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ivial'에 해당되는 글 16건

  1. 2008.01.03 술 한 잔
  2. 2008.01.03 The Soul of a Man
  3. 2008.01.03 언어, 그 이상의 언어
  4. 2008.01.03 역사 유물론의 대상
  5. 2008.01.03 Red, White & Blues
  6. 2008.01.03 The Road to Memphis
2008. 1. 3. 21:45

술 한잔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겨울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
나는 몇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번도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날에도
돌연꽃 소리없이 피었다
지는 날에도

정호승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중

Posted by WYWH
2008. 1. 3.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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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빔 벤더스의 "The Soul of A Man"은 The Blues 다큐멘터리 7부작 중 유일한 극장 개봉작이다. 아마도 벤더스의 "Buena Vista Social Club"의 명성에 기댄 면이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나에게 개봉작을 고르라고 했어도 블루스에 대한 최고의 헌사라는 이유로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영화의 시작은 쌩뚱맞게도 우주에 떠도는 보이저 위성으로부터 시작한다. 무슨 프로그레시브도 아니고 블루스와 우주라니... 벤더스는 이 영화에서 세 명의 전설적인 블루스 뮤지션을 등장시킨다. 로렌스 피쉬번의 목소리를 빌린 블라인드 윌리 존슨(Blind Willie Johnson), 스킵 제임스(Skip James) 그리고 J.B. 르노와르(J.B. Lenoir)가 그들이다. 우주 저 멀리 어디로 갈지도 모를 무한의 시간을 지나가는 보이저에 담긴 음악은 블라인드 윌리 존슨의 "Dark was the Night"이다. 이 음악을 시작으로 영화는 윌리 존슨의 안내를 따라 1920년대에서 1960년대에 이르는 짧지 않은 블루스 여행을 시작한다.

  어렸을 적 계모가 끼얹은 양잿물에 시력을 잃은 윌리 존슨은 일요일 마다 교회를 전전하며 가스펠을 부르고, 금주법 시대에 주류를 밀매하던 스킵 제임스는 우연한 기회에 파라마운트 레코드사에 발탁되어 "전설같은" 명반을 취입한다. 이후 제임스는 대공황의 와중에 단돈 40달러만 받고 자신이 낸 음반조차 구경 못하는 신세가 된다. 이 두 명이 사라진 자리에 벤더스는 60년대 그의 영웅 J.B. 르노와르를 등장시킨다. 영화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르노와르의 에피소드는, 사실 그가 밝히고 있듯이 60년대 존 메이욜 밴드(John Mayall & Blues Breakers)의 "the Death of J.B.Lenoir"에 충격을 받은 영화감독 지망생, 자신의 추억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 명의 음악 여정을 거치면서, 픽션 다큐멘터리로 때로는 오래된 필름으로 삽입되는 당대의 정치적 상황은 그가 말했듯이 블루스를 "음악이 아닌 하나의 세계"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이 영화는 20년대 61번 고속도로(이후 밥 딜런이 자신의 앨범 타이틀로도 썼던 곳)의 흑인 빈민가, 베트남전, 마틴 루터 킹, 한국전쟁...등이 블루스의 가사에서, 불운했던 이들 세 명의 죽음에서 뗄래야 뗄수 없었던 일들임을 상기시켜 준다.

Posted by WYWH

30대의 병력

이기선

대체로 비가 자주 내렸다 우산은 잘 펴지지 않았고 사랑은 나를 찾아주지 않았다  인적 끊긴 밤길을 신파조로 걸었다  詩가 되지 않는 말들이 주머니에 넘쳤다 슬픔의 그림자만 휘청이게 하였을 뿐  달빛은 아무 보탬이 되지 않았다  맹세의 말들이 그믐까지 이어졌다  낮에는 그 공원 벤치에 앉아 낙엽을 헤아렸다  바람이 심하게 훼방을 놓았다  나는 성냥알을 다 긋고도  불을 붙이지 못해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건네야 했다  담배를 거꾸로 물었다고  그가 일러주었다  쓰고 싶지 않은 말들을 일기에 적었다 뚜껑 열린 만년필은 금세 말라버렸고 망설였던 흔적이 행간을 메웠다  두 눈을 부릅떴지만 사랑은 보이지 않았다 앓을 만큼 앓아야 병이 낫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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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언어가 도달할 수 있는 극한에 닿으려 한다고 누군가 그랬다. 맞는 말이다.

Posted by WYW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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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자가 범죄소설을 분석하는 데 시간을 소비한다는 것이 경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나로서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변명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역사유물론은 모든 사회현상에 적용될 수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 어떤 연구라도 본성상 다른 연구보다 가치가 덜한 것은 없다. 역사유물론이라는 이론의 권위- 그리고 이 이론이 타당하다는 증명 -는 다만 이 모든 것들을 제대로 설명해 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범죄소설의 역사는 부르주아 사회의 역사와 얽혀 있기 때문에, 하나의 사회적 역사이다. 왜 범죄소설이라는 특정한 문학장르의 역사에 부르주아 사회의 역사가 반영되고 있느냐고 질문한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즉, 부르주아 사회의 역사는 사유재산의 역사이기도 하며 사유 재산의 부정, 즉 간단히 말해서 범죄의 역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부르주아 사회의 역사는 개인들의 욕구나 정서, 그리고 기계적으로 부과된 사회 개량주의의 형태 사이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모순의 역사이기도 하거니와, 범죄 속에서 태어난 부르주아 사회 안에서 부르주아 사회 자체가 범죄를 조성하고, 범죄를 가져오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국에는, 아마도 부르주아 사회가 범죄 사회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Ernest Mandel <즐거운 살인>

  "정치경제학자가 쓴 대중문화 비평이라..." 처음 이 책의 제목을 보았을 때, 어네스트 만델이라는 이름 탓에 노학자가 말년에 장난처럼 쓴 에세이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첫장의 서문부터 내 짐작이 틀렸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만델은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열 여덞살의 나이로 제4인터내셔널의 조직원이 되었고, 나찌와 스탈린 하에서 투옥을 감수하면서도 평생을 노동, 학생운동에 관심을 저버리지 않은 한 명의 맑시스트였던 만델을 말이다.

  "범죄소설의 사회사"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분명 추리소설이나 범죄 스릴러에 열광하는 팬들에게 결코 유쾌한 책이 아니다. 몇 편의 인터넷 서평을 뒤져보면, 한마디로 "뭐 이런 책이 다 있냐..."로 정리할 수 있다. 2001년에 우리말 번역 1쇄가 나와서 아직도 소식이 없는 걸보면 흥행실패는 분명한 듯 하다.

  흥행실패의 원인은 아마도 이 책이 "범죄소설을 통해 본" 현대 자본주의 발전사였기 때문인 듯 하다. 만델의 표현대로 부르주아 사회는 곧 범죄의 사회이다. 넘쳐나는 잉여를 공평히 분배하지 못한다는 사실 자체에서, 대공황이라는 자본의 운명에서, 이미 이 사회는 어떤 식으로든 범죄를 배태하지 않을 수 없는 곳이며 범죄소설은 이러한 운명의 도피적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드가 앨런 포와 코난 도일에서 시작한 경쟁 자본주의 시기의 추리소설에서 국가, 기업, 조폭들의 총체적인 범죄카르텔을 묘사하는 "로빈 쿡"류의 스릴러까지 만델의 범죄소설 분석은 그야 말로 불타는 범죄의 연대기이다. 놀라운 점은 정치경제학이라는 '딱딱한 학문'을 전공한 만델이 악당과 탐정의 유형, 서사의 전개, 소설의 공간적 배경, 사건의 소재까지 광범위하게 보여주는 "인문학적 분석력"이다. "007"의 탄생에서 시장의 확대와 경제적 인간의 합리성이 쇠퇴한 증거- 활동 무대의 세계화, 셜록홈즈와 같은 논리적 추리력을 수사기관의 조직력으로 대체하는 것 -를 보여주는 능력은 대개의 정치경제학자들에게 기대하기 힘든 일일 것이다.

  만델이 보여준 범죄소설의 사회사는 단지 소설의 영역에만 국한될 수는 없다. "도망자"와 같은 헐리우드 스릴러물이나 "대부", "원스 어폰어 타임 인 아메리카" 와 같은 영화 역시 만델의 주장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 그의 말대로 "역사 유물론이 적용될 수 있는 대상과 그렇지 못한 대상의 차이가 어디에 있겠는가?"

ps: 행여 이런 글을 읽고 경제 결정론 운운하지 마시길 바란다. 일단 읽고 말씀해 주시길... 장담컨대 금방 읽으실 수 있을게요..^^

Posted by WYWH
2008. 1. 3. 0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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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 보급율로 따지자면 세계2위를 달린다는 우리나라에서 다른 것은 모르겠으나 음악 매니아들을 만족시켜 주는 건 단연 P2P 일듯하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한 때 냅스터가 희귀음반이나 부틀렉(Bootleg)들의 보물창고였듯이 말이다. 그러나 80년대까지만 해도 소위 두꺼운 판지에 앨범 자켓을 복사해 붙여놓은 "빽판"들이 청계천과 세운상가 2층 도처에 널렸으니, 나 같이 조숙한(?) 자칭 "언더 음악 매니아"들의 냅스터는 그런 곳이었다. 물론 그곳에 가기 위해선 깍뚜기 입성을 준비하는 형님들의 문화 비디오 구매 공세(때로는 협박)가 있었지만, 어렵사리 구한 핑크 플로이드 빽판 한장으로 다음날 무지몽매한 중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사명은 놀라운 용기를 낳았던 것이다!! 이런 기억을 새롭게 해준 다큐멘터리가 있었으니...바로 마이크 피기스(Mike Figgis)의 Red, White & Blues이다.

  BLUES 다큐멘터리 7부작 중 한편인 이 영화에서 마이크 피기스(Mike Figgis)는 미국 블루스가 대서양을 건너 영국에 유입된 경로와 60년대 소위 White Boy Blues가 다시 미국으로 역수출되는 블루스의 연대기를 그려내고 있다. 말하자면 "불타는 블루스의 연대기"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듯 하다. 사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블루스 하면 떠올리는 것은 B.B King과 같은 전통적인 미국 흑인의 블루스가 아니라 영국의 에릭 클랩튼을 위시한 60년대의 Blues Revival 시기의 곡들이다. 이렇게 본다면 블루스가 전세계적인 장르가 되는데 결정적이었던 시기가 바로 이 때였을 것이다.

  1950년대 쯤으로 추정이 되는 미국 흑인들의 블루스가 정작 자국에서 침체기에 들어섰을 때, 대서양 건너 영국의 뮤지션들은 이 투박하고 단순한 장르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영화에서 누군가의 말처럼 "영국 뮤지션들은 미국이 버린 쓰레기에서 예술을 발견했던 것"이다. 물론 이들은 그 전에 스키플이나 블루 그래스와 같은 전형적인 백인들의 대중음악을 듣기도 했지만 이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모양이다. 아마도 똑같이 단순한 형식을 가졌어도 블루스만이 갖고 있는 단순한 박자와 구성에서 누릴 수 있는 무한한 변주에 매력을 느낀 탓은 아닐지.

  이들이 미국 흑인의 전유물이었던 블루스를 흡수한 자세한 행적과 증언들이 이 다큐멘터리의 중심을 이룬다. 이른바 1960년대 Blues Revival에 대한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는 이 영화는 나아가 하나의 대중문화 장르가 어떻게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변이되어 다시 회귀하는지를 생각하게 해 주는 중요한 기록물이기도 하다. 블루스라는 장르가 영국에 유입된 경로, 즉 미국 블루스 뮤지션들의 유럽투어 및 해적판의 청취로 시작되어, 악보도 없이 레코드와 라디오 만으로 기타 주법을 연습하고, 클럽에서의 연주와 레코드 취입까지. 그리고 이들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흑인들만의 공간에서 그들의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원래 미국 흑인들의 것이었던) 블루스를 연주하게 된 상세한 경로가 그 주역들의 증언으로 펼쳐진다. 앞서 내가 주절거린 80년대의 추억은 당시 에릭 클랩튼이나 존 메이욜 등의 기억과 정확히 일치한다. 에릭 클랩튼은 당시 빽판(영화에선 Vinyl)을 쌌던 싸구려 골판지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거...진짜 두꺼웠어요..."

  에릭 클랩튼, 잭 브루스, 진저 베이커(이상 크림 Cream), 존 메이올, 밴 모리슨, 제프 백, 피터 그린 등은 미국 흑인 블루스 뮤지션들에 대한 그들의 기억과 감탄을 회상한다. 이 회상의 중간 중간에 그 유명한 "Abbey Road Studio"에서 펼쳐지는 톰 존스와 밴 모리슨, 제프 백의 연주는 이들이 어떻게 블루스를 현재까지도 그들의 음악에 녹여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감동깊은 장면이었다.

  하나의 대중문화 장르가 유입되고 재생산되어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는 이 묘한 구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대중문화의 이식과 그 역수입이라는 경로를 이 토록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도 찾기 힘들 듯 하다. 만일 우리의 국악을 중국인이 재해석하고 변형하여 우리나라에서 공연한다고 생각해 보자. 이들에게 우리는 무한한 감사를 느낄 수 있을까? 미국의 경우, 그것도 인종차별이 여전히 심하던 60년대에 미국인도 아닌 영국인이 그것도 백인들이 흑인들의 음악적 공간에 진입할 수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ps: "세운상가의 추억"에 뽀너쓰! 사실 한번은 강제로 "은하철도 999" 딱지가 붙은 문화 비디오를 산 적이 있다. 아는 사람 다 알겠지만, 그건 진짜 "은하철도 999"였다. 자기들과 같은 길을 가길 바라지 않으신 세운상가 2층 형님들의 그런 마음 씀씀이을 생각하면....욕이 나올려구 한다!

Posted by WYWH
2008. 1. 3.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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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는 90%가 흑인이었어요. 이번엔 서필모어로 갔었죠... 머리가 긴 백인들만 보이더군요....사회자가 '신사숙녀 여러분 최고의 권위자 B.B. 킹을 소개합니다.'라고 하니 전부 일어섰어요.... 전부... 핀소리까지 들렸어요..... 모두 일어났죠..... 제 삶에서 그런 일은 한번도 없었어요. 모두 일어나더니 박수를 치기 시작했죠. 너무 감동받아서 견딜 수가 없었죠. 전 가만히 서서 울기 시작 했어요. 45분 간의 연주 시간 동안 전 서너 번의 기립박수를 받았어요. 그리고 제가 떠날 때가 됐을 때 다시 일어서더군요. 그렇게 다른 종류의 관객 앞에서 연주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날 밤은 90%의 흑인관객 대신에 95% 정도의 백인 관객이 있었죠. 난생 처음이었요. 그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지만 할 수 있다면 좋겠군요..."

B.B King

  THE BLUES 7부작 중 블루스에 가장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작품을 고르라면 Richard Pearce의 "멤피스로 가는 길(The Road to Memphis)"를 들고 싶다. 멤피스로 간다는 것은 블루스의 고향 중 하나로 간다는 의미 뿐 아니라, 그 길을 되짚어 가며 떠올리는 블루스의 역사 그 자체가 또 하나의 12마디 블루스임을 보여준다. 때로는 이미지들의 이어짐과 내러티브가 마치 악보의 구성처럼 인트로, 중간 소절, 후렴구, 그리고 마무리를 느끼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은 영상과 음악 예술이 동일한 형식으로 수렴될 수도 있음을 알게 해준다.

  영화에 등장하는 세 인물은 50년 대 멤피스의 빌 스트리트(Beale Street)에서 함께 활동하던 벗들이다. 시작은 같았던 이 세 명은 멤피스로 돌아와 귀향공연을 준비하는 지금, 너무도 다른 그러나 어찌보면 동일한 길을 걸어 일흔의 나이를 바라보고 있다. 오래 전 그래미상에 노미네이트 된 경력으로 미 전역을 돌며 생계를 이어가는 바비 러쉬(Babby Rush), 빌 스트리트의 전성기가 끝났을 무렵 뉴욕으로 가 세탁일로 살아온 로스코 고든(Rosco Gordon), 그리고 블루스의 살아있는 전설이 된 비비 킹(B.B King)이 그들이다. 서로 다른 항로를 지나온 이들의 추억과 회상이 이 영화의 대부분을 이루지만, 글 앞에 인용한 비비 킹의 회고는 그들 모두가 겪었던, 아니 미국인들 모두가 겪었던-- 그리고 지금도 겪고 있는 -- 인종차별의 역사와 블루스의 험난한 여정을 생생히 증언해 준다. 비비킹은 빌 스트리트에서 당시로선 모험에 가까웠던 라디오 방송국의 "흑인" DJ로 시작하여 필모어 웨스트 공연(68년)에서 난생 처음 백인 관객들의 환호를 받게 된다.

  어찌보면 인종차별의 역사보다 식민의 경험과 지역감정의 분리를 경험한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같은 영토 내에서 피부색이 처 놓은 삶과 음악의 게토(ghetto) 속에 살아온 이들의 회상은, 비비킹처럼 성공한 아티스트건, 지금은 피아노의 Key마저도 잊은 할아버지건(로스코 고든), 다니는 곳마다 개런티 흥정으로 속을 앓는 왕년의 스타건(바비 러쉬) 현재의 모습에 상관없이 다시 멤피스로 모이게 하는 상처이자 자양분임을 확인시켜 준다. 그래서 영화 막바지에 멤피스의 클럽 공연은 현재의 위치에 상관없이 그들의 삶을 버텨온 모진 인내와 열정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한 감동을 준다.

  그러나 마치 블루스 연주가 마지막 소절에서 처음의 패턴으로 돌아가 듯, 영화의 마지막은 다시 동일한 세 명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다시 어디론가 떠나는 순회공연 버스 안의 피곤과 결국엔 다시 블루스로 돌아오지 못한 세탁소 늙은이의 장례식이 그것이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Buenavista Social Club)"의 엔딩은 환호와 회한으로 새로운 시작의 희망을 주었다면, 이 "멤피스로 가는 길"은 그런 희망을 던져주지 않는다. 그저 모두 알고 있듯, 한 차례의 환호 이후 이전과 다름없는 고단한 일상이 있음을 결코 감추지 않는 것이다. 이 영화의 미덕이자 동시에 그 리얼리티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이 내가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가장 블루스에 가까운 영화, 아니 블루스 그 자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Posted by WYW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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