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dus Vivendi'에 해당되는 글 31건

  1. 2008.01.03 Larvatus Prodeo
  2. 2008.01.03 자유인 중의 자유인
  3. 2008.01.03 Time
  4. 2008.01.03 두 가족 이야기
  5. 2008.01.03 월드컵: 축구, 그 이상의 축구
  6. 2008.01.03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7. 2008.01.03 교육과 정치
  8. 2008.01.03 과학의 이분법 혹은 국익과 생명
  9. 2008.01.03 예술과 노동
  10. 2008.01.03 학문의 "나와바리"
2008. 1. 3.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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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정념에 신중함(태연함)의 가면을 씌우는 것, 바로 거기에 진짜 영웅적 가치가 있다. “고매한 영혼들은 자신이 느끼는 혼란을 주변에 퍼트려서는 안 된다.”(클로틸드 드보) 발자크 소설의 주인공인 파즈 대위는 가장 친한 친구의 부인을 죽도록 사랑하나, 그 사실을 완벽하게 은폐하기 위해 마치 자신에게 정부가 있는 것처럼 꾸며댄다.
그렇지만 정념을(다만 그 지나침을) 완전히 감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인간이란 주체가 너무 나약해서가 아니라, 정념은 본질적으로 보여지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감추는 것이 보여져야만 한다. 내가 당신에게 뭔가 감추는 중이라는 걸 좀 아세요, 이것이 지금 내가 해결해야 하는 능동적 패러독스이다. 그것은 동시에 알려져야 하고, 또 알려지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내가 그것을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당신은 알아야만 한다. 내가 보내는 메시지는 바로 그것이다. “라르바투스 프로데오(Larvatus prodeo) - 나는 손가락으로 내 가면을 가리키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나는 내 정념에 가면을 씌우고 있으나, 또 은밀한(엉큼한) 손길로는 이 가면을 가리키고 있다. 모든 정념은 결국에 가서는 그 관객을 가지게 마련이다. 죽기 바로 직전 파즈 대위는 그가 침묵 속에서 사랑했던 여인에게 편지를 쓰지 않고는 못 배겼다. 마지막 극적 사건이 없는 사랑의 봉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기호는 항상 승리자이다.

R. Barthes, 김희영 옮김(2004), <사랑의 단상>, 동문선. 72쪽

  가면 뒤에 우리가 감추고 있는 정념(passion)은 죽음의 순간까지 보여지지 않으며, 우리 스스로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다. 이 정념은 혼돈과 불안 그 자체이기에 가면을 가리키는 것은 단지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그것을 감추고 있다”는 그 사실 하나이다.(그래서 파즈 대위가 정념을 편지로 썼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정념이기를 멈추었고, 그는 죽었다.)

  자본주의는 어떤 사상이나 이념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자, 우리 스스로가 만든 방식이다. 사람들의 행위와 그것이 낳은 결과는 어느 시대건 분리되지만, 자본주의로 우리의 삶을 만들어가는 오늘날, 그 분리는 지속되어 영원한 현실이자 환상으로 다가온다. 이렇게 분리된 삶은 우리에게 “정체성(identity)”이라는 ‘가면’을 씌워주고 그것이 건강한 것이며 당연한 주체라고 믿기를 강요한다. 박사과정이라는 가면, 회사원이라는 가면, 교수라는 가면.... 우리는 이 정체성을 불안해 하거나 그것에 만족하지 않으면서도, 마치 정념처럼 그 가면 뒤에 숨긴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기에 가면을 벗어 던질 수가 없다. 나는 박사과정이면서 박사과정이 아니고, 회사원이면서 회사원이 아니다. 정념은 늘 이렇게 "부정"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결국 우리는 분열된, 손상되고 모래알 같은 주체로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가 그 가면이 바로 나라고 여길 때, 그 가면이 자기의 얼굴이 되길 갈망할 때, 우리는 오만해지고 용감해지며 ‘건강’해 진다. 결국 우리가 주체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정체성이라는 가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나아가는 것(Larvatus prodeo). 그것뿐이다. “지금 내 모습은 내가 알지 못하는 나의 정념을 감추는 가면이라는 것만 알아주세요”라는, 찢기고 분열된 우리들의 호소이자 절규이다. 우리는 그 정념이 무엇인지, 정체성의 가면을 벗었을 때,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마치 우리의 미래가 정해져 있지 않듯이)

  하지만 가면을 가리킬 줄 아는 용기. 자신이 찢겨지고 상처받은 주체임을 인정하고 고백할 줄 아는 용기는 쉬운 것이 아니다. 때로는 굳이 가면을 가리키지 않아도, 오래된 벗들과 사람들에게서 찢기고 분열된 그들의 모습을, 가면과 정념의 사이를 본다. 오늘 낮 복도 한 켠에서 본 선배의 허름한 슬리퍼와 티셔츠에서도, 어젯밤 아주 우연히 만난 낯선 한 사람에게서도 손가락으로 가리키지 않는 가면을 보았다. 오래된 노래 가사처럼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 서로에게 고통뿐일 지라도” 외로움의 유일한 위안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생각해 보니, 어젯밤은 모두가 자기의 손가락으로 가면을 가리키며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

ps: - 당신이 지금 쓴 이 글도 가면 아닌가요?
    -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가면인걸 알아주시니.

Althusser 흉내내어 글쓰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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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시대상(referent)이 물질성을 띠지 않는, 혹은 한계 짓기 어려운 단어(기호)일수록 그로부터 발생하는 담론은 투쟁을 동반하기 십상이다. 이러한 담론의 투쟁에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는 하나의 전술은 모호한 그 단어에 다른 단어를 관습적으로 대립시킴으로써, 그 단어가 미끄러질 한계를 봉쇄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자유”를 “평등”에 대립시키곤 한다. 이러한 이항대립은 다시 “자유로운 생산과 소유”와 “평등한 분배”라는 또 다른 상식적인 대립항을 낳는다. 적어도 담론 투쟁이란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대립상의 연쇄를 어떻게 만들고 교체할 것인가의 문제가 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서 “자유”란 이런 상식적인 대립항의 재생산에 이처럼 철저히 기여하고 있다. 우리는 이 자유에 마주서는 다른 단어를 찾을 필요가 없다. 단지, 너희들이 말하는 “자유무역”의 “자유”는 바로 이런 것이라고 외칠 것이다.

“어제 한 남자가 쌩-라자르(Saint-Lazare) 지하철역의 3번 선에서 제131열차에 치여 즉사했다.……이 남자의 나이는 스물아홉 살이었다. 어제 베르나르는 플랫폼 끝부분을 이리저리 거닐고 있었다. 승객들 사이를 헤치고 들어간 그는 전차의 불빛을 확인하려고 몸을 기울이더니 마치 잠수부처럼 두 발을 모으고 두 팔을 앞으로 뻗쳐 레일 위로 몸을 던졌다. 두 다리는 절단되고 얼굴은 그을린 채로 그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그는 이제 어린 시절 구슬치기를 하고 놀던, 높은 곳에 올라가 앉은 고양이를 구경하곤 하던 그 오르드네(Ordener)가의 한 모퉁이를 돌아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제 더 이상 튀김냄새와 화장실냄새를 풍기는 좁은 계단을 올라가지 않을 것이다. 그가 부엌 천장 밑의 가스통로에 팔꿈치를 괸 채 『파리인의 자유』지에 나온 구인광고를 읽고 있는 모습도 이제 볼 수가 없으리라. 그는 아버지로부터 기성복 재단사 일을 배웠다. 그런데 다섯 달 전부터 그는 일자리를 잃고 말았다. 구직광고도 내보고 계단도 오르락내리락 거렸지만 번번히 퇴짜를 맞았다. ……그러느라 옷이 걸레가 되어버리는 통에 그는 외출을 할 수 없었다. 당신은 당신의 일손을 거절하는 어떤 세계 속에서 자기가 더 이상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 침대에 며칠씩 누워 있어 본적이 있는가? 베르나르는 벽 저쪽 편에서 어머니가 냄비를 달가닥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다. 그는 어머니에게 얹혀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다시 외출한다. 공장에서는 그를 인부로 쓰려 하지 않는다. 그는 너무 허약했기 때문이다. 사무실에서는 부장이라는 사람이 그의 구멍 난 구두를 놀리듯이 바라보았다. 일자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일곱 시 출근시간에 그는 쌩-라자르 지하철역의 인파 속으로 끼어들어갔다. 사람들은 모두 시간에 얽매여 있으며, 자기들이 맡은 일을 하러 가느라 정신이 없다. 그는 자유롭다. 왜냐하면 그는 박물관에 가거나 또는 공원의 꽃들을 구경하러 가거나,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을 생각하거나 간에 자유롭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서는 특히 가스꼭지의 마개와 지하철 열차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자유가 자기에게는 있다고 그는 느낀다.
아침 일곱 시다. 자유인의 하루가 시작된다. 한 인간이 131번 열차에 치어 으깨졌다. 자유인들 중의 한 자유인 베르나르는 이 자유에 의해 으깨어졌다.”

Roger Garaudy, Grammaire de la liberté(자유의 문법), Éd Socials: A. Vergez and D. Huisman, 이정우 옮김(1998), 『새로운 철학 강의 2』, 인간사랑.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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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 3.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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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말하자면 우리는 시간을 공간 속에 투사하여 지속을 넓이로 표현한다. 계기란 그 부분들이 서로 침투됨이 없이 계속 접하는 사슬이나 연추선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순수지속(durée)이란 이와 같이 숫자로 표시된다거나 명확한 윤곽을 가진다거나 하지 않고 상호적으로 침투되어 있는 질적 변화, 즉 순수한 다질성(hétérogénéité pure)에 다름 아니다. ……등질성(homogénéité)이 조금이라도 지속에 부여되면 바로 그 순간 공간이 암암리에 도입되는 것이다.”

(H. Bergson, 『의식의 직접적 소여에 대한 시론』)

“시간은 자신의 질적이며 가변적이며 유동적인 성질을 벗어버린다. 그것은 측정 가능한 ‘사물들’로 가득 찬, 정확하게 한정되고 측량 가능한 연속체로 얼어붙는다…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공간이 된다.”

(Lukács, 『역사와 계급의식』)

  일상이 지겹다고 느껴지는 건, 반복되는 업무나 똑같은 출퇴근 시간 때문만은 아니다. 지겨움은 그 반복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 영원한 반복은 내가 먹고 살기 위해 취하는 모든 행위가 그 행위의 결과와 분리되면서 시작되었다. 내가 만든 의자는 내가 아닌 남이 쓰기위한 것이며, 내가 쓰는 컴퓨터는 누군지도 모르는 타인이 만든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이 낳은 결과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기에, 그리고 그 결과는 타인의 손에 놓여있기에, 난 내 마음대로 내 일의 결과를 정할 수 없다. 내가 하는 모든 행위가 “노동”으로 바뀐 것이다.

  내 행위가 노동이 되기 전, 시간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순수지속. 어제가 오늘을 바꾸고, 내일은 다를 것이라는 희망으로 오늘을 다르게 살 수 있는 시간들, 그래서 시간은 측정될 수 없는 것이었고 지속의 시간이었다. 노동으로 바뀐 내 행위는 시간의 지배에 놓인다. 이 시간은 조각난 시간이며, 셀 수 있는 시간이며, 매번 똑같은 분침과 초침의 똑딱거림의 시간이다. 그래서 내 노동의 댓가는 나누어진 시간의 합계인 ‘월급’과 ‘연봉’이 된다. 시간을 셀 수 있다는 오만함, 그것은 시간을 도마에 놓고 토막 낼 수 있다는 자본의 능력이다. 내 지속의 시간은 공간 위에서 난도질당한다.

  지속의 시간을 단위와 분류라는 추상의 논리로 환원하여 영원한 원환으로 바꾸어 내는 것. 시간을 공간화 시킨 우리의 소비재는 바로 “시계”이다. 초침이 없는, 흘러내리는 시계가 나오는 미래에셋 광고는 기만적인 운동의 표상인 초침을 없애고 그 초침을 가두어 놓은 시계라는 평면의 공간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모두가 바라는 이 지겨운 노동과 자본의 끊임없는 반복을 한 순간이라도 멈추고자 하는 우리의 바람은, 똑딱거리는 초침이 없어도 초침을 상상하게 하는 둥근 공간 속에 가두어진다.

  백화점과 술집에는 시계가 없다. 시간을 멈추고 싶어 하는 우리의 욕망은 눈으로 보이는 초침보다 더 무서운 생산과 소비의 무한한 순환 중 한 마디에 머무르는 것으로 보상받는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그렇다. 우리는 반복되는 자본의 축적과정이 예비한 내일을 결코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그 내일은 시계가 없어도 오늘 보았던 해를 내일 또 볼 것이 확실한 만큼이나 닥쳐 올 것을 알고 있다. 이 순환이 끝나는 내일이 오길, 그 날이 오길 바랬지만 오지 않았다. “우리에게 내일은 오지 않을 것이다.”

  자명종이 울린다. 오늘도 똑같은 하루를 시작하라는 시간의 명령이 내 머리 위로 떨어진다. 다행이 그 명령은 조그만 금속 조각들이 내리는 것이기에, 정말 명령에 따르기 싫을 때면 그놈을 벽에 집어 던질 수도 있다. 시계보다 무서운 일상의 반복, 끊임없이 나로부터 멀어지려는 내 노동의 흔적들. 어쩌다 용기 있게 그 시계와 일상을 벗어난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 용기도 잠시, ‘게으름’, ‘나태함’, 혹은 ‘백수’라는 이름으로 우린 다시 자명종을 꺼내든다. 다시 한숨을 쉬며 시간의 명령 속에서 내가 벗어날 수 없음을 탄식한다.

No Way 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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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오의 은빛 꿈[The Devil's Miner, 감독: Richard Ladkani, Kief Davidson,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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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가족[An Ordinary Family, 감독: Fredrik Gertten, 2005]


“…그러므로 자본관계를 창조하는 과정은 노동자를 자기의 노동조건의 소유로부터 분리하는 과정[즉 한편으로는 사회적 생활수단과 생산수단을 자본으로 전환시키며, 다른 한편으로는 직접적 생산자를 임금노동자로 전환시키는 과정] 이외의 어떤 다른 것일 수 없다. 따라서 이른바 시초축적(始初蓄積)은 생산자와 생산수단 사이의 역사적인 분리과정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이 ‘시초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것이 자본의 전사(pre-history), 그리고 자본에 대응하는 생산양식의 전사를 이루기 때문이다.…(중략)…시초축적의 역사에서는, 자본가계급의 형성에 지렛대로 역할한 모든 변혁들은 획기적인 것이었지만, 무엇보다도 획기적인 것은, 많은 인간이 갑자기 그리고 폭력적으로 그들의 생존수단으로부터 분리되어 무일푼의 자유롭고 의지할 곳 없는 프롤레타리아로 노동시장에 투입되는 순간이었다.…”

Karl Marx, 김수행 옮김,『자본론Ⅰ』, 비봉출판사. pp.981~983.

  프로그래머의 선택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EIDF 국제다큐멘터리 페스티벌에서 연달아 방영한 “바실리오의 은빛 꿈(The Devil's Miner)”과 “평범한 가족(An Ordinary Family)”은 다른 장소에서 다른 이름을 갖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동일한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볼리비아의 은광산에서 일하는 14살의 바실리오는 10살 때부터 “가장이 없는 집안은 아들이 생계를 책임져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공포영화를 좋아하는 홀어머니, 형이 없으면 무서워 광산에서 일하지 못하는 2살 아래 동생 베르나디노, 아직 만화영화가 즐겁기 만한 여동생 엘레나. 이들은 모두 바실리오가 1200미터의 갱도에서 일해야 할 이유이자, 동시에 그 고단한 삶을 버틸 버팀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실리오를 바라보는 광부들은 이 고통의 역사가 400년이 넘게 끝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바실리오가 학교를 다니고, 광산을 떠나길 간절히 바란다. 광부란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으며 삶을 지탱해 나가는 인생이라는 걸 알기에, 이들은 바실리오에게서 작은 희망이라도 찾아보려 한다.

  2001년, 아르헨티나는 국가부도(Default)를 맞게 된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정유회사의 중역으로 일하던 보로니(Borroni)씨 가족은 파산의 여파로 집을 저당 잡히고, 가재도구들을 물물교환시장에 내파며 하루를 이어간다. 불과 몇 년 전 즐거웠던 가족휴가 사진을 이젠 아무도 쳐다보지 않고, 보로니씨와 부인은 마사지 학원을 다니며 스페인 이민에 마지막 희망을 건다. 아들의 작은 라디오마저 10페소에 팔아치우고 떠난 스페인에서 이들 가족은 작은 일자리를 얻고 꿈에도 그리던, 그러나 한때는 너무나 당연했던 해변가 휴가를 떠난다. 그럼에도 해변가에서의 이들의 여가는 또 언제 닥칠지 모를 불안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들은 아르헨티나에서 아주 “평범한 가족”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의 축적이 어떻게 시작되는가를 설명하면서 “많은 인간이 갑자기 그리고 폭력적으로 그들의 생존수단으로부터 분리되어 무일푼의 자유롭고 의지할 곳 없는 프롤레타리아로 노동시장에 투입되는 순간”을 가리켜 소위 ‘시초축적’이라고 부른다. 생산수단과 화폐를 소유한 이들과 노동력 밖에는 판매할 것이 없는 이들로 사회관계를 양극화시키는 이 과정은 15세기건, 16세기건 자본주의의 탄생기에 국한된 사태가 결코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오늘날 ‘금융 자본주의’, ‘정보, 지식 사회’의 시기에 왜 우리의 바실리오는 아직도 400년 동안 끝나지 않는 시초축적의 고난을 겪어야 하며, 한 때 ‘쁘띠 부르주아’였던 보로니씨는 졸지에 프롤레타리아가 되어야 할까?

  시초축적은 자본가와 노동자의 탄생을 말해주는 정치경제학의 창세기가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노동에 의존해야 하는 자본이 생산수단의 소유자와 노동력의 판매자라는 양극화된 관계를 지속적으로 구성해야함을 보여주는 현재진행형의 폭력을 뜻한다. 이 폭력은 안정화된 ‘선진 자본주의사회’나 소위 ‘신식민지 국가’ 어디에서건 이루어진다. 이 폭력은 자본주의의 강력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이것은 스스로가 노동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일종의 신경질적인 자기방어에 다름 아니다. 한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국적과 인종을 떠나 우리 모두가 자본의 폭력에 시달리고 있음을 함께 느끼는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으며 삶을 지탱해 나가는 존재’는 광부가 아니라 자본 그 자신일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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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차피 새벽잠이 없는 나에겐 요즘 월드컵 중계만한 재미가 없다. 게임도 게임이지만, 가끔씩 튀어나오는 캐스터와 해설자들의 입담도 그런 재미 중 하나다. 얼마 전 브라질의 조 첫 경기를 중계하던 MBC의 해설자(아마도 서형욱인듯)는 수비수 4명을 제끼고 드리볼을 하는 호나우딩요의 모습을 두고, “저런 건 언어로 표현이 안되죠”라는 말을 했다.

  모든 이들에게 축구가 매력적인 것은, 압도감마저 자아내는 스타디움에서 22명의 선수들이 녹색의 그라운드를 누비는 바로 그 이미지 때문이다. 호나우딩요와 같은 한 개인의 천재적인 드리블이나, 4, 5명의 선수들이 일순간 공을 주고받으며 만드는 골은 우리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어떤 것이다. 어디선가 바르트(R. Barthes)는 언어가 갖는 정치성을 지적하면서 “로고스(Logos) 밖에서 정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말은 이미지가 ‘비정치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자, 어떠한 계급의 정치적 이용에도 개방되어 있음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이 ‘이미지’를 그림이나 사진이라는 기호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바르트에게서 이미지란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심적 충격이자 열정을 뜻한다. 즉, 어떠한 언어의 표상도 거부하는 순수한 외연(denotation)인 셈이다.

  대부분의 스포츠가 그렇겠지만, 특히나 경기 후 말과 문자로 '복기(復碁)'가 안되는 축구는 어쩌면 가장 이미지에 가까운 스포츠이며 이로부터 수많은 정치적 담론의 투쟁이 벌어질 수 있는 장이 될 수 있다. 더욱이 이 이미지를 산출해 내는 곳이 바로 "스포츠"라는 점에서 축구는 어느 쪽으로 튈지 모르는 무지향의 정치성을 갖고 있기도 하다. 육체에 대한 근대문화의 중요한 산물이 올림픽이었듯이, 스포츠는 자본주의의 필수적인 사회관계, 즉 법적으로 평등한 교환주체들(임금과 노동력의 교환)의 경쟁을 가장 잘 표상해 주는 담론의 영역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평등의 담론은 봉건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이자, ‘개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을 지향하는 공산주의 이념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 이런 까닭에 월드컵이야 말로 사람들에게 거대자본의 마케팅에 질리게 하면서도, 정당한 경쟁과 투지가 발현되어야 할 평등의 장을 바라게 하는 모순의 결정체인 셈이다.

  열정으로서의 ‘이미지’와 모순된 담론의 장인 ‘스포츠’의 결합은 월드컵을 이미 “축구 그 이상의 축구”로 만들어 놓았다. 코피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유엔이 월드컵을 부러워하는 이유로 “투명한 경쟁”, “동등한 조건에서의 경쟁”, “민족-국가 간 교류의 이점” 이라고 말하며 신자유주의의 이념을 내비친다. 축구라는 이미지, 아니 “열정”이 주는 비정치성은 때로는 국가주의로, 때로는 압구정동의 난동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스포츠가 가진 평등하고 정당한 경쟁의 이념은 국민소득이 100배 이상 차이나는 아프리카 소국을 응원하게 만들고, 토고전 후반 5분에 프리킥을 차지 않은 한국팀을 비난하게도 한다. 이제 월드컵은 더 이상 축구 평론가들의 언어에 머물지 않게 되었다.

  평론가들의 언어가 소외된 자리에 수많은 미디어의 언어와 기업의 언어, 그리하여 자본의 언어가 ‘언어를 거부했던’ 이미지에 부착되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던 스포츠는 균형을 잃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기업들의 대차대조표와 거리응원의 몸살 뿐이다.

  몇 명의 벗들과 함께 맥주 한 잔을 두고 허름한 술집에서 트리니다드 토바고를 응원하는 것. 이것만이 유일한 위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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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성복


그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前方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驛前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未收金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愛人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占 치는 노인과 便桶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市內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 지성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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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 3.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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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art Hall speaking at the Center's International Conference on Mass Culture, 1984>

"실업률이 증가함에 따라 노동계급인 부모들은 교육의 경쟁적 측면을 보다 진지하게 고려할 수 밖에 없었다. 설사 장래성이 없고 저급기술이며, 지루한 노동의 처지에서 행해질 지라도, 숙련공이 되는 것이 실업수당으로 버텨나가는 것보다는 더 낫다는 것이었다. 발의되었을 당시에는 형태상으로 종합교육이었던 것이 [시장에 의해] 요구되는 능력을 주지 못하자, 노동계급의 자녀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숙련화'되고 '계급화'되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경제적 존재의 "어리석은 충동"이라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사회민주주의적 발의안의 실패가 교육에 있어 취약점을 더욱 확실히 드러내게 되자, 자녀 교육에 대한 노동자들의 적극적인 열정은 교육시장을 지향하는 더욱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접근을 지지하는 쪽으로 접합될 수 있었다. 이미 알고 있으며 익숙한 궤도이자, 확실한 길이며, 전통적이고 진부한, 그리고 안전한 영역으로의 거대한 후퇴는 가장 강력하고도 깊숙히 자리한 상식적인 정서 중 하나였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교육에 대한 이 같은 정서는 급진 우파(radical right)의 담론 중에서 가장 호응을 받은 주제 중 하나였다. 1960년대, 학부모 운동(parent power)은 이반 일리치(Ivan Illich)와 '탈학교 운동'을 함께 했던 급진적 운동의 일부였다. 1970년대와 80년대에, 이 학부모들은 보수당의 교육 대변인들이 뒤섞어 놓은 교육정책 중에서 가장 강력한 하나의 카드가 되었다."

Stuart Hall(1988), "The Great Moving Right Show" in The Hard Road to Renewal, Verso. p.54.

  한 때 급진적 좌파임을 표방했던 이들이 파시즘으로, 극우로 돌아서는 모습을 가리켜 그람시는 "변신(transforsimo)"이라는 표현을 썼다. 70, 80년대 교육정책의 후퇴와 이에 동조한 단체들을 바라본 홀의 시선도 그람시의 이러한 표현과 다르지 않다. 교육 문제에 있어 이러한 '변신'은 무엇보다 교육은 "정치적이지 않으며 정치적으로 해결될 수도 없다"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행해진다.

  한 때 고교 평준화를 부르짖다가, 세상이 달라지고 시대가 변했으니 특성화/전문화 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들에게서 가장 중요한 변명이자 논리는 바로 교육의 "비정치성"일 것이다. 여기서 정치라는 것은 한나라당이 목숨걸고 사수하려는 사립학교법 개정처럼 '정치인들과 이사장들의 이해관계'에 국한된 것이 결코 아니다. 특정시기 노동력의 재생산에 가장 적합한 교육체계를 개발하는 것, 그리고 이러한 방식이 "어쩔 수 없다"는 체념으로 귀결되도록 하는 것. 이것이 정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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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과학이건 사회과학이건 "과학"이라는 명사가 붙은 모든 것들은 각자의 고유한 대상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무엇"을 연구하는가에 따라 그것을 "어떻게" 연구할지가 정해지고 그로부터 특정한 분야의 과학은 차별성을 얻게 된다. 흔히 자연과학은 우리 인간을 둘러싼 자연세계를 연구하는 학문이며 인문학, 사회과학은 인간의 정신과 문화,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낸 사회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여겨진다. 고등학교 때부터 이공계, 인문계의 이분법에 익숙해진 우리들은 이렇듯 "대상"도 다르고 따라서 "방법"도 다른 자연과 인간에 대한 각각의 학문을 엄밀히 구분하고자 한다. 이러한 이분법이 과학을 업으로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상식으로 된 것은 그렇다 해도, 어떤 분야건 "과학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조차 이러한 이분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황우석 박사의 연구팀에 대한 "난자 제공 의혹"에 온 나라가 떠들썩 하다. 난치병을 퇴치하기 위한 연구에 과정상의 문제가 있더라도 그 결과와 이익을 생각한다면 대승적 차원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의견, 난자 기증에 "돈"이 오간 것은 분명히 잘 못된 것이라는 말, 이런 사태를 방지하지 못한 보건복지부에 대한 질타, 그리고 제도와 감시체계의 정비 요구 등등...

  어릴 때부터 익숙했던 이공계/인문계의 구분은 요즘 들어 어느 때보다 막강한 위력을 떨치는 듯 하다. 황우석 박사가 처한 "곤경"에 쏟아지는 의혹만큼이나 "황우석 박사 구하기" 역시 대단한 호응을 얻고 있다. 의혹제기 며칠 후 "난자기증재단"이 만들어지고 "난치병 퇴치와 국익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나서야 할 일"이라고 말하는 기증자들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난치병 퇴치'은 생명을 살리기 위한 일이라는 뜻을 담은 셈인데, 그렇다면 "국익"은 무엇일까? 아마도 줄기세포연구로 얻게 되는 생명공학의 선진국 지위와 다가올 바이오 산업에서 주도권이 그러한 국익이 될 것이다. 언제나 인문학과 사회과학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국익", "국가안보" 따위의 용어였다. 한 개인의 생명보다 중요한 국익과 국가안보가 존재할 수 있을까? 좀더 솔직해 지자면, 바이오 산업에서의 주도권이란 곧 과학기술을 이용한 "자본"의 문제이다. 이 자본 역시 소위 인문계 최대의 화두가 아니었던가.

  자연과학이건 인문학이건 "무엇"을 연구할지와 "어떻게" 연구할지가 아무리 서로 다르다 해도, "왜" 과학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구분이 있을 수 없다. 바로 여기서 이공계와 인문계의 이분법이 가져오는 최대의 해악이 존재한다. 자연과학의 목적과 인문학의 목적이 다를 수 있을까? 더군다나 인간의 몸을 연구하는 "생명공학"이 인간 우리 자신에 대한 연구라면, 그 "왜"에 대한 질문은 어느 분야보다 더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일이다. 여성의 건강과 인권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해야 할 일이지, 제도와 법의 정비부터 시작해야 할 일은 결코 아니다.

  생명의 시작인 "난자"를 돈으로 매매하는 것에 대해, 설사 기증이라해도 "보상"을 지불했다는 것에 분개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래서 이런 문제는 "합법적"으로 제도를 수립하여 사회적으로 감시해야 한다는 말들이 나온다. 그런데 "돈"이 오가는 난자매매의 문제는 지적하면서도, 바이오 산업의 선진국을 이뤄내겠다는 줄기세포연구의 "국익"과 "자본"이라는 더 "큰 돈"의 거래에는 왜 아무런 의문과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지... 올해 가을, 황우석 박사와 인문학자들이 모여 무슨무슨 학술대회라는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곳에서 무슨 얘기들이 오갔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 대화가 더욱 필요한 때는 바로 지금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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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 3.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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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의 구본주 작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자본가가 취득하는 노동이 사회적 평균수준의 단순한 노동인가 아니면 더 복잡한 노동인가는 가치증식과정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회적 평균노동보다 고도의, 복잡한 노동은 단순한 미숙련 노동력보다 많은 양성비가 소요되며 그것의 생산에 더 많은 시간과 노동이 드는 노동력의 지출이다. 이러한 노동력은 가치가 더 크기 때문에 고급 노동으로 나타나며, 따라서 동일한 시간 안에 상대적으로 더 큰 가치로 대상화된다. 그러나 방적노동과 보석세공노동 사이의 숙련 차이가 어떻든, 보석세공 노동자가 자기 자신의 노동력의 가치를 보상할 뿐인 노동부분은 그가 잉여가치를 창조하는 추가적 노동부분과 질적으로는 조금도 구별되지 않는다. 방적에서와 마찬가지로 보석세공에서도, 잉여가치는 오직 노동의 양적 초과에 의해서만, 하나의 동일한 노동과정(한 경우에는 면사를 만들고 다른 경우에는 보석을 만든다)의 시간적 연장에 의해서만 생긴다..."

K. Marx. 자본론1권

  늦은 밤, 더 늦은 저녁을 먹으며 TV를 보다 정말 신기한 뉴스를 보았다. 삼성화재가 작고한 한 예술가에 대한 보험금 적용에 무직자의 기준을 적용했다는 것이다. 대충 보험회사 쪽의 인터뷰를 보자니, 예술가는 일정한 수입이 증명되지 않기 때문에 '도시일용노임'을 적용하여야 하며, 이에 따라 정년을 60세로 보고 이런 기준으로 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뉴스에 따르면 문제가 된 것은 예술가를 "무직자"로 볼 것인가라는 직종의 문제와 정년이 샐러리맨들에게 적용되는 65세가 아닌 60세로 된 부분이란다.

  무직자라는 기준의 근거는 일정한 수입이 없다는 것인데, 정확히 말하자면 이 말은 예술가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잉여가치를 생산하는데 기여한게 뭐 있냐는 표현이다. 백번 양보해서 예술가가 "노동"을 한다고 인정해도, 조각상의 형상을 머릿 속에 떠올리고 그것을 새길 때까지 투여되는 고민과 창작의 시간들이 그냥 나오는게 아니라고 해도, 이러한 "숙련노동"은 삼성화재가 보기엔 잉여가치의 기준인 단순한 팔뚝질의 횟수와 거기에 걸리는 시간으로 환산해야 보험금이 산정될 수 있다는 얘기다. 좀 더 과격하게 삼성화재의 본심을 밝혀주면, "네가 배운만큼, 토해내야"하는데 토해내야 할 기준은 단순한 "노동시간"이라는 것이다.

  (이게 오버라고 생각하시면... 보험회사의 약관에서 정년을 "가동연한"이라고 표현한다는 사실을 난 처음 알았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정년이란 우리가 살면서 가치를 끊임없이 생산해 낼 수 있는 가동 시간을 뜻한다는 것이다. 이런 은유을 쓰는 보험회사와 노동부가 노동자를 어떻게 보는지는 뻔하지 않은가?)

  위에 끄적인 맑스의 말은 단순 노동과 숙련 노동의 가치에 대해 논란이 많은 부분이지만, 마지막 구절은 명확하다. "잉여가치는 오직 노동의 양적 초과에 의해서만, 시간적 연장에 의해서만 생긴다"는 것 말이다. 일찌기 "리움"을 만드시고 한국사회의 문화예술 진흥에 막대한 기여를 해오신 삼성그룹께서는 결코 자신들의 본분을 잊지 않으신다. "예술도 노동이며, 우리가 아는 기준은 노동력의 지출시간이다."는 것이다.

  분명히 예술은 노동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의 가치를 증식하는 노동은 결코 아닌 것이다. 그들의 노동과 우리의 노동은 이렇게 건널수 없는 간격을 두고 있다.

ps: 삼성화재를 비롯한 보험회사의 설립목적은 지들 광고대로 "당신이 아프면 안되니까..."가 결코 아니다. 노동자들에 대한 강제저축의 부과. 여기서 얻는 현금 유동성... 진짜 설립목적을 떠올리려면 꼭 이런 어처구니 없는 사태가 터져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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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의 발흥은, 19세기 정치학과 정치기술의 개념이 쇠퇴했던 것과 관련되어 있다. 사회학에서 진정 중요한 것 치고 정치학이 아닌 것이 없다. '정치'는 의회정치, 혹은 개인적 파벌의 정치와 동의어가 되었다. 헌법과 의회가 '자연적' '진화'의 시대를 열었으며 사회는 그 결정적인, 즉 합리적 기초를 발견했다는 신념. 보라! 이제 사회는 자연과학의 방법으로 연구될 수 있지 않은가? 이러한 관점에서 초래된 국가 개념의 빈곤화. 만약 정치학이 국가에 대한 과학이고, 국가는 지배계급이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유지해 나갈 뿐 아니라 자신들이 지배하는 자들로부터 적극적인 동의를 쟁취하는데 사용하는 실천적, 이론적 활동의 총 복합체라고 한다면, 사회학의 근본적 문제들이란 곧 정치학의 문제들에 불과한 것임이 분명하다...."

Antonio Gramsci, <옥중수고>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가진 고유한 특징이 분업의 시, 공간적 가속화라면, 속칭 학문의 "나와바리" 역시 그러한 분업의 요구에 맞추어 끊임없이 분열과 융합을 거듭한다. 어떤 경우는 그 학문의 고유한 영역이 새로 생긴 학문에 분할되고, 그 분할은 처음의 학문이 삼았던 결정적 대상을 모호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 결과, 양쪽 모두가 애초에 풀기를 바랬던 문제에 대해 '분할'을 근거삼아 그것은 이미 지나간(혹은 이미 풀린) 문제라고 넘겨 버리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런 사태는 흔히 실용학문이라 불리우는 영역에서 가장 빈번히 등장한다. '신문방송', '행정', '문화콘텐츠'..등등. 이들은 분업의 가속화에 따른 당대의 기술적 요구로서 등장하며, 이런 이유로 애초에 어떤 특정한 학문으로부터 떼어올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다. 분할시킬 영역이 어디에도 없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어느 학문분야에서건 자신들의 몫이라고 주장할 것이 무한대라는 뜻이기도 하다. 사태가 여기까지 이르면, 결국 이들 신생학과들은 그곳에 밥줄을 대려는 지식인들의 싸움터가 될 뿐이다. 그러한 싸움에 동참하지 않는 이들은, 오만하거나 현실을 모르는 철없는 애송이로 취급될 뿐이다.

  그람시의 말을 따르자면, 정치학은 자신들의 중요한 문제를 사회학에 떠 넘김으로써 "의회정치, 개인적인 파벌의 정치"만을 다루게 되었다. 결국, 신문방송학에서는 이 핵심을 잃어버린 정치를 가져와 "정치 커뮤니케이션", "정치광고"를 만든 셈이다.

Posted by WYW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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