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광고와 정체성의 정치학

: 국가주의와 민족주의 사이에서 방황하는 광고

  

김동원(공공미디어연구소 연구팀장)


“음악은 만국의 언어”라는 말이 있다. 음악가의 국적이나 언어에 대한 이해가 없더라도 듣는 이들의 감정에 직접 호소하는 언어 그 이상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육체의 언어라 할 수 있는 스포츠의 이미지들 또한 그런 언어이다. 차이가 있다면 스포츠에서는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역동적인 육체의 움직임이 한 순간에 펼쳐지며, 그 시점이 지나면 말로는 복기가 불가능한 시각적 이미지들이 포함된다. 2005년 5월 새벽에 케이블 채널을 돌리다 눈에 띤 축구 경기가 바로 그랬다.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열리던 AC 밀란과 리버풀의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이 중계되고 있었다. 전반에만 3골을 내주며 패색이 짙던 리버풀이 후반 11분부터 6분 동안 연속으로 3골을 넣던 장면, 그리고 숨 막히던 승부차기 끝에 우승을 차지하던 그날 밤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리버풀의 역사도 잘 몰랐고, 왜 그 우승이 중요했는지의 배경도 몰랐지만 나와 아무런 연고도 없는 팀의 경기를 그토록 긴장하며 본 기억은 이전에도 별로 없었다.


스포츠가 주는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언어나 문화가 달라도 오직 육체의 이미지 하나로 지구촌 모든 이들의 감정을 흔들 수 있는 강력한 순간의 메시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 그 이상의 언어인 스포츠의 육체적 이미지들은 역설적으로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언어에 취약하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한일전 야구경기에서 이승엽의 타구가 담장을 넘어가는 순간, “후지산이 무너지고 있다”는 해설자의 말 한 마디는 예기치 못했던 경이의 순간에 두 나라 간의 역사적 갈등을 한 마디로 응축하여 의미를 부여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스포츠의 ‘비정치적인’ 정치성

공정한 심판에 의해 어떤 정치적 편견도 개입되지 말아야 한다는 스포츠는 말과 문자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에 따라 일순간에, 그것도 너무도 자연스럽게 강력한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이미지들을 만들어 낸다. 바로 이런 “비정치적인 정치성” 때문에 올림픽이나 월드컵과 같은 국가 대항전은 고도의 정치적 담론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 금메달은 해방 이후 지금까지 ‘국가=민족=대표 선수’라는 신화의 원형(archetype)이 되어 왔다. 물론 해방 이후 모든 국제 경기는 선수 개인이 아니라 국가와 국가의 승부로 여겨지던 냉전 시대의 또 다른 전쟁터였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1984년 LA 올림픽은 동서 양 진영이 각각 보이콧했던 지극히 ‘정치적’ 대회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선수 개인과 국가의 동일시(identification)는 당연한 것이었고, 금메달은 개인의 성취가 아니라 국가의 우월함을 증명하는 수단이었다.


그러나 국가만이 유일한 정치적 주체는 아니었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 육상 200m 시상식에서 1위와 3위를 한 미국의 두 흑인 선수가 성조기를 바라보지 않고 검은 장갑을 낀 손을 치켜 올린 사건은 상당한 파장을 몰고 왔다. 1960년대 미국에서 벌어지던 흑인인권운동의 연장이었던 이 사건은 올림픽 직전 흑인 선수들의 보이콧을 선언했다가 취소한 “인권을 위한 올림픽 위원회(OCHR)”가 그 배경에 있었다. 국가는 흑인 선수를 단지 자국의 영광을 위한 수단만으로 삼았고, 흑인들 역시 백인들로부터 미국인이라는 인정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스포츠를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이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들어 올린 두 개의 검은 장갑은 올림픽이 단지 국가만이 아니라 인종과 같은 정체성 정치 또한 벌어질 수 있는 장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어떤 “대한민국”인가?

올림픽이나 월드컵과 같은 국가 대항의 스포츠 이벤트는 높은 시청률과 몰입도로 광고를 비롯한 마케팅의 호기로 여겨진다. 하지만 높은 시청률과 몰입도는 단순한 영상 이미지가 아닌 국가, 인종, 민족, 지역과 같은 다양한 정치적 정체성에서 비롯되며 다시 그것을 강화하는 기능을 한다. 광고의 메시지는 이런 정체성들과 어떻게 접합하는가에 따라 천박한 상술이라는 질타를 받을 수도, 아니면 자연스러운 브랜드 가치 상승이라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이런 예측불가능성을 잘 보여준 사례가 이번 동계 올림픽을 겨냥했던 E1의 김연아 TV광고였다. 물론 주목받는 스포츠 스타를 모델로 내세운 광고들은 많았다. 예컨대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 이상화 선수를 내세운 기아 자동차의 TV광고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E1의 광고와 기아 자동차의 광고는 전혀 다른 커뮤니케이션 구조를 갖고 있었다. 많은 관심이 집중되고 모델의 인지도가 높아지는 스포츠 이벤트 기간에는 그 광고 모델이 어떤 대상과 동일시되는지가 중요하다. 앞의 언급처럼 잠재된 국가나 민족 같은 정치적 담론들은 비정치적인 스포츠 선수의 이미지에서 몇 줄의 텍스트만으로도 쉽게 촉발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광고가 재현하려는 정체성과 시청자들이 스스로 구성하는 정체성 사이에 충돌이 벌어질 때 발생한다.



기아자동차의 광고는 전형적으로 이상화 선수의 성실한 노력과 발군의 기량을 기아자동차의 “놀라움”과 연결 짓는 평범한 동일시 전략을 취했다. “좋은 날이다 / 데이트하기 좋은 날이다 / 쇼핑하기 좋은 날이다 ... 그러나 최고가 되기엔 더 좋은 날이다”라는 텍스트는 그런 성실함을 이상화 선수 스스로의 말처럼 재현해 내고, 이를 자연스럽게 기아자동차의 이미지로 이어 간다. 그러나 E1 광고는 김연아 선수와 기업 브랜드의 동일시가 아니라 거꾸로 김연아 선수를 대상화(objectification)시키는 전략을 취했다. 이는 “너는 김연아가 아니다 / 너는 4분 8초 동안 숨죽인 대한민국이다 / 너는 11번을 뛰어오르는 대한민국이고...”에서 잘 나타난다. 김연아 선수는 대한민국과 동일시가 되었는데, 이때의 대한민국은 지극히 모호한 대한민국이다. “4분 8초 동안 숨죽인 대한민국”은 국민으로, “11번을 뛰어오르는 대한민국”은 김연아 선수로 해석될 수 있다. 여기에 “대한민국이 대한민국을 응원합니다”라는 마지막 텍스트는 그 모호함을 증폭시킨다.



광고 모델과 동일시 대상의 관계가 중요한 이유는 광고의 발화자(source)와 수신자(receiver)의 관계 때문이다. 기아자동차의 TV광고에서 발화자는 여성의 목소리로 텍스트가 읽혀지는 탓에 이상화 선수로 여겨지고, 이 메시지를 듣는 수신자는 시청자가 된다. 그러나 E1의 TV광고에서는 “너는 김연아가 아니다”라는 첫 문장으로 인해 발화자는 기업(E1)이, 수신자는 김연아 선수가 된다. 이로써 김연아 선수는 특정한 기업에 의해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대한민국”이 되라는 명령을 수행할 대상이 되어 버린다. 따라서 수신자의 자리를 내 준 시청자들은 도리어 광고를 평가하는 평론가, 나아가 김연아 선수의 정체성을 강요하는 기업을 질타할 후원자(supporter)의 역할을 맡게 된다. 결국 이 광고는 김연아 선수를 기업의 이미지와 분리시키고, 시청자들에게는 김연아 선수를 어디에 동일시해야 할 지 알 수 없는 모호한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대한민국이 대한민국을 응원합니다”라는 마지막 텍스트는 그런 모호함을 잘 드러낸다. 제작 의도에서는 ‘국민으로서의 대한민국’이 ‘대한민국의 상징이 된 김연아’를 응원한다는 뜻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김연아 선수가 수신자이자 대상화되어버린 광고 텍스트에서 대한민국은 ‘국민’이 아니라 김연아 선수에게 정체성을 강요하는 ‘국가’가 되어버리고 발화자인 기업은 국가와 같은 위치에 놓인다.

 

국가를 벗어난 민족 정체성의 “우리”

이번 동계 올림픽은 국가 대항 스포츠 이벤트에서 처음으로 한국의 “국가주의(statism)”와 “민족주의(nationalism)”가 분리되어 나타난 때로 볼 수도 있다. 러시아로 귀화한 안현수 선수는 빙상연맹을 비롯한 국가 주도의 체육 시스템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몸으로 증명한 사례가 되었다. 비록 그가 한국의 국가대표가 아니었더라도 시청자들은 그를 조국을 버린 반역자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그가 버린 ‘국적’인 대한민국과 여전히 그를 응원하는 대한민국은 전혀 다르다. 국적인 대한민국은 선수 개인의 역량을 이용하며 선수를 자신과 동일시하려는 국가라면, 그를 응원하는 대한민국은 국적(국가)이 달라도 여전히 우리와 같음을 인정하는 민족이다. 제도와 체제로서의 대한민국이 국가라면, 국적을 떠나 같은 언어와 문화, 그리고 같은 경험을 가진 민족은 “우리”가 된다. 그래서 김연아 선수에 대한 심판 채점에 강력한 항의를 제기했던 국내 팬들의 분노도 ‘국가 대 국가’의 수준에서 이해될 수 없다. E1 광고에서 거부당한 대한민국이 김연아 선수에게 한없는 책임을 부여한 국가였다면, 러시아의 ‘편파 판정’에 항의한 대한민국은 누구의 지시로 구성된 ‘국민’이 아닌 역사적 경험에서 스스로 부여한 동일성의 산물, 즉 “우리”라는 민족이기 때문이다.


김연아 선수를 내세운 동계 올림픽 E1 광고는 이런 점에서 단지 부정적 반응을 낳은 TV광고의 한 사례로만 볼 수 없다. 이 광고에 대한 시청자들의 반응은 글로벌 시대에 변화하는 정체성의 문화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글로컬라이제이션(Glocalization)이라는 조어가 그렇듯, 글로벌 시대는 맥도날드와 코카콜라의 전지구적 확장을 뜻하지 않는다. 도리어 산업과 금융의 전지구적 순환이 가속화되며 자본은 균등해 지지만, 그 소비자/시청자들은 국경으로 나눌 수 없는 다양한 정체성을 구성해 나간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민족주의의 발흥이다. 달리 말하면 민족보다는 특정한 집단이 스스로 상상하는 공동체(imagined community)인 “우리”가 더 적합한 개념일 것이다. 앞으로 두 차례의 대형 스포츠 이벤트가 더 남았다. 6월에 열릴 브라질 월드컵에서 대표팀은 러시아(!)와 조별 예선 1차전을 치른다. 월드컵이 끝나고 9월에는 다시 한․중․일이 격돌하는 아시안게임이 예정되어 있다. 두 기간 동안 모두 외쳐질 “대한민국”은 어떤 대한민국이겠는가.


Posted by WYW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