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dus Vivendi

양식(mode) 혹은 방식(way)을 뜻하는 라틴어 Modus와 삶(living)을 뜻하는 Vivendi의 합성어로 “삶의 방식” 혹은 “생활양식”을 뜻한다. 그러나 이 용어는 어떻게 해서든 살아가기 위해 서로 경합하는 부분들 사이의 적응(accommodation)이나 타협(compromise)이라는 내포적 의미도 갖는다. 흔히 정치적 사태가 발생했을 때, 이 용어가 비공식적이고 일시적인 협정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예를 들어 두 편이 영역 다툼에서 modus vivendi에 이르렀다고 하면, 서로가 상대의 가치관이나 태도에 동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며 삶의 방식을 꾸려나간다는 의미이다. 이런 의미로 이 용어는 John Gray가 사용한 이래 정치철학의 중요원리로 쓰여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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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dus Vivendi: 결국 살아간다는 것은 자연이건 사람이건 그 무엇과 “타협”을 하는 과정이라는 심오한 의미가 있었다니... (양복 이름을 뭐 이런 식으로 지었나 모르겠다) 나이를 먹어가며 일정부분 양보하고 일정부분 인정해야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런데 내가 타협을 하는 그 대상은 결코 타협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니(나한테 그쪽에서 뭐 하나 주는게 안보인다), 이건 타협이 아니라 “적응”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나 적응이라고 하면 내 modus vivendi의 상대는 엄청난 고집불통이거나 위대한 그 무엇으로 여겨진다. 사실 이건 매일 일상에서 부딪히고 느끼는 일이다.
 
  그러나 어떤 순간(crisis), “타협”이라는 modus vivendi의 본색이 드러난다. 사실 그 고집불통의 놈이 상대하고 있던 것은 나 혼자가 아니라 나와 같은 수많은 그대들이었음이 밝혀지는 순간 말이다. ‘노동하는 개인’들에게 자본은 고집불통의 적응대상이지만, 자본에게 ‘노동자 전체’는 타협해야 할 존재들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수많은 소위 3D 제조업들이 자국을 이탈하는 자본파업을 감행하겠는가. 그 이탈로 자본은 또 다른 노동하는 개인들에게 자신을 고집불통의 존재로 위장한다. 정작 자신은 타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계급관계’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계급‘관계’가 아닌 ‘계급’을 확인하려는 이들에게 자본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고집불통의 완고한 힘이다. 계급의 구획선을 나누려는 자들은 스스로 타협이 아닌 적응을 택한다. 물신성(fetishism)이란 이런 것이다.

Posted by WYW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