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 3.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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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ey Harris & Ali Farka Toure>

  블루스만큼 폐쇄적이면서도 개방적인 음악이 또 있을까. 블루스를 한 번이라도 연주해 본 사람이라면 그 단순한 코드진행과 멜로디에서 무한한 변주의 매력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블루스를 단지 귀로만 듣는 이에게 이 단순함은 곧 지루함으로 바뀌기 일쑤이다. 비슷비슷한 음의 진행은 그렇다쳐도 가사까지 매일 사랑타령이니 앨범 전곡 감상이란게 고역일 수 밖에... 그러나 Rock'n Roll, R&B, Jazz의 Blue note, 심지어 오늘의 Hip Hop까지 블루스의 영향권 내에서 벗어난 미국태생의 음악을 찾기엔 쉽지 않다. 앨비스의 프로듀서가 멤피스에서 유명했던 블루스 제작자였던 사실도 블루스가 얼마나 많은 아종과 변종들을 낳았는지 보여주는 한 예가 될 것이다.

  대중음악의 진화에서 폐쇄와 개방은 동일한 균형과 교차로 진행되지 않는다. 블루스가 자신의 아종을 낳을 수록 그 아종은 또 다른 종으로 변형되어 진화의 나뭇가지에서 더욱 멀어져 가기 때문이다. 스콜세지가 블루스의 역사를 "황홀하고 매력적인 스토리텔링의 문화사"라고 말한 이유는 무성한 나뭇잎에서 뿌리로 가는 여정이 단지 5음계 형식의 원류를 찾기 위한 것만은 아닐 듯 하다. 블루스가 아종을 낳을 수록 잊혀져 간 것은 그 음계가 아니라 바로 지금의 대중음악이 끌어안지 못하는 미국 역사의 한 축이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스콜세지의 블루스 여정은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들이 첫발을 내딛은 미시시피 델타에서 2000년대를 살아가는 코리 해리스(Corey Harris)를 통해 시작된다. 해리스의 여정은 1930년대 미국의 민요수집가였던 존 로맥스와 앨런 로맥스 부자의 기록에 상당부분 의지한다. 그럼에도 윌리 킹(Willie King), 쟈니 샤인스(Johnny Shines), 타지마할(Taji Mahal) 등이 떠올리는 기억들은 노예노동과 인종차별, 그리고 앞선 뮤지션들의 요절의 역사에 대한 증언으로 손색이 없다. 어디 말 뿐이겠는가. 델타 선술집에서 "Spoonful"을 연주하던 Willie King의 모습은 블루스가 걸어온 소외와 포섭의 역사를 그대로 증언해 준다.(Cream이 휘황찬란한 앨버트 홀에서 Spoonful을 연주하던 모습을 떠올려보라..) 미대륙에서 블루스의 여정이 끝나는 곳은 블루스를 낳았던 아프리카 음악의 흔적을 발견한 미시시피 북부이다. 아직도 생존하고 있는 오타 터너(Otha Turner)의 피리와 손녀의 북소리는 해리스의 기타와 어울려 날 것 그대로의 블루스를 들려주지만, 북조차 허용되지 않았던 목화농장의 기억은 여전히 암울하게 남는다.

  스콜세지와 해리스의 여정은 이 북소리가 처음 울렸던 아프리카 서안의 말리에서 끝을 맺는다. 블루스의 고향(Home)에서 스콜세지가 보여주는 풍경은 마치 미시시피의 험난한 역사에 대한 보상처럼 느껴진다. 말리의 한 귀족이 들려주는 "코라" 연주는 과거 세네갈에서의 노예사냥을 잊게 해주고, 생존을 위해 연주했던 존 리 후커(John Lee Hooker)의 기타소리를 애증의 눈길로 바라보게 한다. 스콜세지가 말리를 찾은 이유, 그가 고향으로 가고 싶었던(Feeling like going home)이유는 말리 니아푼케의 한 귀족, 알리 파르카 투르의 입을 통해 나온다.

"Black American은 존재하지 않아요. Black만이 존재할 뿐이죠. Black이 모든 것을 잃었지만 음악만은 아프리카의 것입니다. 절대로 Black people이 아프리카로 올 때는 다른 나라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들의 고향으로 오는 것이지요."

  스콜세지의 블루스 여정은 흑인들의 영원한 파라다이스를 보여주면서 끝을 맺는다. 그러나 이러한 결말이, 아니 미시시피강에서부터의 여정이 씁쓸하게 느껴지는 것은 스콜세지 자신 역시 블루스가 겪어온 폐쇄와 개방의 불균형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대륙에서 블루스가 시작된 미시시피 연안의 흑인 역사는 잔혹한 자본의 시초축적의 역사일 것이다. 그러한 시초축적은 그가 블루스의 고향으로 그려낸 말리에서, 그리고 아프리카 전역에서 벌어지는 현재 진행형이며, 바로 지금 미국 안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폭력이기도 하다. "그리오"의 흔적이 사라진 말리, 노예사냥을 과거로 흘려보내는 니제르강에서 그려낸 블루스의 고향은 스콜세지 자신이 바라는 묘한 노스탤지어의 정서 그 자체이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스콜세지는 블루스가 왜 5개의 음만으로 무한한 대중음악의 진화를 이루어 낼 수 있었는지 증명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스토리텔링의 문화사'로서의 블루스는 흘러간 상처의 기록이며 도시인들이 바라는 고향의 향기처럼 한차례 박제된 기록으로 남아 버렸다. 루이지애나의 이름 없는 블루스 악사가 자신의 '고향'인 말리로 갔을 때,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30년대 미시시피의 목화농장일지도 모른다.

* 그리오: 과거 아프리카 부족 족장들의 노예로 축제와 발라드를 담당했던 하층계급

Posted by WYW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