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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차나 연차를 붙였다면 일주일은 족히 쉬었을 추석 연휴가 U-17 여자 월드컵 우승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사실 어지간한 골수 “축빠”가 아니면 지난 번 4강에 오른 20세 이하 여자축구나 이번 17세 이하 여자축구 대표팀이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리 만무하다. 박지성이나 이청용, 그리고 남자 국가대표팀에 쏟아지는 관심에 비하면 이들이야말로 “인기종목 내 비인기 부문”이라고 해야 하나? 17세 이하 대표팀에 선발될 수 있는 선수자원은 고교등록 선수 345명뿐이었고, 국내 여자축구팀은 초등학교에서 실업팀까지 합쳐도 65개에 그친다고 한다. 남자 축구나 야구처럼 오랜 기대의 역사를 가진 종목들보다 여자축구와 같이 혹시나 하는 기대의 승전보가 날아오면 기다렸다는 듯 쏟아지는 기사들이 있다. 지난 시간 무관심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척박한 환경에서도 꿈을 잃지 않고...”, “○○ 종목의 불모지에서 건진 값진 승전보”가 포털 뉴스에 넘쳐난다. 물론 여기서 끝이 아니다. 각 팀 스타 선수들의 불우한 유년환경이나 혹독한 훈련 스토리가 이어서 나와줘야 한다. 이렇게 해서 누구나 다 알면서도 또 어느 한켠 뭉클할 수 밖에 없는, “꿈을 향한 의지” 만으로 잘 버텨준 우리의 태극전사들(소녀들!)이 탄생한다. 지난 8월 20세 이하 여자축구팀의 지소연이 그랬고, 이번엔 여민지와 그 동료들이 그 주인공으로 발탁될 예정이다.

추석연휴가 길긴 길었나보다. 갑작스런 폭우 피해와 여자축구 대표팀의 승전보에 희비가 오락가락하다보니 연휴 전 포털 뉴스들을 도배했던 “신정환 도박 파문”을 잠시 잊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신정환의 도박행보와 거짓말에 대한 집중포화는 이미 내각 청문회와 외교부 특채 파문에서 준비되고 있었다. 김태호와 신정환을 두루뭉수리한 ‘공인’이라는 동일체급에 놓을 생각은 없다. 단지 일국의 국무총리 후보에서 연예인에 이르기까지 전가의 보도로 적용된 원칙이 “도덕성”이었다는 점만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공정한 사회”라는, 어찌보면 자뻑에 가까운 이명박 정권의 국정기조로까지 이어진 이 “도덕성”의 효과는 공인들에게만 해당되지는 않는다. 도덕성에 대한 인정은 집권 후반기 정권 재창출을 노리고 엄선했던 충신들마저 쳐내게 했다. 이 과감한 “결단” 뒤에 공인만이 아닌 모든 ‘국민’들에게 “공정하게” 적용되어야 할 도덕성의 경고가 숨겨져 있다면 지나친 추측일까? 신정환의 도박 행보와 거짓말은 분명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지상파 방송사조차 김태호에게도 하지 않던 ‘연예 탐사 저널리즘’을 행하고, 스토리까지 엉망으로 만드는 예능프로그램의 ‘급편집’이란 강수를 두는 건 분명히 오버다.

여민지의 “의지”나 신정환의 “도덕성 결여”에 딴지를 걸자는 얘기가 아니다. 의지와 도덕은 그 자체만으로는 마땅히 지켜야할 규범이자 덕목이다. 그러나 문제는 의지에 대한 찬양과 도덕에 대한 강박이 분출되는 특수한 국면에 있다. 1997년 말 공황을 기점으로 한국의 거의 모든 공동체 운동과 조직들이 붕괴되던 시기, 해고와 퇴직의 광풍 속에서 우리가 배운 것은 “스스로 버텨내야 한다”는 의지의 습득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개인적 학습의 과정은 박세리와 박찬호, 그리고 2002년 월드컵 ‘전사’들의 기적으로부터 충분한 정당성을 확보했다. 그리하여 2000년대 중반 이후 위기를 함께 극복하기보다 혼자서 버티기에 익숙한 20대들이 등장했다.(혹자들은 이들의 개인주의를 두고 “20대 절망론”을 펴기도 했다) 개인이 감당해야 할 고난의 극복, 곧 “의지의 강자”라는 이미지는 2000년대 중반 한국사회에서 본격화된 보수화의 바람과 그 맥을 같이 했다. 그 보수화의 중심에서 바로 개인의 의지를 온 국가에 육화시켰던 박정희가 부활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도덕(moral)”은 또 어떠했던가? 97년 공황에서 가장 많이 듣던 말 중 하나가 “모럴 해저드(moral hazard)”였다. 경제의 3주체인 정부, 기업, 가계 모두에 공히 적용되던 이 용어는 2000년 신용카드 대란 이후 어느새 “갚을 능력도 없으면서 일단 쓰고 보는 무책임한 개인”(신용불량자)으로 점점 확산되어 갔다. 개인의 무책임으로 협소해진 이 용어가 이번 내각 청문회와 외교부 공채 파문에서 다시 등장한 것 역시 우연이 아니다.

17세 이하 여자축구 대표팀의 우승은 당연히 기뻐할 일이다. 문제는 그 소녀들의 “꿈을 향한 의지”가 모든 국민들에게 암묵적으로 강요될 때 벌어진다. 324명의 여자 고교등록 선수들 모두가 그러한 의지를 불태우지 못한다고 탓할 수는 없으며, 무수한 자기 소개서를 쓰면서도 취직이 안되는 청년들을 소녀들보다 못한 의지박약아로 몰수는 없다. 김태호에서 신정환으로 이어지는 도덕적 책망 또한 당연하다. 그러나 신정환의 도박 중독과 직장인의 로또 중독(?)은 같은 수준이 아니며, 박연차를 몰랐다고 한 김태호의 거짓말과 갚을 돈이 없다며 버티기에 들어가는 신용불량자의 거짓말은 동급이 아니다. 의지와 도덕은 사회경제적 상황을 떠난 진공상태의 개인을 대상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권이 위기에 닥쳤을 때, 혹은 한 사회의 거대한 구조조정이 시도될 때, 이 의지와 도덕이라는 담론은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다. 1980년대에 ‘영국병’을 고치겠다던 철의 여인 대처의 구호는 바로 자유로운 시장과 도덕적인 사회였다. 지당한 말이었다. 그러나 시장의 자유란 사실 금융의 자유였음을, 그리고 도덕적 사회란 긴축재정으로 복지시스템을 뒤흔들며 그 수혜자들을 ‘등쳐먹는 자들(scroungers)’이라 몰아간 훈육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사람들은 이를 신자유주의라 부르기 시작했다. 대처의 1980년대와 이명박의 2010년대는 분명히 다르다. 그럼에도 여민지의 의지와 신정환의 부도덕이 집권 후반기 이명박 정권의 정치적 담론에 포섭되리라는 걱정은 지울 수가 없다. 정치적 담론 투쟁에서 가장 결정적인 것은 지배세력들의 거짓말이 아니라 의지와 도덕 같이 모두가 거부할 수 없는 “당연한 말”이기 때문이다.

[2010.09.28미디어스기고문]

Posted by WYWH
2010. 8. 3. 00:47
Maradona, by E. Kusturica. 2008.




"경기장에 계신 우리 디에고, 왼손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기적이 임하옵시며 골이 땅에서 이룬 것 같이 하늘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우리에게 일용할 기쁨을 주옵시고, 저 기자들을 사하여 준 것 같이 나폴리 마피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주앙 아벨란제 앞에서 구하옵소서, 디에고." <디에고 기도문>



"난 배우요. 왜냐하면 난 살고 싶은 삶을 살기 때문이오. 배우들은 주어진 대사를 읽잖소. 나는 읽지 않고 살아버리지. 그게 내 무대요. 인생의 연기."  Diego Armando Maradona

 

"마라도나교"라는 것이 있단다. 제단과 십자가, 신부는 물론 경전도 있다. 아르헨티나의 한 결혼식은 그들이 마라도나를 진정한 축구의 신으로 영원히 섬기며 공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겠다는 서약으로 끝난다. 그들에게 정말 마라도나는 신일까? 마라도나는 자신이 신인듯 연기를 하고, 그 연기에 경탄한 사람들 역시 기꺼이 신도라는 또 다른 배우의 역을 기꺼이 맡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 쿠스트리차는 이미 완벽한 배우들을 앞에 두고 영화를 찍은 것은 아닐까?
무슨 의문의 눈길을 던지더라도 이 연기자들은 라틴 아메리카와 이탈리아 남부를 아우를 만큼 거대한 숫자이고, 때론 축구장에서, 때론 거리의 화염병과 최루탄 속에서 그 연기를 포기하지 않을 만큼 치열한 배역에의 몰입을 감수한다. 도저히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지만, 이들의 연기가 그토록 치열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연기자 모두가 그 결말을 알 수 없기 때문이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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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두 달 반이 훌쩍 지났다. 그 동안 몇 편의 기획서와 보도자료를 썼고, 요즘은 한 프로젝트 보고서의 몇몇 장들을 써내려가고 있다. 정말 오랫동안 내 자신이 문제를 만들고, 그 답을 쓰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던 때와 달리, 누군가로부터 주어진 문제를― 그것도 조금의 변형도 용납되지 않는 문제에 ―이미 나올 것은 다 나온 답들을 조합하여 글을 쓰는 일은 아직도 영 서툴기만 하다. 처음 한 달은 낯설면서도 익숙한 보고서의 ‘문체’에 내 문체(이런 게 있다면)가 적응하지 못한 것이 힘겨움이었다면, 이제는 내가 원하지 않거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주어진 문제와 씨름하는 일이 또 다른 힘겨움임이 되고 있다. 적어도 “쓰고 싶은 글”을 더 많이 써왔던 내게 “써야 하는 글”이 주는 압박이란 그저 회사일의 차원이 아니다. 사고의 깊이와 폭은 분명히 머릿속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표상되는 형식에 의해서도 한계가 지워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쓰고 싶지 않았는데...”라는 생각이 반복되면, 오직 이게 아니라는 빈약한 부정만이 남고 처음 쓰고 싶었던 내용과 형식은 망각에 묻히고 만다.
예를 들어 “써야 하는 글”은 이런 식이다.

“새로운 미디어 플랫폼들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주파수의 희소성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무선 인터넷 환경의 확대를 통해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하려는 이동통신사들의 경쟁은 얼마 전 국회를 통과한 전파법 개정을 통해 가능해진 주파수 경매로 인해 더욱 격화될 전망이다. 따라서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2013년 디지털 전환 후 주파수 대역 재배치 계획에서 고품질과 높은 효율성을 가진 기존 방송 주파수 대역은 더 이상 공적 서비스의 토대가 되기 힘들 수도 있다. 그러나 해외 사례가 보여주듯, 어떤 나라도 전면적인 주파수 경매제를 도입하고 있지는 않으며 정책기관과 이해당사자인 사업자 간의 협의와 조정을 거쳐 다양한 할당방식과 용도를 정하고 있다. 주파수의 제한된 대역을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무수한 기술적 가능성들이 미래에 전개된다 해도 이러한 협의와 조정이 배제된다면 공적 서비스로서의 방송을 위한 주파수 확보는 영원히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만일 이 글이 내가 “쓰고 싶은 글”이었다면, 이렇게 썼을 것이다.

“방송 콘텐츠를 비롯한 ‘비물질 상품(immaterial commodity)’의 생산과 유통에서 상당히 간과되어 온 부분은 바로 현 시기 테크놀로지의 기술적 한계이다. 현재 가능한 주파수 대역의 활용 기술은 바로 이러한 한계를 잘 보여준다. 주파수는 그 대역의 성질에서부터 일정한 자연적 한계를 갖는다. 1GHz 이하 저대역(VHF와 UHF) 주파수의 특성은 적어도 지금까지의 테크놀로지로서는 극복하기 힘든 자연적 한계이다. 따라서 이 주파수를 통해 유통되는 비물질 상품은 분명한 ‘지대(rent)’의 성격을 갖는다. 바로 여기서 주파수를 ‘국민의 자산’이라거나 ‘희소자원’이라 부르는 모호함이 극복된다. 좋은 대역의 주파수를 거래함으로서 얻게되는 방통위의 ‘기금’이나 사업자의 ‘이윤’은 그 실현에 있어 분명히 사회 총잉여의 한 부분임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 지대의 확보를 둘러싼 자본간 경쟁은 임노동 소득의 분배 몫 할당을 포함하는 사회적 투쟁의 다른 형태이다.”

더 많은 정교화가 필요한 구절이지만, 이 글쓰기는 앞에 나온 ‘주파수의 희소성’을 ‘지대’로, ‘협의와 조정’은 ‘사회적 투쟁’으로 몇 단어를 바꾸는 작업이 결코 아니다. 첫 번째 글은 나 역시 경쟁 중인 행위자들 중 한 쪽의 입장에서 서서 그 확보 방안이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두 번째 글은 사업자간 경쟁 자체가 자본과 노동 사이의, 또한 잉여의 분배를 둘러싼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투쟁의 한 외양임을 전제로 하고 있다.


어떠한 명분과 자기 합리화를 동원하더라도 생계를 위한 글쓰기와 그 생계의 지겨움을 넘어서려는 열망이 담긴 글쓰기는 분명히 다르다. 지난 두 달 반 동안 배운 새로운 사실이 있다면, 이러한 두 가지 글쓰기는 ‘구국의 결단(!)’과 같은 치기어림으로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할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두 글쓰기의 분리가 늘 존재한다는 현실에 대한 인정과 그 간극의 확인은 보고서와 기획서 작성 속에서 빈약해져만 가는 부정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점이다.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써야 하는” 글을 부정하는 짓은 오래 갈 수 없을 뿐 아니라 결국에 가선 내가 부정해야 할 대상 조차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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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에 관해서 꿈꾸어야 하는가?” 나는 이 말을 쓰고 난 뒤에 깜짝 놀랐습니다. 언젠가 내가 “연합회의” 석상에서 앉아 있었던 생각이 떠올랐어요. 내 곁에는 <라보체예 젤로>의 편집인들과 동인들이 자리하고 있었지요. 마르티노프 동지가 일어서서 마치 나를 위협하는 듯 말했습니다. “당신에게 질문할 게 있습니다. 편집 팀이 독자적이라면 당 위원회의 중계 없이 무언가를 갈망할 권리를 지니고 있습니까?” 그의 뒤에는 크리체프스키 동지가 있었는데, 그는 이미 오래전에 플레하노프 동지의 사상을 깊이 연구한 마르티노프 동지의 철학에 심취하여, 다음과 같이 위협적으로 말을 이었습니다. “내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는 마르크스의 사상대로 오직 해결될 수 있는 과제를 제시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는 당과 함께 추진하는 과업을 행하는 과정을 전략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마르크스주의자는 무언가를 꿈꿀 권리를 지니고 있습니까?

이러한 도전적인 질문을 받았을 때, 어떤 냉혹한 느낌이 몸속에 엄습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어디에 몸을 감추어야 할지 생각하며, 내 뒤에 있는 피사레프 뒤에 숨으려 하였습니다.

피사레프는 꿈과 현실 사이의 간극에 관하여 “간극이란 다른 것과 비교될 수 없다”라고 기록했습니다. “내 꿈은 역사적 사건의 자연적 진행 과정을 추월할 수 있다. 혹은 그것은 역사적 사건의 진행 과정을 일탈하여, 결코 이러한 길에 동참할 수 없을 때도 있다. 첫 번째 경우 꿈이란 결코 해롭지 않다. 그것은 일하는 사람들의 노동 행위의 에너지를 촉진시키고 강화한다. … 그러한 꿈들이 창조적인 힘에 나쁜 영향을 끼치거나 그런 식으로 꿈꾸는 모든 능력을 상실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인간은 나중에 상상력을 통하여 일원적이고 완성된 상으로서의 어떤 작업을 예리하게 간파할 수 없을 것이다. 즉 나중에 두 손으로써 실제 생산해 내는 작업을 생각해 보라. 만약에 그렇다면 과연 어떤 동기가 인간으로 하여금 예술, 학문 그리고 실제 삶의 영역에서 방대하고 힘든 작업을 착수하게 하고 완성시키게 하는지 상상하려고 해야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 꿈과 삶 사이의 간극은 해롭지 않다. 만약 꿈꾸는 자가 진지하게 꿈을 생각하고, 삶을 주의깊게 관찰하며, 자기가 관찰한 바를 꿈속의 환영과 비교하여, 양심적으로 꿈의 형상을 실현하려고 작업을 추진한다면 말이다. 만약에 꿈과 삶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존재하고 있다면, 모든 것은 최상의 질서 속에 존재할 것이다.”

이런 종류의 책임은 유감스럽게도 사회주의 운동에서 드물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이에 대한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있을까요? 아마도 자신이 냉정하고, “구체적인 문제들”에 상당히 “근접해” 있다고 자만하고 있는 자들은 이러한 책임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이들은 합법적인 비판을 옹호하는 자들이며, 앞으로 향해가는 합법적인 정책을 옹호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Lenin, Was tun?, Ausgewählte Werke, 1946, S. 315. ; Ernst Bloch(1959), Das Prinzip Hoffnung, Frankfurt am Main: Suhrkamp. : 박설호 옮김(2004), <희망의 원리> 1권, 서울: 열린책들. pp.30-32.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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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작가인 킬고어 트라우트는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족적을 남겼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사실 우리는 2001년 2월 13일 오후에, 정확히 10년 전인 1991년 2월 17일로 돌아갔었다. 왜냐고? 트라우트는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우주가 갑자기 지겨움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말해주었다. 시간을 무한히 확장하며 앞으로만 나아가던 우주는 “왜 자기가 이런 짓을 해야 하는지, 그래서 무슨 소용이 있는지”를 아주 잠깐 고민했다는 것이다. 우주는 그저 딸꾹질 한 번 할 정도의 시간만 고민했지만, 그 시간은 인간에게 지난 10년을 다시 반복하게 했다.

  타임퀘이크(timequake)라 불리는 이 10년 동안 사람들은 이미 이전에 자기가 했던 말들과 행동을 티끌만큼도 틀리지 않게 다시 해야만 했다. 타임퀘이크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 사람들은 데자뷰가 아닌가 생각했지만, 이 데자뷰를 10년 동안 1초도 빼놓지 않고 경험하게 될줄은 아무도 몰랐다. 잘못 찍었던 답안지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어도 저절로 그 때와 똑같이 찍었고, 내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한 입사원서는 여전히 또 내고 있었으며, 연인에게 헤어지자고 했던 말도 다시 반복해야 했다.

  문제는 이 반복의 10년이 끝난 두 번째 2001년 2월 13일 오후가 되었을 때,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이제 ‘자유의지’가 돌아왔음을 아무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자동차 핸들은 제멋대로 돌아갔고, 돈을 내주어야 할 은행원은 건네던 손을 멈췄다. 사람들은 벼락처럼 떨어진 자신들의 자유의지를 갖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아니 그런 것이 있기나 했던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당신들은 이제 자유의지를 갖게 됐어요!”라는 말 따윈 아무 소용이 없었다.

  바로 그 때!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작가 킬고어 트라우트는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굳어 있던 한 경비원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당신은 아팠지만 이제 나았고, 해야 할 일이 있소.”

  이 말은 곧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제야 비로소 자신들의 운명을 다시 책임질 순간이 왔음을 깨우쳐 주는 외침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 모두는 그 끔찍했던 타임퀘이크가 있었다는 사실 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지구상에 몇 안되는 현명한 사람들은 아직도 그 말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어느 결혼식에서 이런 주례사를 들었다. “두 사람은 아팠지만 이제 나았고,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고 가장 현명했던 킬고어 트라우트를 기리며 올해의 새해인사를 보낸다. “당신은 그동안 많이 아팠지만, 이제 다 나았고, 해야 할 일이 있어요.”

From Kurt Vonnegut, 박웅희 옮김(2006), 『타임 퀘이크』, 아이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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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이 의미하는 ‘반복되는 자연’은 갈수록 상징 속에 표현된 항구화된 사회적 억압임이 증명된다. 움직이지 않는 형상으로 대상화된 ‘전율’은 특권층의 확립된 지배를 표시한다. 이렇게 확립된 지배는 ‘형상적인 것’을 모두 포기하더라도 보편 개념으로 남게 된다. 학문의 연역적 형식마저도 위계질서와 강압을 반영한다. 첫 번째 범주들이 개개인에 대한 조직화된 부족과 그 부족의 힘을 대변한다면 개념들의 전체적 논리 질서, 의존성, 연결, 포괄 그리고 연합은 노동 분업을 토대로 한 사회의 현실구조를 반영한다. 물론 사유 형식의 이러한 사회적 성격은 뒤르켐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사회적 연대감의 표현이 아니라 사회와 지배가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는 증거이다. 지배는 사회 속에서 확립된 것이지만 또다시 사회 전체에 한 차원 높은 일관성과 힘을 부여한다. 지배가 사회에 뿌리를 내리면서 만들어낸 노동 분업은 지배받는 전체의 자기유지에 기여한다. 전체는 전체로서, 또한 전체에 내재한 이성의 활동으로서, ‘파편적인 것’의 집행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 된다. 개별자에 대해 ‘지배’는 보편자로서, 현실적 이성으로 등장한다.

Th. Adorno & M. Horkheimer, 김유동 옮김(2001), 『계몽의 변증법』, 문학과 지성사. 49~50쪽

#1
각종 사회과학 세미나를 ‘받던’ 대학 시절, 무슨 세미나를 하고 싶냐는 선배들의 질문에 몇몇 동기들은 경제학이니 철학을 말했다. 아마도 어린 마음에 뭔가 저 높은 곳에 있는 왕좌에 도달하면 나머지 과목들― 역사, 민족, 페미니즘 등등 ―은 그 아래 머리를 조아릴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2
대학원 논문 제안서 심사장.
워낙에 친분도 고르지 않고 전공도 다른 교수들이 모인지라, “무슨 주제로 어떻게 쓰겠다.”고 말하는 발표자에게 제일 만만한 질문은 “방법론이 뭐냐?”이다. 논문의 제목이 무엇이건, 일단 이 질문으로 포문을 열면 학생들의 십중팔구는 양적/질적(Quantitative/Qualitative)의 두 형용사를 배회하다 “정정하겠습니다.”로 백기 들고 내려온다. 설명하는 방식(How to explain)이 설명되어야 할 것(the explained)을 결정함을 깨달은 영특한 몇몇 대학원생들은 ‘방법론’이라는 험난한 길을 떠나고 급기야 사회학, 과학철학, 철학으로 전과를 하겠다는 학생들도 생긴다.

#3
꽤 오랫동안 특정 분야의 이론들은 자신이 대상으로 하고 있는 연구영역 또는 대상의 정당성을 그 이론 외부에서 인정받으려 했다. 다양한 분과의 ‘과학’들은 자신들의 근원을 늘 저 고대 그리스에 두었고, 그리스 철학의 후계자들에게서 자신들의 연구방법과 대상의 정당성을 발견해왔다. 마르크스주의 역시 “정치경제학의 방법”이라는 마르크스의 그 짧은 글에서 실로 무수한 변증법의 도식과 유물론을 이끌어 냈다. 그리하여 다양한 마르크스주의 분과들이 알현해야 할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왕좌가 탄생했다.

#4
아도르노가 “보편자”, “현실적 이성”라고 말한 지배의 형태는 이런 식으로 도처에서 나타났다. 저 높은 곳에 위치한 왕좌를 극점으로 논리적 위계질서가 피라미드처럼 세워졌다. 대기업의 조직도가 이런 사유형식과 동일한 모양을 취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기업의 조직도와 사회조사방법론 서론의 연구모델은 ‘노동 분업을 토대로 한 현실구조’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이런 까닭에, 좌파건 우파건, 마르크스주의건 신고전파건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 지배를 스스로 만들어 왔다.

#5
한 대학원 후배가 이번 학기 어떤 과목을 들을까 고민하다 ㅁㅎㅋㅌㅊ학과의 강의계획서를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견학과 토론이 격주로 진행되는 ‘흥미진진’한 강의도 있고 와인 하나로 16주를 채우는 강의도 있다. 언젠가 부터 새로운 전공과 이름도 생경한 학과들은 학문의 논리적 위계질서를 내세우지도 않고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할 ‘왕좌’를 만들지도 않는다. 도리어 학문의 피라미드에서 그 왕좌에 계셨던 분들이 앞장서서 그런 위계질서를 깨고 계시니, ‘실용분과’에서 공부하는 나 같은 풋내기가 나서서 뭐라 할 상황도 아니다. 그런데 정말 왕좌는 없어졌고 이 새로운 전공들은 학문의 위계 속에서 자유로워진 것일까? 한 때 철학이 앉았던 그 자리에 이젠 “평등한 계약당사자들의 자유로운 교환이 이루어지는 <시장>”이 들어서지 않았는지. 이 <시장>은 ‘학문’이나 ‘이론’ 아니라며 자신의 무고함을 토로할지도 모른다. 맞다. <시장>의 변명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이론과 현실이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지배적인 관념은 언제라도 지배적인 물질적 힘으로 전화할 수 있다는 오래전 마르크스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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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 7. 0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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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ia & Winston Smith (Actors Jan Sterling & Edmond O'Brien)
<1984> (Michael Anderson, 1956)

  무엇이든 진실일 수 있다. 소위 자연법이란 것은 엉터리이다. 인력의 법칙도 마찬가지이다. 오브라이언은 자신이 ‘원한다면 비누방울처럼 이 마루 위를 둥둥 떠다닐 수도 있다.’라고 말한바 있다. 윈스턴은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해 냈다. 윈스턴 자신도 그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런 일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별안간 난파선의 꼬리가 물 위로 불쑥 솟아오르듯 이런 생각이 그의 뇌리에 떠올랐다. ‘그건 실제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야. 상상일 뿐이지. 그건 한갓 환상에 지나지 않아.’ 그는 곧 그런 생각을 지웠다. 잘못된 생각임이 분명했다. 그것은 이 세상 밖 어딘가에 ‘진짜’ 일이 일어나는 ‘진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전제한 데서 나온 생각이다. 어떻게 그런 세계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의식을 거치지 않고 어떻게 사물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겠는가? 모든 일은 마음에서 생긴다.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진짜로 일어나는 것이다.

George Orwell, 정회성 옮김(2003), 『1984』, 민음사. 389쪽

  1946년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오웰이 펜을 잡았을 때, 그의 눈앞에는 어떤 세상이 펼쳐져 있었을까? 전쟁이 끝났다는 안도 뒤에는 새로운 계급관계의 구성을 놓고 벌어진 또 다른 노동과 자본의 투쟁이 지속되고 있었다. 모든 것은 불안정 했고, 오래된 것은 아직 그 힘을 소진하지 못했지만, 새로운 것 역시 자신의 형상을 모두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6년에 걸친 세계대전 속에서 오웰이 본 것은 “폐허” 그 자체였을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건 자본주의 국가건 그 폐허 위에서 무언가를 재건한다는 것은 오웰에게 또 다시 재로 변할 거대한 기념탑을 쌓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까닭에 이 소설에서 그가 “전쟁은 평화”라고 오브라이언을 통해 말했을 때, 그것은 단지 전체주의의 수사학이 아니라 체제의 안정을 위해 필연적으로 전쟁이 요구될 것이라는 오웰 자신의 예측이다.
 
  텔레스크린, 신어(newspeak), 마이크로폰, 사상경찰, 과거 창작국 등의 기구들은 정보화 사회의 전체주의적 감시체제를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다. ‘무엇 때문에 권력을 유지하려 하는가?’라는 윈스턴의 질문에 ‘권력 그 자체를 유지하게 위해’라는 동어반복의 대답이 주어진다. 이 짧은 대화 속에서 오웰은 어쩌면 국가/민족 간 전쟁이라는 기만적 외관을 벗겨 버리고, 전쟁의 본질이란 노동자들의 희망과 저항에 맞서는 자본의 전쟁임을 폭로하려 했을지 모른다. 이 소설 속에서 유일하게 “무산계급만이 희망이다”라고 끝없이 되뇌이던 윈스턴의 종말은 이런 의미에서 또 다른 전쟁의 종말이기도 하다.

  오웰이 그리는 ‘폐허’의 충격은 내가 지금까지 영화에서 보았던 어떤 디스토피아보다 끔찍했다. 그것은 테크놀로지의 판옵티콘 때문도 아니고, 무서운 음모와 고문 때문도, 모든 사유의 재료를 없애려는 언어정책 때문도 아니다. 끔찍한 고문 뒤에 윈스턴은 위 구절처럼, ‘실재’를 포기하고 ‘의식’과 ‘마음’의 진리만을 믿는다. 그러나 더 무서운 결말은 그 의식과 마음마저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아니 자신의 것인지도 몰랐던 의식과 마음마저 빼앗겼을 때이다.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신념과 희망이 모두 사라지고 난 후에도, 또 무너질 것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것이 디스토피아이다.

  ps: 그러고 보니 위에서 강조한 ‘진짜 세계’는 모 교수님의 ‘저 밖의 어떤 세계’와 똑같은 의미이다. 『1984』에서 그런 세계의 부재를 당이 강요했다면, 2006년 오늘날 세계의 부재는 학문의 이름으로 ‘요구’된다.

  기억을 위한 메모: 『1984』뒤에 붙은 ‘옮긴이의 말’은 예상대로 ‘과학기술과 정보화’에 의한 감시사회의 우려를 피력한다. 이상한 것은 오웰의 소설에서 그 과학기술과 정보화의 주체가 ‘당’이었다면, 그런 ‘당’이 없는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옮긴이가 동일한 현상을 읽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과학기술의 발달은 거역할 수 없는 것이고, 당― 정확히 말하자면 스탈린주의와 같은 공산사회? ―은 그것을 이용하기만 했기 때문에? 오웰의 소설에서 “빅 브라더 vs 노동자”의 대립항은 오늘날 어떻게 바뀔 수 있는가. 21세기에 “( ) vs 노동자”의 빈칸에 들어갈 말은? 테크놀로지는 이 대립항 위에서만 등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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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임신 시점에서 수컷이 자식에 대해 투자한 자원량은 공편한 분담량, 즉 50%보다 훨씬 적다. 개개의 정자는 아주 작아서 수컷은 매일 수백만 개의 정자를 만들 수 있다. 이것은 수컷이 서로 다른 암컷들을 이용하여 단시간 내에 많은 수의 새끼를 만드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개개의 배가 수정할 때 어미로부터 충분한 먹이를 받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 때문에 암컷이 만들 수 있는 아이의 수는 일정한 한도가 있는 반면에 수컷이 만들 수 있는 아이의 수는 사실상 한계가 없다. 수컷이 암컷을 상대로 한 착취는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중략)…

암컷이 취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먼저 지적한 또 하나의 예는 수컷에게 구애의 급식을 요구하는 것이다. 새의 경우 이 행동은 암컷이 어떤 종류의 퇴보를 일으켜 새끼 때의 행동을 나타내고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암컷은 새끼가 나타내는 것과 같은 제스처를 취해 수컷에게 먹이를 요구한다. 그와 같은 방법은- 조류의 수컷에게는 -성인 여성의 유아적 말투나 입을 삐쭉거리는 것을 남성이 귀엽게 봐주는 것처럼 자동적으로 암컷의 매력으로 생각해 왔다.

이 시기의 암컷은 알을 만드는 일에 필요한 영양을 저장하는데 열중하기 때문에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면 모두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구애 급식은 아마도 수컷이 알 자체에 직접 투자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을 것이다. 구애급식은 암컷과 수컷이 최초로 자식에게 주는 투자량의 격차를 좁히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리처드 도킨스, 홍영남 옮김, 『이기적 유전자』, 을유문화사. 232쪽, 250쪽.

  며칠 전 수능이 쉽게 출제되어 논술이 입시당락을 좌우한다고 하자. 며칠 사이에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가 절판되고 증보판(30주년 기념?)이 새로 나왔다고 한다. 학원에서 고등학교 아이들과 이 부분을 함께 읽던 중, 남자아이들 모두가 “아... 그래서 여자친구 만나면 맨날 우리가 먹을 걸 사줘야 하는 군요.”라며 ‘깨우침’을 얻었다고 좋아했다.

  요컨대 수정란에 있어 자신의 투자량이 수컷보다 훨씬 많은 암컷은 이후 양육에 대한 부담을 함께 나누고자 ‘성실한’ 수컷을 찾기 위해 일종의 “전략(strategy)”을 구사한다. 위에 말한 ‘구애 급식’ 이외에도 암컷은 수컷에게 집짓기를 시키거나, 교미를 순순히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시간지연을 통해 일종의 투자량을 증가시키는 전략을 구사한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상당수의 사람들은 연예에서 벌어지는 각종 밀고 당기기를 도킨스의 이야기를 통해 ‘쌈빡하게’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책 제목 『이기적 유전자(Selfish Gene)』가 말해 주듯이, 도킨스는 인간이란 ‘자기복제’를 유일한 지상명령으로 갖고 있는 유전자가 그 생존과 복제를 위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램한 “생존기계(survival machine)”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가 보기에 암수관계 혹은 남녀관계 역시 자신의 유전자의 50%를 가질 복제 유전자를 지구상에 계속 잔존케 할 목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사랑’이나 ‘운명’ 따위는 끼어들 여지가 없다. 유전자가 이렇게 ‘이기적’이라면, 그 유전자의 생존기계인 우리들은 ‘공익’따윈 저버리고 모두 사적인 이익만을 추구하게 된다. 요컨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인 셈이다. 그렇다면 모두가 공멸할 이 이기적 유전자의 사회가 유지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도킨스의 대답은 간단하다. 서로가 자신의 유전자를 존속시키려는 이들 사이에 각기 다른 전략들이 존재한다. 이 전략들의 교묘한 조합은 개개인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전체 구성원들을 일종의 안정된 균형상태로 인도한다. 이를 위해 그가 도입하는 이론이 바로 게임이론(Game Theory)이다. 해서 상이한 전략들의 추구와 그 균형은 “물보다 진하다”고 말하는 가족과 같은 혈연관계에서 전체 사회까지 확대되어 나타난다. 이쯤 되면 부모가 자식에게 쏟는 애정 역시 이기적 유전자에 의한 일종의 ‘투자전략’일 뿐이다.

  가히 도킨스는 사회생물학의 아담 스미스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타인을 생각하지 않고 각자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할 때 의도한 것보다 더 큰 전체의 이익을 가져올 수 있다는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1970년대 신자유주의를 준비하던 자본가 그룹들에게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로 부활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기적 집단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도달하게 되는 안정된 전략구성은 그것이 최대의 효용으로 계산된다는 점에서 현대판 공리주의의 부활이라고 하기에도 부족함이 없다. 논술시장에서 이 책이 그토록 잘 팔리는 것도 그저 ‘현대의 고전’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도리어 그 인기는 생물학이라는 자연과학 역시 이렇게 철저히 정치적인 것임을 역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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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은 우리가 사적 소유를 폐기하려 한다고 해서 놀라고 있다. 그러나 당신들의 현존 사회에서 그 사회 성원의 10분의 9에게서는 [이미] 사적 소유가 폐기되어 있다; 사적 소유가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이들 10분의 9에게 사적 소유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신들은, 우리가 사회의 압도적 다수의 무소유를 필수 조건으로 전제하는 소유를 폐기하려 한다고 우리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당신들은, 우리가 당신들의 소유를 폐기하려 한다고 우리를 비난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렇게 하려고 한다.

Marx, K. & Engels, F.(1848), 최인호 옮김(1992), “공산주의당 선언”,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1권, 박종철 출판사. 415쪽.

 

  공산당 선언을 처음 읽은 것은 대학 3학년 때였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도 선전과 선동이라는 무시무시한 작업의 ‘교본’이라는 말에 읽게 된 것 같다. “선언”이 나온지 157년이 흘렀다. 흘러버린 시간만큼 ‘선언’의 타당성이 사라졌다고 볼 수 있을까? 맑스와 엥겔스는 이미 “선언”이 나오고 25년이 흘렀을 때, 그들 스스로 여기에 명시된 상당수의 주장들에 대해 ‘낡아 버렸음’을 인정한다. 꼭 25년까지도 필요하지 않았다. 공산주의자 동맹이 선언에 서명하고 4년 후, ‘퀼른 공산주의자 소송’에서 패하여 금고형을 선고받았을 때부터 선언은 낡아 있었고 망각의 문 앞에 서 있었다.

  이 낡아버린 문건을 쥐고 지난 150여년간 수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 도래의 필연성을, 때로는 선전의 미학을, 아니면 맑스의 혁명적 글쓰기와 실천에 대해 생각했다. 1990년대 나에게도 이 선언은 어떤 핑계를 대건, 하나의 ‘매뉴얼’이었다.

  분명히 “선언”의 모든 주장과 정세 파악은 오늘날 수정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물론이란 인간의 역사가 만든 철학이며, 따라서 자본주의와 함께 소멸해야 하고 새로운 세상이 등장할 때 사라져야 한다면, 오늘날까지 선언이 남아있고 읽기가 요구된다는 사실은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있냐 없냐의 문제가 아니다. 선언의 존재 자체가 아직 자본주의라는 삶의 방식이 그때와 하나도 달라진 것 없이 지속되고 있음을 증명해 주는 ‘역사적’ 문건인 셈이다.

  “선언”은 공산주의라는 그 이름도 허망한 세상의 도래를 알리는 선포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당시의 공산당과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세상을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지침을 주는 것도 아니다. 혹은 어떤 이들의 말처럼 자본주의와 부르주아의 위대함과 그 놀라움을 ‘인정’하길 요청하는 겸손한 글도 아니다.

  “선언”은 도리어 부르주아 사회가 봉건사회 속에 잠자고 있던 저승의 힘을 깨운 마법사임을 알려주면서, 봉건사회 속 자본주의, 나아가 자본주의 속 공산주의를 말해준다. 자본주의는 그 모든 것이 타도되고 절멸되어야 할, 그래서 밑바닥부터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이 부정되어야 할 세상이 아니다. “선언”은 도리어 부르주아가 프롤레타리아트들에게 ‘이미’ 그들을 타도할 무기와 교양을 주고 있음을, 자본주의가 ‘이미’ 무소유의 상태에 있음을 일깨워 주고자 한다. 자본가들이 저지른 온갖 폐해와 부정, 그리고 그것을 온몸으로 안고 살아야 하는 우리들이 겪는 고통은 사라져야 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발견해야 할 진흙탕이며 육박전의 장소이다.

  그래서 “선언”은 이 막막한 세상에서 ‘희망’이 존재함을 아주 작은 소리로 읆조려 준다. 이 희망의 근거는 그동안 국가권력의 쟁취나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같은 혁명의 매뉴얼에 묻혀 있었을 지도 모른다. 오늘날 하루하루가 전쟁인 이 곳에서, “선언”은 이렇게 말한다. 새로운 세상은 저 밖에 있지 않다. 바로 여기서 그것을 찾기 위해 싸우라. 왜냐하면 “희망의 바깥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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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위 모든 ‘지식인’들은 이론이 이론에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학문의 깊이가 어떠하든, 책상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는 것보다 ‘현실에 참여’하고 자신의 목소리가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꾸기를 꿈꾼다. 어쩌면 이런 지식인들의 정체성이란 이론적 이해의 깊이가 어떻든 남들보다 세상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조금 더’ 잘 알고 있다는 자신감에서 나온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어제 있었던 한국문화연구자들의 논쟁장(캠프 camp)이라는 곳에서 한 발표자의 키노트 스피치는 지식인의 정체성이 이 참여와 실천이라는 기표에 얼마나 집착하는지 너무도 잘 보여주었다.

  그 발표자는 현재 문화연구 진영이 “과학주의, 학문주의”의 과잉, 즉 문화연구 외부에서 던져지는 ‘과학성’과 이론적 정당성의 물음에 대한 답변에 너무 치우치고 있다고 비판했다. 무슨무슨 주의니 하는 말을 굳이 안 써도 문화연구가 사회적 담론과 운동이라는 연구실 바깥의 문제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는 말이다. 해서 이 발표자는 몇 년 전 난리를 쳤던 언론학회의 ‘탄핵방송 공정성에 대한 보고서’ 파동 때 왜 문화연구자들은 침묵했는지 질타한다.

  그러나 적어도 같은 ‘동네’에 있는 나에겐 보고서 작성자의 지명을 둘러싼 논란 이외엔 그 보고서가 담고 있는 소위 ‘프레임 분석’이 얼마나 이데올로기적으로 왜곡되어 있는지, 그리고 그런 결과가 단지 작성자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언론학이 미국 이론의 수입과 모델의 광적인 응용에서 나왔다는- 그래서 그런 보고서들은 이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비판이나 글은 눈을 씻고 찾아 봐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근래 들어 ‘위기’를 논하는 문화연구자들의 글에서는 자신들이 수입했던 이론들에 대한 비판은 찾아 볼 수 없고, 단지 지난 연구들에 대한 분류와 경향,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정치성’의 복원에 대한 부르짖음만을 들을 수 있었다.

  잘라 말하자면, 이런 식의 자기성찰은 ‘이론과 실천’이라는 이 캠프의 오래된 이분법적 사고가 얼마나 깊숙이 내재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운동’을 이야기 하고, 운동가를 초빙할 때도, 그 운동은 ‘문화운동’과 ‘문화운동이 아닌 것’이라는 대립항에서 전자에 치중한다. 성찰을 하자고 했던 3년 전에는 그것이 시작이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용인될 수 있겠지만, 반성문도 한 3년 정도 쓰면 그건 “습관”이 돼버리고 그 내용도 초지일관 ‘실천’의 부재로만 채워진다. 이 정도 되면, 그 발표자가 말했던 ‘문화연구의 무의식’- 그는 이것이 억압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란 부르주아 연구자로서의 ‘실천’에 대한 강박증이자, 마조히즘적인 자기반성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다.

  실천에 대한 강박증은 다시 ‘신자유주의’, 심지어는 ‘자본’이라는 기표 아래 “미디어” 정치경제학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문화연구자들은 바로 지금 자신들이 정치경제학이 비판하고자하는 물신화의 과정에 참여하고 있으면서도, ‘신자유주의’를 마치 저 멀리 우리를 위협하는 외계인처럼 그들의 외부에 있는 적으로 간주하는 오류를 저지른다. 아이러니하게도 한 라운드테이블 발표자가 인용한 맑스의 <헤겔법철학 비판> 한 구절은 “소외란 인간 스스로가 참여하는 능동적 소외”임을 말하고 있었다.(물론 이 발표자는 전혀 다른 의미로 이를 사용했다) 어쩌면 ‘신자유주의’니 ‘자본’이니 하는 것을 자기결정적인 사물로 이해하면서, 그 단어 하나만을 언급하는 것은 자신들이 참여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확산’에 면죄부를 부여받으려는 자기기만에 다름 아니다. 적어도 그 자리에 있었던 상당수의 ‘연구자’들은 그들이 실천성의 기반으로 삼고 있는 영국 문화연구(CCCS)와 이에 관련된 분파들이 오늘날의 토니 블레어와 신노동당(New Labour)을 낳은 조력자들이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는 듯하다. (망각이 아니라면 공부를 안 한 탓이다.) 키노트 스피치의 발표자가 말한 실천적 개입과 간섭은 연구자들의 조직화, 매스 미디어를 통한 투쟁의 알림, 마찬가지 말이지만 테크놀로지의 좌파적 점유를 통해 권력의 획득과 조정을 목적으로 한다. 너무도 유사하게 이들의 주장과 논의는 80년대 영국문화연구의 오류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그 시기 영국문화연구자들이 포스트 포디즘, 통화주의, 세계화 같은 것들을 마치 주어진 사물로, 피할 수 없는 역사적 흐름으로 여겼다면, 나아가 2006년 한국의 문화연구자들은 유령으로서, 담론으로서의 ‘신자유주의’를 이야기한다. 결국 이 신자유주의라는 유령은 그들에게 실체 없는 정치경제학, 특히 ‘미디어’ 정치경제학을 부르는 푸닥거리를 하게 했다. 신자유주의란 무엇인가? 이것은 유령이 아니면 미국이라는 악의 세력이 배후에 있는 음모론이다. 정치경제학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미디어와 문화에 알맞게 다듬어진 ‘미디어 경제학’일 뿐이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캠프에서 찾으려 했다면, 왜 그 자리에선 단 한 사람의 정치경제학자도, 한 사람의 노동운동가도 찾아 볼 수 없었는가?

  논쟁의 전장에서 벌어진 이들의 주장과 회고는 일상과 생계를 보장해 주는 ‘학교’에 몸담으면서 한 발을 ‘실천’에 담가 놓은 부르주아의 충고이자 자위행위가 돼버렸다. 하루하루가 힘들고, 한 학기 등록이 힘든 이들 앞에서 “미국 유학파도 교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더라”는 말은 위로가 아니라 차라리 조롱이다. 생각해 보니 키노트 스피치의 그 발표자는 자신의 학생 중 한 명이 학위논문에 쓸 방법론을 고민하다가 결국 방법론이 주제가 되버렸다는 말을 3년 전에도 했었다. 확실히 망각은 건강에 도움이 되고 보드리야르의 말처럼 ‘학회는 지식의 증진에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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