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 7. 0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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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나는 허무주의자가 아니다. 허무주의적인 것은 바로 체계의 현실이다. 즉, 모든 가치의 폐기와 혼돈과 무차별화가 허무주의라면, 그것을 작동시킨 것은 체계다. 예컨대, 오늘날에는 자본마저 가치를 희생시킨다. 가치의 저 너머에서 순수한 투기에 몰두하는 것이다. 정치는 대표성(représentation)의 가치를 희생시킨다. 그것은 더 이상 대표성의 합리적 체계가 아니라, 전략에 불과하다. 우리는 실재를 희생시킨다. 허무주의는 사실상 체계 자체다. 우리가 명민하게 이 허무주의를 분석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허무주의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늘 메시지와 메시지 전달자를 쉽게 혼동한다. ‘허무주의에 관해 말하는 것을 보니 당신은 허무주의자군’, 혹은 ‘체계를 분석하는 것을 보니, 당신은 체계의 편이군’ 이런 식이다. 그런 말들은 전혀 흥미롭지 않다. 이는 대상에 대한 도덕적, 심리학적인 가치판단인데,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은 것이다.”

“장 보드리야르와의 대담” 이상길, <프로그램/텍스트>, 2005년 12호. 188쪽.

  보드리야르의 책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의 제목은 “기호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이다. 이거 제목부터 좀 어렵다. 이 제목은 “기호학을 통한 정치경제학 비판”으로도 읽을 수 있고, “기호로 구성된 정치경제를 비판”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다.
  몇 년 전 대학원 수업에서 보드리야르의 방법론에 대한 글을 쓰라는 말을 들었다. 저 책 제목을 가지고 생각해 보면, 그 때의 요청은 정치경제학을 비판했던 보드리야르의 “기호학”을 정리해 보라는 의도였다. 그러나 만일 보드리야르의 작업이 “기호를 비판”하려는 것이었다면, 그 과제는 전혀 엉뚱한 요청을 한 셈이다. 기호학 방법론을 정리한다는 것은 보드리야르가 비판하려던 대상을 묘사하는 일일 뿐이며, 그 대상의 묘사는 이데올로기를 판단하는 “과학”으로 오인되기 때문이다. 더욱 나쁜 일은 그 대상에 부여된 가치판단이 배제되어 버린다는 사실이다. “메시지와 메시지 전달자를 혼동”하고 있다는 보드리야르의 말은 정확히 이런 촌극을 가리킨다. 그의 말을 조금 바꾸자면 “비판의 대상과 비판 그 자체를 혼동”하고 있는 셈이다. 신문방송을 전공한다고 해서 내가 신문방송학자가 되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Posted by WYW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