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 3.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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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거룩한 속물들

김수영

 

  소설이나 시의 천재를 가지고, 쓰지 못해 발광을 할 때는 세상이란 이상스러워서, 청탁을 하지 않는다. 반드시 그런 재주가 고갈되고 나서야 청탁을 시작한다. 그러니까 무릇 시인이나 소설가는 청탁이 밀물처럼 몰려들어올 때는 자기의 천재는 이미 날아가 버렸다고 생각하는게 좋다. 일껏 하던 놀음도 멍석을 깔아놓으면 못한다는 말의 '멍석'이 청탁이 되는 예를 글쓰는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한번씩은 느끼는 것이 아닐까.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매일같이, 매달같이 너절한 신문소설과 시시한 글들이 쉴새없이 쏟아져 나올 수 있겠는가.
 
'속물론(俗物論)'의 청탁을 받고 우선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이런 얄궂은 생각과 쓰디쓴 자조의 미소뿐. 도무지 쓰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고, 붓이 철근같이 안 움직인다. 세상은 참 우습다. 그렇게 이를 갈고 속물들을 싫어할 때는 아무 소리도 없다가 이렇게 내 자신이 완전무결한 속물이 된 뒤에야 속물에 대한 욕을 쓰라고 한다. 세상은 이다지도 야박하다.

…(중략)…

 우선 나는 지금 매문(賣文)을 하고 있다. 매문은 속물이 하는 짓이다. 속물 중에서도 고급속물이 하는 짓이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매문가의 특색은 잡지나 신문에 이름이 나는 것을 좋아하고, 사진이 나는 것을 좋아하고, 라디오에 나가고, 텔레비에 나가서 이름이 팔리고, 돈도 생기고, 권위가 생기는 것을 좋아한다. 입으로야 물론 안 그렇다고 하지. 그까짓 것, 그저 담배값이나 벌려고 하는 거지. 혹은 하도 나와달라고 귀찮게 굴어서 마지 못해 나간 거지, 입에 풀칠도 해야 하고, 자식 새끼들의 학비도 내야 할 테니까 죽지 못해 하는 거지, 정도로 말은 하지. 그러나 사실은 그런 것만도 아닐껄...... 그런 것만도 아닐껄......
 그러다가 보면 차차 돈도 생기고, 살림도 제법 안정되어가고, 전화도 놓고, 텔레비도 놔야 되고, 잡지사나 신문사에서 오는 젊은 기자들에 대한 체면이나, 다음 청탁에 대한 고려를 해서도, 다락 구석에 처박아두었던 헌잡지 나부랭이나 기증받은 책까지도, 하다 못해 동화책까지도, 말끔히 먼지를 털어서 비어 있는 책꽃이의 공간을 메워놓아야 한다. 그리고 베스트쎌러의 에쎄이스트로 유명한 A, B, C의 뒤를 따라 자가용차를 살 꿈을 꾸고, 펜클럽 대회가 빠리와 미국에서 언제 열리는가에 신경을 써야 한다. 
 이
런 악덕은 누차 말해두거니와,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다. 그래서 나는 전법을 바꾸었다. 이왕 도둑이 된 바에야 아주 직업적인 도둑놈으로 되자. 아무개 아버지 같은 좀도둑이 아니라, 남의 땅에 허가 없이 집을 짓는 아무개 아버지가 도둑질을 한 집의 주인 같은 날도둑놈이 되자. 그래서 하다 못해 무허가의 죄명으로 집을 헐리고 때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 편이 낫다. 그 편이 훨씬 남자답고 떳떳하다. 즉, 나다.
 이 내가 되는 일, 진짜 속물이 되는 일, 말로 하기는 쉽지만 이 수업도 사실은 여간 어렵지 않다. 속물이 안되려고 발버둥질을 치는 생활만큼 어렵다. 그리고 그만큼 고독하다. 현대사회에 있어서는 고독은 나일론 재킷이다. 고독은 바늘만치라도 내색을 하면 그만큼 손해를 보고 탈락한다. 원래가 속물이 된 중요한 여건의 하나가, 이 사회가 고독을 향유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속물이 된 후에 어떻게 또 고독을 주장하겠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속물은 나일론 재킷을 입고 있다. 아무한테도 보이지 않는 고독의 재킷을 입고 있다. 그러니까 이 재킷을 입고 있는 사람은, 이 글 제목대로 '거룩한 속물' 즉 고급속물의 범주에는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것은 이 나일론 재킷을 입은 속물이다. 고독의 재킷을 입지 않은 것은 저급속물이지 고급속물은 아니다. 고급속물은 반드시 고독의 자기의식을 갖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규정을 하면 내가 말하는 고급속물이란 자폭(自爆)을 할 줄 아는 속물, 즉 진정한 의미에서는 속물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아무래도 나는 고급속물을 미화하고 정당화시킴으로써 자기변명을 하려는 속셈이 있는 것 같다. 이쯤 되면 초(超)고급속물이라고나 할까. 인간의 심연(深淵)은 무한하다. 속물을 규정하는 척도도 무한하다.......(이하생략)

[동서춘추 1967년 5월호; 창작과 비평 2001년 여름. 241-243쪽]

Posted by WYW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