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nscripts'에 해당되는 글 14건

  1. 2008.01.03 tautology
  2. 2008.01.03 Re-reading
  3. 2008.01.03 Hot Baseball vs. Cool Football ? 2
  4. 2008.01.03 희망에 대하여
2008. 1. 3.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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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Barthes(1915~1980)                     J. S. Mill(1806~1873)

“...그렇다. 이 단어가 추악한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내용 역시 그런 식이다. 동어반복은 같은 것으로 같은 것을 정의하는(‘연극은 연극이다’와 같이) 언어적 장치이다. 사르트르는 그의 『감정 이론 개요 Outline of Theory of the Emotions』에서 이러한 유형의 신비한 행동들이 어떻게 다루어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어떤 이가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두려워하거나 화를 내거나 혹은 슬픔에 빠지는 것처럼, 그는 동어반복을 도피처로 삼는다. 즉 언어의 일시적인 상실이 그가 [그 언어] 대상의 자연적인 저항이라고 판단하는 것과 기묘하게도 동일시된다. 동어반복은 두 번의 살인을 저지른다. 동어반복은 합리성이 자신에게 저항한다는 이유에서 그것을 살해하며, 언어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이유로 그것을 살해한다. 동어반복은 적당한 때에 실신하는 것이며, 유익한 실어증이다. 동어반복은 죽음, 혹은 한편의 희극이며, 언어를 초월하는 실재의 진실에 격분하여 그것을 ‘표상(representation)’하는 것이다. 동어반복은 [이처럼] 기묘하기 때문에, 당연히 권위라는 강변(argument) 뒤에서만 피신처를 찾을 수 있다. 즉 끊임없이 설명을 요구하는 아이에게 부모가 자신의 한계에 이르렀을 때 하는 대답인 것이다. 예컨대 ‘그건 그렇기 때문이야’, 혹은 좀 더 낫게 말한다면 ‘이제 그만, 그게 다야’ - 이처럼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기묘한 행동은, 말로는 합리성의 몸짓을 취하지만 동시에 합리성을 포기하는 것이며, 나아가 그 행동을 낳은 바로 그 말로 [이유를] 말한다는 점에서 자신을 인과율(casuality)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동어반복은 실패했다는 이유로 거부되어진, 언어의 뿌리 깊은 불신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언어의 어떠한 거부든지 그것은 하나의 죽음이다. 동어반복은 죽어버린, 미동조차 없는 세계를 만들어낸다.”
Roland Barthes, A. Lavers trans(1972). <Mythologies>, New York: Hill and Wang. pp.152-153.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존 스튜어트 밀(J. S. Mill)의 명언보다 더 결정적인 그의 말. “왜 전체의 행복이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한 이유는 각자가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 한에서 자기 자신의 행복을 바란다는 사실 외에 아무 것도 없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밀의『공리주의』를 보던 중 끊임없이 떠오르는 단어가 있었다. 바로 “동어반복(tautology).” 바르트는 이 언어장치가 표상되길 거부하는 완고한 실재(reality)에 대한 언어의 무력감을 나타냄과 동시에, 그 무력감을 감추기 위한 권위에의 의지를 정확하게 지적한다. 누군가 밀에게 왜 다른 많은 것들 중에서 “행복”이 모든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인지 물었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저런 것이었다. “행복은 사람들이 그것을 바라기 때문에 바람직한 것이다.” 이 끔찍한 동어반복의 연속이 공리주의라는 작은 책 전체를 지배한다.

  바르트가 동어반복을 부르주아 ‘신화(Myth)’라고 했을 때, 동어반복은 그저 서로 동일한 것들이 서로를 설명하는 방식이라고만 볼 수 없다. 신화라는 것 자체가 어떤 내용이 아니라 진술의 형식 문제라면, 동어반복이 신화인 것은 그렇게 말하는 형식 자체가 끊임없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동어반복이라는 진술 형식의 반복.” 이것이 바로 동어반복이라는 부르주아의 신화이다. 어쩌면 우리는 단순히 “한 말 또 한다”는 반복되는 몇 개의 낱말들에 질려 동어반복을 말할지도 모른다. 반복되는 단어에 질리게 하여 정작 그 단어들이 말하여지는 방식의 반복을 은폐하려는 전략. 어디선가 보드리야르(J. Baudrillard)가 말했던 그 랑그의 동어반복은 바로 이런 식으로 나타난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의 상식은 설사 그 내용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여도 동어반복의 신화를 오늘날에도 완성시키고 있다. 밀이여, 영원하소서.

Posted by WYWH
2008. 1. 3.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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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물론 회화 작품 이외의 다른 대상들, 예컨대 지식도 똑같은 항목들로 분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경쟁 공동체의 제도적 시공간은 시험, 더 정확하게 말해서 경쟁 시험이다. 바로 거기에서 고블로가 대학입학자격시험, 곧 세습적 사회 계급의 사회적 문턱을 주제로 하여 그 기능을 올바르게 분석한 바 있는 "세속적인 앎의 신성한 앎으로의 본질적 변화," 그 "앎에 대한 관료주의의 세례"(마르크스)가 일어난다. 보편적 가치로서의 앎이 가치/기호로서의 앎, 귀족의 권리증서로서의 앎으로 변화하는 동일한 작용에는 그 보수적인 의식에, 그 성찬식에 참여하는 모든 동류들에 대한 똑같은 공인, 똑같은 차별이 따른다. 또한 (학자, 지식인, 사회학자들) 회의도 기호의 쟁투적 남용에 토대를 둔 특권 공동체와 지식계급의 유전(遺傳)장소, 세습적 재생산의 장소로서 분석될 수 있을 것이다. - 경마와 경마 도박이 말 품종의 향상에 이바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게다가 말과 경주는 또한 사치 가치들의 암시장처럼 훌륭한 연구 대상일 것이다), 회의는 앎의 증진에 도움이 된다.”

Jean Baudrillard, 이규현 옮김(1992), <기호의 정치경제학 비판>, 문학과 지성사. 88쪽.

  습관일지는 모르지만, 난 한 번 보았던 영화를 다시 보길 좋아한다. 케이블 채널들의 공헌이 크겠지만, 어떤 영화들은 처음 보았을 때 내가 보지 못했던 장면들이 눈에 들어오고 전혀 다른 이미지들로 남기도 한다. (어릴적 보았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지만, "록키1"과 "정복자 펠레"가 지금 생각나는 영화다.)

  보드리야르의 <기호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한 2년 전에 읽었던, 그것도 영역본보다 더 어렵게 느껴진 번역 탓에 절반조차 이해를 못했던 책이다.(저 위에 옮겨 놓은 글도 여전히 어렵긴 마찬가지다..- -) 다시 읽어도 곳곳에서 눈에 띄는 번역상의 오류는 여전하지만 이젠 어떤 것이 잘못 번역한 단어이고 개념인지를 알 수 있을 만큼 나이를 먹은 모양이다.

  적어도 이 때 당시(1972년)의 보드리야르는 가장 월등한 모더니스트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책의 제목은 두 가지 뜻으로 읽을 수 있다. 기호학을 통하여 기존 정치경제학의 '대상'을 바꾸려는 비판임과 동시에 자본주의 자체가 기호의 체계임을 폭로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전통적 정치경제학의 가치론을 비판하기 위해 그가 도입한 수단은 "기호학"이지만, 그 수단이 임무를 다하는 순간, 그 수단은 다시 보드리야르가 폐기해야 할 대상으로 전환된다.

"굳어진 모든 것들이 대기 속으로 사라지는(All that is solid melts into air)" 자본주의의 모더니즘에서 지식인들의 최고 목적은 자신이 만든 이론의 폐기일 것이다.

Posted by WYW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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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고정된 포지션과 뚜렷하게 임무가 위임된, 오늘날 사라져가고 있는 기계 시대에 속했던 경영조직 내 분화된 직무와 직원 및 계통을 갖는 전문직처럼 한 번에 한 가지씩 일어나는 게임이다. 전기 시대의 새로운 협력하고 참여하는 방식의 이미지 그 자체인 TV가 통일된 의식과 사회적인 상호의존의 관습을 만들어 나간다. 이와 함께 우리는 전문적이고 위치가 정해짐으로써 오는 스트레스를 동반하는 야구와 같은 특정 스타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문화가 변하면 그에 따라 게임 역시 변한다. 초단위로 쪼개지는 시간에 의해 살아가는 기계 시대의 정밀한 추상적 이미지였던 야구는 새로운 TV의 시대에 새로운 우리 삶의 방식과 맺는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연관성을 상실하고 있다. 야구는 사회의 중심에서 퇴출되어 미국적 삶의 주변부로 쫓겨난 것이다.”

Marshall McLuhan(1994), <Understanding Media>, MIT Press. p.239.

  맥루한에게서 Hot과 Cool의 구분은 제공되는 정보가 얼마나 인간의 감각을 넓게 확장하여주는가(definition)와 인간이 그렇게 제공되는 정보에 얼마나 참여할 수 있는가(participation)에 달려있다. 그에게서 미디어는 인간이 만들어낸 거의 모든 인공물을 포함하는 까닭에 야구와 축구 같은 스포츠 역시 hot과 cool의 범주로 구분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위의 글처럼 소위 기계시대(전후 포디즘이라 불리우는 자본주의의 황금기)에 적합한 미디어로 Hot 미디어를, 이후 다가올 정보화 시대(포스트 포디즘 혹은 정보화 시대)에 걸맞는 미디어로 Cool 미디어를 언급했다는 점이다.

  그의 눈으로 보기에, 야구만큼 기계시대에 걸맞는 스포츠는 없었을 것이다. 각각의 선수들이 정해진 포지션에서 개별적인 임무를 수행하며,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이 없는 야구는 그야말로 각각 기능적으로 자신의 임무를 정확히 수행하는 인간의 기관들이 확장된 형태이며, 선수 개개인은 다른 포지션의 역할에 간여할 수 없는, 참여도가 매우 낮은 Hot 미디어에 속한다. 다분히 포디즘 시기의 선형적인(linear) 노동과정에 대한 비유로 읽혀지는 이같은 설명은 왜 야구에서 "통계"가 그토록 중요하게 다루어지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생산과정 각 부문 노동자들의 손동작 하나까지 시분초로 나누어 통제하려는 테일러식 경영법은 마치 야구에서 방어율, 타율, 투구수 등과 같은 선수 개개인의 통계처리와 유사하다.

  맥루한이 바랬던 것은 이러한 기계시대를 지나 부문간 협력과 뚜렷한 직무규정이 없는 전기시대가 도래할 때, 야구와 같은 전형적인 Hot 미디어가 쇠퇴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포지션의 명확한 구분이 없고 선수들의 역할변경이 자주 이루어지는 Cool 미디어, 즉 "미식축구"가 미국에서 야구보다 더 큰 인기를 얻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다가올 전기 시대(electric age)는 명확한 직무구분이 없고 상호의존이 강화되는 팀제와 같은 형태의 노동과정이 요구되며 이러한 문화의 변화에 미식축구와 같은 스타일의 스포츠가 유행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을 지금의 야구와 축구- 미식축구가 아니라 -에 비교해 보면 꽤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능하다. 축구는 포지션 간의 역할변경이 매우 용이하다. 순간적으로 윙백인 이영표가 미드필더로 뛰어도, 웨인 루니가 최종수비를 맡아도 결코 게임의 진행에 어려움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야구에서 이런 짓을 했다간, 그러니까 좌익수와 중견수가 서로 공을 받겠다고 돌진하면 결과는 뻔하다. 나아가 왜 야구에 비해 축구가 보여주는 통계수치가 그렇게 적을 수 밖에 없는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축구에서 선수 개인이 보여주는 득점와 어시스트의 횟수가 아무리 많고, 평점이 높아도 그들을 모아 놓으면 잘 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이게 지구 방위대 "레알 마드리드"가 리그 1위를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위의 인용된 단락 이후의 글들을 보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맥루한은 야구와 같은 Hot 미디어의 범주에 아이스하키, 그리고 방금 얘기한 축구 또한 포함시킨다. 미식축구(Football)와 축구(Soccer)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는 축구 역시 야구처럼 포지션의 구분이 명확한 스포츠로 보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더 이해하기 힘든 것은 소련을 前기계시대에서 기계시대에 막 접어드는(아마도 초기 자본주의 단계에서 산업화로 이행되는 시기) 나라로 규정하면서 소련인들이 야구와 축구에 열광하는 이유를 찾고 있다는 점이다. 그에게서 미디어의 Cool과 Hot의 구분은 라디오와 영화 같은 미디어의 구분을 넘어 자본주의 발전양식의 구분으로 이행되며, 이 발전단계에서 미국은 소련보다 앞선 단계를 겪은 나라로 그려진다.

  새로운 미디어가 출현할 때 마다 맥루한은 늘 주목을 받아왔다. 장기파동 혹은 경기순환처럼 그의 이론은 주기를 반복하며 새롭게 읽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글을 다시 읽으며 그람시가 트로츠키를 향해 한 말이 떠올랐다. 그람시는 영구혁명에 관련된 트로츠키의 "예언"을 두고 "어떤 사람이 네 살짜리 여자아이를 보고서 '저 아이는 어머니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는 그 아이가 스무 살이 넘어 실제로 그렇게 되었을 때, '내 그럴줄 알았느니라'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혹시 맥루한의 '주기적인 부활'은 그의 글들이 끊임없이 새로 태어나는 미디어에게 적용하기 가장 쉬운 예언이기 때문이 아닐까?

Posted by WYWH
2008. 1. 3.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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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츠의 연구와 더불어 다음과 같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대중 문학에서 '초인'이 당대 현실의 삶과 관습(소부르주아와 소지식인은 특히 그러한 낭만적 이미지에 영향을 받았다. 낭만적 이미지는 그들의 '아편'이며 '인공적인 파라다이스'로서, 당시 현실의 직접적인 삶의 불행과 속박과 대조된다)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가 그것이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격언이 명성을 얻는다. "백 년을 양으로 사느니 하루를 사자로 사는 것이 낫다." 이 격언은 어쩔 수 없이 양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특히 큰 인기를 얻었다. 얼마나 많은 양들이 이렇게 말했을까. "아! 내가 하루라도 그런 힘을 가졌으면......" 집요한 '재판관'이고자 하는 열망은 몽테크리스토의 영향을 느끼는 사람의 것이다.”

A. Gramsci, 박상진 옮김, <대중문학론>

  어떤 글쓰기이건 그것은 누군가를 대상으로 한다. 때로는 알튀세처럼 글쓰기 자체가 하나의 철학함일 수도 있으며, 바르트처럼 자신을 없애기 위한 글쓰기일 때도 있다. 그러나 그람시가 최악의 조건에서 써내려간 서른 두 권의 노트의 독자는 아마도 자기자신이었을 것이다. 20년 3개월이라는 선고를 받고 도저히 희망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그 곳에서, 출판과 대중을 염두에 두고 글을 썼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수많은 메모와 단상들 속에서 우리가 그람시의 모순된 논리와 뒤엉킨 정의들에 당혹해 하는 것은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자기자신을 독려하려는 의도였건, 지나온 삶을 후회하지 않으려는 의지였건 대중문학에 대한 그람시의 글에서는 민중들에 대한 희망과 지식인들- 그가 말했던 전통적 지식인 -에 대한 분노를 느낄 수 있다. 그람시가 던졌던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왜 이탈리아 사람들은 이탈리아 작가가 아닌 뒤마, 코넌도일 같은 외국의 작가들의 소설을 더 좋아하는가?" 그람시가 보기엔 이탈리아 작가들 중 어느 누구도 민중 출신의, 그리고 민중의 열망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그가 말하는 "민중"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투철한 투쟁의 주체도 아니며, 이데올로기에 눈이 먼 희생자들 역시 아니다. 그람시의 민중은 의지와 체념을, 희망과 절망을, 저항과 도피의 욕구를 모두 가진 그런 존재들이다.

Posted by WYW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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