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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착륙의 진실>

  인류의 기록에서 가장 오래된 음모론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20세기 이후 가장 많은 음모론이 만들어진 나라는 바로 “미국”이다. 최근 가장 설득력 있는 음모론으로 여겨지는 딜런 애버리(Dylan Avery)의 <Loose Change> 역시 9/11테러의 배후가 다름 아닌 미국임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음모론의 역사에서 미국의 ‘지위’를 확인시켜 준다.

  대다수의 음모론에서 그 ‘배후’는 막대한 자본과 조직, 전 세계적인 활동반경, 사유에 앞서는 행동의 기민함을 특징으로 한다. 묘하게도 이러한 배후의 특징은 어네스트 만델(E. Mandel)이 설명한 후기 자본주의 범죄소설 속 탐정- 특히 007 -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와는 달리, 이 음모론을 최초에 제기하고 그것에 증거를 덧붙여 가는 이들은 철저히 개인적인 존재이며 때로는 상상력을 동반하기도 하는 사유의 능력에 의존한다. 음모론자들이 갖는 이러한 특징은 ‘배후’와는 반대로 초창기 탐정의 전형인 홈즈나 뒤팽을 떠오르게 한다. 요컨대 “구식 탐정과 최신식 범죄자”라는 대결구도가 음모론 텍스트의 생산과 수용의 장을 구성한다. 한 명의 외로운 탐정이 거대한 조직의 음모에 맞서 추론을 제기한다면, 그것을 읽는 우리는 그 탐정의 수사에 동조하도록 초대받는 셈이다. 이런 까닭에 음모론을 만들고 그것을 읽는 행위는 저 너머 어딘가의 진실을 찾는 일종의 “모험”이 된다.

당신이 바라는 모험으로...

  대다수의 정치경제학자들이 지적하는 자본주의의 태생적 한계는 바로 축적을 향한 자본의 과도한 경쟁이 낳는 “무정부성”이다. 특히 공황의 국면에서 잘 나타나는 이 무정부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삶의 조건에 일어난 변화를 일종의 ‘미스터리’로 여기게 한다. 우리의 경우 정말로 ‘새벽에 도적같이 찾아온’ 97년 외환위기가 이러한 미스터리의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나날이 세분화되는 분업화, 실체를 알 수 없는 가상자본의 가공할 속도 등은 우리로 하여금 몇 달 앞의 예측조차 불가능하게 할 정도이다. 그람시(A. Gramsci)는 이러한 자본주의 속 우리의 삶을 ‘강요된 모험의 과잉’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이 넘쳐나는 모험의 과잉에서 안정을 찾고자 하지만 동시에 진정한 모험, 즉 고난에 찬 현세를 벗어나려는 탈주를 꿈꾼다. 이러한 탈주는 분명히 자본주의라는 강요된 삶의 방식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주도 하에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는 모험’을 뜻한다. 바로 이 열망이 우리를 음모론이 초대하는 모험으로 인도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Loose Change>는 자본주의 속에 내재한 우리의 열망과 미국의 전쟁사가 결합한 절묘한 음모론이다. 9/11 직후 시작된 아프카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침공은 빈 라덴의 생포는 커녕 대량살상무기의 색출조차 이루지 못했고, 이라크 전의 (공식)전사자 수는 벌써 3000여명에 육박하고 있다. 더욱이 미국 내 테러에 대한 공포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 같은 미국의 상황은 9/11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의구심과 미스터리를 낳기에, 즉 음모론이 자라기에 가장 좋은 토양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결국 <Loose Change>를 통해 탐정으로 초대받은 미국인들은 설령 배후가 끝내 밝혀지지 않고, 그 결과를 알 수 없더라도 정부에 의해 강요된 미제사건으로서의 모험을 더 이상 바라는 것 같지는 않다. 도리어 그들은 이 한편의 ‘음모론’을 통해 9/11이 개인의 의지에 따른 미제사건으로 남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제기하는 추론의 타당성을 떠나 <Loose Change>가 일으킨 “효과”는 지금의 미국이 처한 상황의 중요한 징표임에 틀림없다.

위계의 텍스트

  그러나 모험으로의 초대가 음모론의 생산과 수용에서 벌어지는 반면, 음모론 자체의 텍스트는 역설적이게도 전혀 ‘모험’의 특징을 갖고 있지 않다. 음모론은 무엇보다 논리(추상)의 사다리 혹은 피라미드라는 구조를 갖는다. 예컨대 그 추론 형식의 최상위에는 ‘의혹’이 자리하고 그 의혹의 근거가 되는 몇 가지 사건들이 중간에 위치한다. 다시 각 사건들은 목격자, 보도자료- 특히 시각적 이미지 -, 과학적 근거 등의 세부적인 증거자료들을 하위에 갖는다. 이렇듯 위계(hierarchy)에 기반한 논리 구조는 아도르노(Th. Adorno)가 말한 계몽의 논리, 자본주의라는 합리성의 대표적인 사유형식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 사다리 혹은 피라미드는 워낙에 강력한 것이어서 하나의 증거자료에 대한 답변이 제기된다고 해도, 또 다른 의혹자료들이 피라미드의 한 자리를 채운다. 의혹에 대한 답변은 이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올라탄 ‘의혹’이라는 감정 자체가 사라지지 않는 한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견고함을 “황우석 교수를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서 이미 확인한 바 있지 않은가.

  음모론의 생산과 수용에 반영된 우리들의 ‘열망’과 음모론 텍스트 자체에 내재한 합리적 ‘사유’는 바로 “소외”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마치 상품은 그 자체의 회로를 가진 듯 나와 무관하게 움직이지만, 그것을 만들어 내는 활동력은 바로 나의 것이다. 자본주의를 부정하려는 탈주를 향한 나의 ‘열망’과 자본주의 체제가 만들어 낸 ‘사유’는 각기 다른 장소(topos)에서 작동하는 분명한 분리이다. 음모론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장소가 미국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미국이 자본축적에 가장 선진적인 국가라면, 음모론 역시 가장 자본주의적인 소외의 한 면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WYW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