ‘객기’로 육군 항공대에 입대해 폭격수로 코르시카에 배치된다.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폭격하던 그는 “무슨 즐거운 놀이라도 하는 기분”으로, “헐리우드 영화에서 만들어 내는 영웅적인 무용담에 어찌나 철저히 세뇌가 되었는지” 37회의 출격 동안 죽음에 대한 어떤 두려움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전우들의 비행기가 격추되고 그가 탄 B-25 폭격기가 고사포에 맞아 포탑의 사격수가 부상을 당하자 이 전쟁에서 도망칠 생각만을 하게 된다. 60회의 출격을 끝으로 제대한 그는 약 10년 후 당시의 경험을 토대로 한 편의 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그 소설이 바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최고의 반전 소설 중 하나로 꼽힌 <캐치-22 Catch-22>, 그 병사의 이름은 조지프 헬러(Joseph Heller)였다.

“캐치-22”는 명문화된 적은 없으나, 모두가 알고 있는 조항으로 “정신이상자는 제대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정신이상자임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정신이상이 아니므로 제대할 수 없다”는 이율배반적인, 그 자체로 논리적 모순인 일종의 덫(catch)과 같다. ‘객기’로 뛰어들었던 전쟁에서 헬러는 전쟁이란 자신이 살기 위해 자신 이외의 모든 이들을 죽여야 하는, 그래서 개인의 목숨을 담보로 국가라는 관료주의가 벌이는 자기모순적인 범죄임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조국에 대해서도 소설 속 노인의 입을 통해 “국가라는 어처구니없는 그 무엇”이라는 신랄한 비판을 쏟아내고 만다. 이 비판의 매서움에 논리적 모순을 드러내는 특유의 풍자를 더해 이 소설은 60년대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미국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헬러 열풍(Heller cult)”을 불러일으켰다. 한 병사에게 전쟁은 조국을 위해 희생을 기꺼이 감수해야 할 애국의 장인지는 몰라도, 인간 헬러에게 전쟁은 “모든 인간의 광증이 남김없이 드러나는, 자신의 정상적 의식과 체제의 비정상적 논리 사이”에서 외롭게 투쟁해야 할 모순의 공간이었다.

 

전쟁기사와 전쟁소설은 다르다?

기사와 소설은 다르다고 한다. 기사는 팩트를 다루며, 소설은 픽션을 다루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이런 이분법을 넘어서면 기사나 소설이나 모두 사실 이상의 ‘의미’를 전달하는 이야기(story)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똑같은 연평도 포격 관련 팩트들을 보도하더라도 호전적 기사와 그렇지 않은 기사는 사실의 선택 문제가 아닌 기사가 주는 의미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연평도 포격 사태 이후 근 한 달간 우리는 지상파 방송의 메인뉴스들에서 무슨, 아니 어떤 이야기들을 들었던가? 포공격을 받은 면사무소 CCTV에 폭발음을 입히거나 포탄 연기에 CG작업을 더한 ‘극사실주의(?)’가 등장했고, 그래픽 화면을 통해 3D 보도를 연습하기도 했으며, 이스라엘과 같은 다른 국가들의 대응을 소개하는 ‘해외사례’를 이야기하기도 했다.

 

당연히 뉴스보도에서 오웰의 ‘정치성’이나 헬러의 ‘모순어법’을 드러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교전 상황에서 사실 이상의 의미를 말하는 이야기로 뉴스를 본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팩트의 선택을 넘어선 태도, 곧 전쟁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천안함 때에도 그랬지만 이번 연평도 교전 이후의 보도들에서도 확전 가능성만을 이야기 했지 전쟁이 아닌 다른 선택은 없는지, 교전 직후 “해병대 입대 자원자가 늘었다”는 군의 발표를 반복할 뿐 전방에 자식을 보낸 부모들의 심정이 어떠한지를 다룬 기사들은 얼마나 있었던가. 교전 이후 근 한 달 간의 보도는 그야말로 3류 소설에 지나지 않았다.

 

오웰에게 스페인 내전은 확인할 길 없는 루머와 사실들이 난무하는 혼돈의 장이면서도, 뚜렷한 ‘정치성’을 가지고 임해야 할 또 다른 전장이었다. 이 ‘정치성’을 언론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객관성에 위배되는 당파성이라 해도 좋다. 그러나 오웰에게 정치성이란 그의 말처럼 지금 여기에서 누구의 편을 드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성취해야 할 사회가 어떠한 사회인가”라는 미래의 문제였다. 오늘 우리에게 연평도 교전 이후, 아니 이명박 정권 이후 이 분단 상황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며 지금을 보도하는 언론이 있었던가? 헬러에게 전쟁이란 국가라는 미쳐버린 체계의 비정상성과 국민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개인이 자신을 보존하려는 정상성 사이의 분열에 다름 아니었다. 극도의 확전 위험을 가져올 “연평도 훈련 강행에 국민적 신뢰와 성원”을 보내자는 언론은 과연 정상인가? “인내가 아닌 강한 대응만이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냉전시대의 모순적 수사(rhetoric)를 재탕하는 그 비정상성을 어떤 언론이 폭로하고 있는가?

 

국익과 알권리의 사이에서

한국언론진흥재단토론회ⓒ 미디어스 송선영


얼마 전,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전시-비상상황에서의 취재보도 준칙”이라는 주제의 토론회가 열렸다고 한다. 충분히 예상했던 제안들이 나왔다. 안보와 관련된 “국익”과 민주주의의 기반인 “국민의 알권리” 사이의 충돌이 전쟁이나 비상상황 시에 더욱 민감해 진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구체적인 준칙을 얼마나 세밀하게 만드는가의 문제 이전에, 이미 이런 논의 자체에는 보다 큰 이익을 추구하는 “국가”와 알권리를 가진 “국민” 사이에 냉정한 중립자로서의 기자라는 지독한 직업의식(professionalism)의 이데올로기가 도사리고 있다. 정확히 물어보자. 기자가 존중해야 할 국익이란 향후 국정 주도권을 노리는 특정 세력의 이익이 아니었나? 국민의 알권리란 내가 알고 싶은 정보에의 접근권이 아니라 기자들의 취재권이 아니었나? 특히 전쟁과 같은 극한의 상황에서 언론은 어떤 때는 국익의 이름으로 ‘국민’들에게 훈계를, 다른 때는 ‘국민’의 이름으로 국가에 비판을 날린다. 결국 국익과 알권리의 충돌이란 언론이 자신의 입지를 정하지 못했다는 혼동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정말로 언론이 전쟁과 같은 극한의 상황에서 올바른 ‘이야기꾼’이 되고자 한다면, 고통 속에서 자신의 정치성을 발견한 오웰의 반성과 매카시즘의 광풍에서도 국가에 대한 회의를 멈추지 않았던 헬러의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전쟁이란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없는, 그저 전쟁을 어떻게 보도해야 하는가라는 답만을 제공해 주는 “보도준칙”은 그래서 허무하다. 적어도 그런 준칙이 여전히 국익과 알권리 사이의 기만적인 줄타기를 위한 면죄부가 될 때는 말이다.

미디어스 2010년 12월 25일 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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