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 7. 0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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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정립되어 온 모든 것들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필연적이거나 예측가능한 원인으로서의 텔레비전에 대한 이론도 아니며, 실천도 아니다. 도리어 현재의 공인된 이론과 실천은 효과이다. 따라서 그 이론과 실천이 도전받을 수 있는지의 여부는 매체의 고정된 소유권 혹은 그 제도의 필연적 성격에 달려있지 않으며 끊임없이 갱신가능한 사회적 활동과 투쟁에 좌우될 것이다.

Raymond Williams, Television: Technology and cultural form, Routledge, 2003(1974). pp.137-138.

  신문방송학과- 요즘은 ‘언론정보학’이라는 못지않게 모호한 이름으로 불리는 학과 - 강의를 하다보면 한 번은 말하고 넘어가는 테마가 “매스 미디어 효과연구”다. 태생부터 2차 대전 징병과 정치광고에 연원을 둔 이 접근법은 소위 “과학적 연구”라는 명찰을 달고 70년을 넘게 버텨오고 있다. 몇 년 전, 태평양 너머의 소식통에 따르면, 프레임 분석(Frame Analysis)류의 구성주의적 접근(constructive approach)이 한동안 유행했다는데, 미국의 저널리즘 연구라는 동네는 유럽의 무슨 학문 분과가 건너가건, 실증과 모델이라는 블랙홀로 빨아들이는 놀라운 재주를 발휘해 왔다.

  70년대 무렵, 윌리엄스가 저렇게 매스 커뮤니케이션 사회학(효과연구)에 대해 한바탕 성토대회를 벌였음에도 효과연구는 여전히 그 질긴 생명력을 유지 중이다. 왜? 여러 가지 대답이 있겠다. 자본주의의 합리적 사유에 가장 알맞은 형식이기 때문에, 미국 도처의 기업들이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래서 막대한 펀드로 밥줄을 이어주기 때문에 등등... 뭐 어려운 얘기 집어치우고 딱 잘라 말하자면 공부를 안해서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

  몇
차례 강의를 하다 소위 기호학 마케팅 혹은 기호학을 통한 문화 컨텐츠 분석을 배웠다는 학생들에게서 어이없는 발표를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이데올로기란 의미나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라는 말을 수 없이 했음에도, 상당수는 그 형식인 ‘이데올로기’로 말만 다른 컨텐츠들을 ‘이데올로기라고 분석’해 냈다. 굳이 비유하자면 이런 식이다. 어떤 훌륭한 스승이 도끼는 “이런 식으로 만드는게 아니다”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었다. 제자들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기뻐하며 사람들에게 그런 식으로 만든 돌도끼, 쇠도끼, 나무도끼, 알루미늄도끼, 플라스틱도끼를 무한히 펼쳐 놓고 “이 도끼들이 나쁜 도끼다!”라고 말했다. 결국 제자들이나 사람들은 스승이 말한 나쁜 방식을 나쁜 도끼를 구별하는 기준으로 써먹으며 수많은 나쁜 도끼들을 만들어 냈다. 이데올로기는 이렇게 순식간에 “모델”이라는 이름을 달고 “과학적 기준”으로 바뀌어버린다.

  윌리엄스와 같은 이들이 쓴 저런 “오래된 책”이 아직도 출판되는 이유, 그리고 그것을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덮어놓지 않고 다시 봐야 하는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다. 윌리엄스 자체가 아니라 윌리엄스에 “대한 지식과 정보”로 윌리엄스를 다 이해했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저 못된 제자가 될 충분한 자격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수많은 고전들은 다 이렇게 이해되고 있다. Forever! Canned Knowledge.

Posted by WYW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