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fair trade). 좋은 말이다. 시장에서 거래란 가치대로 이뤄져야지 더 많거나 적은 가치로 교환되면 안된다. 이 좋은 논리대로라면 노동력 상품 역시 마찬가지다. 임노동자나 자본가나 착취건 기여건 어쨌든 공정하게 거래하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발생한다. 자본가가 임노동자의 노동할 수 있는 능력을 사면 그 능력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전적으로 자본가의 소관이다. 아주 효율적으로 써먹어야 한다. 이러한 사정은 노동자에도 동일하다. 노동력을 팔아 받은 돈으로 내일 또 일할 수 있는 육체적, 정신적 능력을 회복(재생산)해야 한다. 자본가가 ‘절약’과 ‘절제’라는 도덕을 설파할 때 노동자 역시 그의 유일한 재산인 노동력을 아껴 쓰고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한쪽은 어떻게 해서든 주어진 시간 동안 더 많은 가치를 구매한 상품(노동력)으로부터 얻어내려 하며, 다른 쪽은 어떻게 해서든 오랫동안 일하기 위해 주어진 시간 동안 적정량만큼의 노동을 수행하려 한다.
 
자본과 노동의 교환은 단순한 상품의 교환이 아니다. 목적과 의식을 가진 두 존재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충돌하는 이율배반의 장이 바로 교환이다. 만일 노동자가 아니라 로봇이 노동을 수행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보증된 사용기간이 30년인 로봇을 자본가가 과도하게 사용하여 10년 만에 폐기처분해도 로봇은 한 마디 요구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는 다르다. 그는 30년의 시간을 일할 권리, 다시 말해 30년 동안 자신의 노동력을 매일 같이 판매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할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정상적인 길이의 노동일을 요구한다. 더욱이 나는 당신의 동정에 호소함이 없이 그것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상거래에서는 인정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모범적인 시민일지도 모르며, 동물학대 방지협회의 회원일지도 모르며, 거기다가 성인(saint)이라는 명성을 누리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이 나와의 관계에서 대표하고 있는 자본은 가슴 속에 심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거기에서 고동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나 자신의 심장의 고동일 뿐이다. 나는 표준 노동일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판매자와 마찬가지로 나도 나의 상품의 가치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공정거래. 가치에 따른 교환. 적어도 다른 상품들의 교환이 아니라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교환할 때 이 공정거래란 바로 계급투쟁을 의미한다. 자본가와 노동자가 모두 동등하게 상품교환의 법칙에 의해 보증되고 있는 권리를 주장하게 된다. 동등한 권리와 권리가 맞섰을 때는 힘이 문제를 해결한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의 역사에서 노동일의 표준화는 노동일의 한계를 둘러싼 투쟁, 다시 말해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 사이의 투쟁으로 나타난다.

[고쳐 쓰기 Marx, K. 김수행 옮김(2001), 자본론 1권(상), 비봉출판사. 306-310쪽].


Posted by WYW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