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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renzo Quaglio II, <Aloys Senefelder>(1818, Lithograph, 28*23cm)

요즘 연일 TV와 신문에 매일뉴스가 되버린 “바다 이야기”와 정권실세 의혹설, “도박중독자”의 심각성 등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얼추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박정희 시절 소위 ‘회전당구기’ 수입 논란, 김영삼 시절 파친코의 대부 ‘정덕일, 정덕진’ 형제 사건, 그리고 카지노 대부 ‘전낙원’ 사건 등이 떠오른다. 정권과 도박의 밀애가 이렇게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니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면, 바다 이야기 사건은 이전 사건들과 달리 밀애설에 덧붙여 전국에 ‘도박중독’ 경계경보를 날리는 놀라운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런 시국엔 어디 호기심으로라도 과천 경마장에 가면 당장 ‘도박중독 양성반응자’로 몰릴 판국이다.

도박의 원칙은 간단하다. “돈놓고 돈먹기”다. 그러면 도박 이전에 돈이 있어야 하고 이 돈은 바로 자본주의 사회관계가 낳은 “화폐”라는 권력을 뜻한다. 영화 <바람의 파이터>에서 양동근의 친구로 나온 정태우의 ‘비즈니스’는 “파친코”였다. 서구에서 도박이 시민계급의 보편적인 오락으로 된 시기가 19세기라고 하니, 당시 일본에서 그런 나무통 “파친코”를 찾아보기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도 아마 도박이 일상 오락이 되고 중독자를 양산하기 시작한 때는 자본주의라는 삶의 방식이 곳곳에 스며들기 시작한 때와 일치할 지도 모른다.

도박이 그토록 매혹적인 것은 지루했던 기다림과 아까움을 한 번에 내쳐주는 ‘대박’의 기쁨 때문만이 아니다. 도박은 내가 이전 판에서 아무리 많이 잃었다고 해도 매번 ‘새로운 판’으로 다가온다. 하나의 판이 이전 판과 연관성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 그래서 도박이 갖는 ‘日新又日新’의 반복성은 벼락 맞아 죽을 확률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로또를 집어들게 하며 슬롯머신을 당기게 한다. 비연관성과 반복성에 우리가 이처럼 익숙할 수 있는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다. 먹고 살기 위해 행하는 “노동”, 그 자체가 이미 우리에게 비연관성과 반복성을 가르쳐 주지 않았던가. 아무리 정보기술이 도입되고 IT 종사자가 늘었다고 해도, 사무직이니 고급기술이니 하는 ‘정신노동’은 일순간 지루한 업무를 반복하는 “탈숙련 노동”으로 변한다. 더군다나 노동의 탈숙련화는 시각이나 청각과는 무관한 촉각, 즉 손동작에 의한 기계적 반응으로 행해진다. 끊임없이 볼트를 조이고 키보드를 두드리던 그의 손이 퇴근 후 끊임없이 슬롯머신을 당기는 되는 관성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도박의 목표가 돈이듯, 도박의 방식은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과 다르지 않다.

도박문제를 왜 사회 탓으로 돌리냐고 비난한다면, 내친 김에 더 가보자. 오늘날 자본이 증식되고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신용’이다. 한 기업의 총자본 중 순수한 자기 자본비율이 100%인 곳은 정말 드물다. 대부분의 자본은 ‘빌린 돈’으로 생산을 하고 그 생산한 상품이 우연의 바다인 시장에서 판매가 되어야만 자신의 가치를 증식시킬 수 있다. 물론 판매조차 대부분 신용카드 같은 소비자 신용이라는 또 다른 ‘빌린 돈’에 의해 가능하다. 금융 자본의 지위가 지배적이 될수록 자본의 증식과 생존은 이렇게 ‘외상 거래’에 의지한다. 이 거래에서 어느 한 마디가 끊어진다면, 곧바로 ‘공황’이라는 최악의 상황이 도래한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 전체가 공황/생존을 놓고 벌어지는 도박의 세계라고 하면 지나친 비약인가. 도박중독자가 일가족을 피폐하게 했다면, 금융자본의 도박은 97년 외환위기처럼 수백만의 사람을 거리로 내몰았다. 어느 쪽이 더 중증의 도박중독인가.

“전국민 도박중독 경계경보”는 반복의 일상화를 가르쳐준 노동과 노동자의 생계를 걸고 도박판을 깔아 놓은 자본을 개인의 병리학으로 은폐하고 있다. 진단을 내리는 의사, 처벌을 명령하는 판사, 그리고 이들을 한데 모아주는 미디어는 2006년 9월, 수많은 노동자들의 육체와 정신을 “감시하고 처벌”하는 중이다. 자본주의라는 삶의 방식이 범죄에 어떤 성격을 부여하는지 150여년전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경우든지, 범죄자는 한편으로는 도덕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비극적인 인상을 만들며, 이런 식으로 대중들의 도덕적이고 미적인 감정들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봉사’를 하게 된다. 범죄자는 형법 개론, 즉 형법 체계와 이 분야에서 이를 집행하는 법률가뿐만 아니라, 뮐러의 『죄악』과 실러의 『군도』, 『외디푸스왕』과 『리차드 3세』같은 비극은 물론이고, 미술과 순문학까지 생산해 낸다. 범죄자는 부르주아적 삶의 단조로움과 일상의 안전을 깬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그 사회가 정체하는 것을 막으며 불안정한 긴장과 민첩함을 야기시키는데, 만일 이런 것이 없다면 경쟁심의 자극조차도 무뎌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생산력에 자극을 준다.”(K. Marx, 『잉여가치학설사』, 제1부)

From W. Benjamin, 반성완 옮김(1983),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브에 관해서”,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강의노트 중 일부]

Posted by WYW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