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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 10대학의 철학과 교수인 비데(Jacques Bidet)가 쓴 이 책은 결코 쉽게 읽히지 않는다. 논문에 쓸 개념 중 “형태”에 대해 방학 내내 고민하다 목차에 달린 절 하나를 보고 들추게 되었지만 결국 서론부터 다 읽고 말았다. 사실 이 책은 맑스주의에 대해 관심이 있거나 입문을 원하는 사람들에겐 결코 좋은 책은 아니다. 비데 자신의 박사논문을 압축한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맑스가 채용했고 오늘날의 맑스주의에서 아무런 의심 없이 사용하는 개념과 범주(categories)들이 철저하게 검토되는 까닭에 이 책의 독해에는 그야말로 ‘노고’가 뒤따른다. 해서 이 책을 읽기 위해선 맑스의 <자본론> 세 권과 전체 목차, 그리고 책상이 좀 넓다면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가 필요하다. 물론 이런 책들을 쌓아 놓는다고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한 번쯤은 읽어 보았어야 비데의 인용과 분석을 읽을 때,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지 겨우 감이 잡힌다.

  지루한 독해임에도 이 책에서 비데가 말하려는 바는 명확하다. 어떤 학문이건, 특히 맑스주의에 어떤 식으로든 연루(?)가 된 학문이라면 자신들이 사용하는 개념과 범주들을 가두어 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첫 장에서부터 가치(Value)라는 그 당연한 개념을 경제학이 쳐 놓은 실증성의 울타리에서 구해내려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마찬가지로 ‘이데올로기’의 문제 역시 관념과 의식의 차원이 아니라 경제학적인 문제틀로부터 출발하여 도발적인 해석을 이끌어 낸다. (이데올로기의 문제에서 비데는 우리가 일상에서 전혀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하지 않던 ‘임금’을 거론한다. 다른 건 몰라도 많은 사람들이 어느 순간부터 이데올로기는 사회학이나 정신분석학의 문제로 한정짓고 경제학의 이데올로기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은 <“자본론”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그러나 제목과 달리 비데는 여기서 “맑스의 <자본론>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의 문제를 제기한다. 사실 읽기는 머릿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한 명의 독자가 살아온 경험과 그 경험 속에서 접한 사고들, 나아가 앞으로 자신이 염두에 둔 미래가 한 시점에서의 읽기를 결정한다. 비데가 요청하는 것은 이러한 읽기의 “열려짐”이다.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 나아가 심리학까지 자신들의 ‘전공’ 속에서 <자본론>을 읽는 것 자체가 분화된 사회를 만들어 낸다. 맑스가 그랬듯, 철저한 읽기는 그것이 텍스트이건 현실이건 드러나지 않는 모순을 인식하는 것이며 바로 그럴 때 비판이 가능해 진다. 해서 이 책을 두고 “구조주의자의 맑스 읽기”라고 단정하는 것만큼 위험한 읽기는 없다. 똑바로 읽고 볼 일이다.

Posted by WYW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