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 마감 시간이 지났으니 글을 올려도 되겠다. 투표소에는 갔다. 그러나 지역구와 비례 모두 기표는 하지 않았다. 투표율을 낮추지는 않았지만 득표율에는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이유는 두 가지다. 불과 2주 전까지만 해도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입법 취지를 훼손한 거대 양당의 위성정당에 대한 비판이 거셌다. 소수 정당들은 한 석이라도 확보해야 한다는 현실론으로 위성정당에 줄을 서면서 진보정치의 민낯을 보여주었다. 정치적 스펙트럼을 넓혀야 할 진보 정당이 스스로의 존재 기반을 무너뜨린 선거는 처음이었다. 최악의 선거였다.

 

또 다른 이유는 망가진 선거제도에 대한 비판은 투표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정당에 투표했는지의 물음보다 왜 기권했는지의 물음에 답할 말이 더 많다. 기권 이유에 대한 답변으로 21대 총선에 대한 비판이 가능하다면 이 또한 정치적 행위가 될 것이다. 선거일 전 주변에서 "그래도 투표해야 한다"는 권유에 이제 이렇게 답하겠다.

 

최선이 없다면 차악이라도 찍어라

 

공약도 그렇고 소속 정당도 그렇고 찍을 후보가 없었다. 대개 이럴 때는 뽑지 말아야 후보/정당을 먼저 제외하고 나머지 선택을 하게 된다. 이렇게빼기 선택을 하면 남은 후보/정당에는 이른바 ‘비판적 지지 하게 된다. 말이 '지지'이지 정확히 말하면 내가 지지하는 정당/후보가 아니라 당선되어서는 안되는 후보/정당을 향해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던진 차악의 후보/정당은 내 표를 자신들을 향한 지지로 인식할 것이다. 거대 양당 체계가 싫어서 00당에게 준 표는 00당을 지지하는 표가 아니다. 그럼에도 00당은 내 한 표를 갖고 자신들의 정치 활동에 대한 민심으로 왜곡할 것이다. 내가 원하지 않은 대의(representaion)에 왜 표를 주어야 하는가.

 

진보정당에 표를 주어서 영향력을 높여야 한다

 

맞는 말이다. 진보정당에 표를 주어 위성정당으로 기득권을 지키려는 세력에 대항할 힘을 실어줄 수도 있다. 그러나 20 국회에 의석이 없고, 당선가능성이 낮은 정당이라면대학 전면 의무교육 같은 실현가능성이 낮은 공약이 아니라 선거 이후에 지역에서 어떤 활동을 하겠다는 공약이 있어야 했다. 두세 명의 의원으로는 교섭단체도 구성할 수 없고, 쟁점 법안에 캐스팅 보트의 역할도 하기 어렵다. 지역구 의석보다 비례대표를 더 많이 배출할 진보정당이라면 입법 공약이 아니라 표를 준 시민, 분야, 지역에서 어떤 정치적 조직화를 하겠다는 계획이 더 유효하다. 그래야 선거 이후에도 지역 시민이 진보정당과 함께할 기회에 기대를 걸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약속을 진보정당은 곳도 없다. 소속 정당을 알리기 위한 출마, 비례대표의 득표를 위한 출마였다면 비용과 노력으로 이루려는 구체적인 목표가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다른 제도권 정당과의 비교를 위해국회 입성을 전제로 하는 특이한 공약”을 내세울 것이라면 국가혁명배당금당의 공약이 가장 훌륭했다. 진보정당 지역구 후보는 당의 비례대표 한 명이라도 당선 가능성이 있다면정기적인 지역주민 정책 간담회’, ‘000 동대문구 청원게시판 실행 계획을 제시하는 전략도 가능했다. 그럼에도 이번 선거에서 진보정당 시민과 함께 할 생활정치 청사진을 보여준 곳은 곳도 없었다.

 

정당을 보지 말고 사람을 보고 찍어라

 

사회적 소수자들일 수록 자신들의 요구를 듣고 /개정을 실행할 명의 국회의원이 절실하다. 플랫폼 노동자, 장애인, 성소수자의 인권 아니라 언론개혁, 검찰개혁 오래된 과제를 실행하겠다는 비례후보들은 많다. 선거 기간 동안 이들은 개인의 경력, 의지, 그리고 임무를 얘기한다. 그러나 이들은 당선 이후 소속 정당에서 어떤 상임위에 들어갈지, 어떤 당무와 당직을 맡을지 전혀 없다. 선거 때는 개인의 자질을 말하지만, 국회에 들어가면 정당의 일부가 된다. 자신을 지지해 시민과 단체를 만나는 시간보다 의원회관 안에서 의원총회 당내 회의, 당직에 따른 당무 수행에 쏟는 시간이 많다. 훌륭한 경력과 인품만으로 그에게 표를 없다. 특히 재정과 인력이 부족한 진보정당에서는 의원 명이 수행해 당무가 더욱 많다. “정당을 보지 말고 사람을 보라 하지만 사람이 보이는 때는 선거운동 기간 뿐이다.

 

NOTA가 포함된 영국 총선 투표용지

 

기권을 정치적 의사 표현으로 인정하라

 

장문의 변명을 이유는 투표에서 기권이 그저 기권표 한 장으로 계산되지 않 기권했는지 알기를 바라는 의도, 선거제도와 정당체제에 대한 비판을 하기 위함이다. 좋아하지 않는 비유지만, 잘못 출제된 문제의 잘못된 객관식 보기에서 하나만을 택한다면 문제의 오류에 눈을 감는 셈이다. 문제가 잘못되었다거나 정답이 틀렸다는 항의는 종종 있었다. 그러나 시험제도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항의하는 경우는 드물다. 21대 총선이 이 상태다. 위성정당의 적법성만이 이슈가 된 문제에 차이를 구분할 수 없는 보기가 주어진 시험을 인정하라는 강요다. 투표할 수 있는 권리가 투표를 해야 할 의무가 되었다. 

 

투표란 헌법에 명시된 참정권 중 가장 낮은 수준의 정치 활동이다. 특히 시민 스스로 만들지 않은 선택지에 기표를 해야하는 투표라면 더욱 그렇다. 만일 해외 사례처럼 <지지후보 없음>(NOTA: None of the above)이라는 선택지가 있었다면 기권하지 않았을 것이다. NOTA는 여러 방식으로 영국, 인도, 그리스, 미국의 네바다주,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스페인, 콜롬비아, 방글라데시, 불가리아 등에서 이미 시행 중인 선거제도다. '지지후보 없음'이라는 칸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영국처럼 투표 거부를 요청하는 정당이 출마하기도 한다. 

 

NOTA를 시행하는 일부 국가에서는 해당 칸에 기표한 표를 유효표로 인정하기 때문에 NOTA의 득표율이 다른 후보자들보다 높아 선거에서 이길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 최다 득표를 한 후보보다 NOTA의 득표율이 높을 경우, 당선인을 선정하지 않고 공석으로 두거나, 재선거를 치루기도 한다. 재선거를 하든, 차기 선거를 준비하든 각 정당은 이전과 동일한 후보를 공천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 기권표가 정당한 정치적 의사로 인정받는 것이다. 2013년 9월 인도 대법원이 NOTA 적용의 판결을 내리며 밝힌 이유는 지금의 한국정치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판결은 투표 시스템 전체에 걸친 변화를 불러올 것이며, 정당들로 하여금 깨끗한 후보를 내보내도록 강제할 것이다. 민주주의란 어떤 선택을 하느냐의 문제인데 유권자들은 (후보자에 대한 찬성표 뿐만 아니라) 반대표를 던질 권리도 얻게 될 것이다.”

 

시민이 만들지 않은 후보, 정당의 선거 전략으로 정해지는 후보들 속에서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는 세계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지역 풀뿌리 정치가 성장하려면 NOTA와 같이 반대표를 던질 권리와 시민 스스로 후보를 만들 수 있는 조직과 지원이 있어야 한다. 시민 정치활동은 정당이 선거 때만 눈길을 돌리는 지역과 사회 분야에서 지역 개발 정책 반대, 자율적인 문화예술 활동, 지역 노동자와의 일상 모임 등을 통해 힘들지만 꾸준히 이어져 왔다. 내 정치활동의 근거지는 이런 곳이며 총선 이후에도 지역시민과 함께 정당에 명확한 정책과 실행을 요구할 것이다. 무엇보다 선거법, 국회법 정치관계법에 주목할 것이다. 이번 21 총선이 나에게 교훈이 있다면 지역 민주주의의 절박함이다. 바로 그것이 기권표를 통해 알리려는 나의 정치적 의사다.

 


참고문헌: 정혜란, "아무도 지지하지 않을 권리에 대하여 아시나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공식블로그, 2014.8.4.

Posted by WYW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