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 7. 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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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론서”에는 흔히 두 가지 담론의 구조가 존재한다. 하나는 개론서의 각 장을 차지하는 사상가 혹은 이론가들의 압축된 개념들과 그 배치이다. 여기에서는 개론서에 등장하는 대가들의 목소리를 어느 정도 느낄 수 있고, 그들 사유의 편린들을 엿볼 수 있다. 대부분의 개론서를 평가하는 기준은 대가들의 핵심 개념을 얼마나 잘 발췌했는지, 그리고 그들의 학문적 궤적에 얼마나 충실하게 개념들을 배치했는지에 집중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또 다른 담론은 왜 그런 개념들이 선택되었고, 어떤 이유로 그것들의 배치가 정해졌는지, 나아가 수많은 대가들 중 왜 ‘그들’이 개론서라는 무대에 등장했고, 등장의 순서가 어떻게 정해졌는지 이다. 요컨대 담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선택과 배제’가 이중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하나는 대가들의 개념들을 대상으로 하며, 다른 하나는 대가들 자체를 대상으로 행해진다. 사실상 대가들을 소개하는 각 장(Chapter)들 내부에 배치되는 개념들은 개론서 전체를 관통하는 대가들에 대한 선택과 배제라는 담론의 한계 내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언젠가 힐쉬베르거(Hirschberger)가 “철학사의 서술은 또 다른 철학이자 철학-함”이라고 말한 것은 정확히 이러한 담론을 가리킨 것이다.

  결국 이중의 담론 구조를 갖는 개론서에서 중요한 것은 선택된 내용과 목록이 아니라, 그로 인해 배제된 것, 즉 담론의 경계 ‘외부’이다. 좋은 개론서란 바로 이 ‘외부’를 사유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하며 이 ‘외부’, 곧 개론서라는 텍스트의 ‘공백’이야 말로 유물론적 사유를 가능케 하는 장소가 된다. 만일 이 공백이 없다면, 개론서는 단순히 대가들의 개념을 단순재생산하는 복사본일 뿐이다. 메리필드의 『매혹의 도시, 맑스주의를 만나다 Metromarxism』는 이러한 외부와 공백이 드러나고 있는지, 아니 그것을 사유하게 하는지에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맑스주의 전통의 “도시적 변증법” 이라는 하나의 테마 속에서 펼쳐지는 8명의 대가들의 소개는 그것이 이전 시기 다른 전공과 주제 하에서 소개된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왜 메리필드는 스스로가 맑스의 저작 속에서는 도시연구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하면서도 그를 첫 등장인물로 삼았던 것일까?

Posted by WYW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