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 3. 0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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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 보급율로 따지자면 세계2위를 달린다는 우리나라에서 다른 것은 모르겠으나 음악 매니아들을 만족시켜 주는 건 단연 P2P 일듯하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한 때 냅스터가 희귀음반이나 부틀렉(Bootleg)들의 보물창고였듯이 말이다. 그러나 80년대까지만 해도 소위 두꺼운 판지에 앨범 자켓을 복사해 붙여놓은 "빽판"들이 청계천과 세운상가 2층 도처에 널렸으니, 나 같이 조숙한(?) 자칭 "언더 음악 매니아"들의 냅스터는 그런 곳이었다. 물론 그곳에 가기 위해선 깍뚜기 입성을 준비하는 형님들의 문화 비디오 구매 공세(때로는 협박)가 있었지만, 어렵사리 구한 핑크 플로이드 빽판 한장으로 다음날 무지몽매한 중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사명은 놀라운 용기를 낳았던 것이다!! 이런 기억을 새롭게 해준 다큐멘터리가 있었으니...바로 마이크 피기스(Mike Figgis)의 Red, White & Blues이다.

  BLUES 다큐멘터리 7부작 중 한편인 이 영화에서 마이크 피기스(Mike Figgis)는 미국 블루스가 대서양을 건너 영국에 유입된 경로와 60년대 소위 White Boy Blues가 다시 미국으로 역수출되는 블루스의 연대기를 그려내고 있다. 말하자면 "불타는 블루스의 연대기"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듯 하다. 사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블루스 하면 떠올리는 것은 B.B King과 같은 전통적인 미국 흑인의 블루스가 아니라 영국의 에릭 클랩튼을 위시한 60년대의 Blues Revival 시기의 곡들이다. 이렇게 본다면 블루스가 전세계적인 장르가 되는데 결정적이었던 시기가 바로 이 때였을 것이다.

  1950년대 쯤으로 추정이 되는 미국 흑인들의 블루스가 정작 자국에서 침체기에 들어섰을 때, 대서양 건너 영국의 뮤지션들은 이 투박하고 단순한 장르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영화에서 누군가의 말처럼 "영국 뮤지션들은 미국이 버린 쓰레기에서 예술을 발견했던 것"이다. 물론 이들은 그 전에 스키플이나 블루 그래스와 같은 전형적인 백인들의 대중음악을 듣기도 했지만 이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모양이다. 아마도 똑같이 단순한 형식을 가졌어도 블루스만이 갖고 있는 단순한 박자와 구성에서 누릴 수 있는 무한한 변주에 매력을 느낀 탓은 아닐지.

  이들이 미국 흑인의 전유물이었던 블루스를 흡수한 자세한 행적과 증언들이 이 다큐멘터리의 중심을 이룬다. 이른바 1960년대 Blues Revival에 대한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는 이 영화는 나아가 하나의 대중문화 장르가 어떻게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변이되어 다시 회귀하는지를 생각하게 해 주는 중요한 기록물이기도 하다. 블루스라는 장르가 영국에 유입된 경로, 즉 미국 블루스 뮤지션들의 유럽투어 및 해적판의 청취로 시작되어, 악보도 없이 레코드와 라디오 만으로 기타 주법을 연습하고, 클럽에서의 연주와 레코드 취입까지. 그리고 이들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흑인들만의 공간에서 그들의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원래 미국 흑인들의 것이었던) 블루스를 연주하게 된 상세한 경로가 그 주역들의 증언으로 펼쳐진다. 앞서 내가 주절거린 80년대의 추억은 당시 에릭 클랩튼이나 존 메이욜 등의 기억과 정확히 일치한다. 에릭 클랩튼은 당시 빽판(영화에선 Vinyl)을 쌌던 싸구려 골판지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거...진짜 두꺼웠어요..."

  에릭 클랩튼, 잭 브루스, 진저 베이커(이상 크림 Cream), 존 메이올, 밴 모리슨, 제프 백, 피터 그린 등은 미국 흑인 블루스 뮤지션들에 대한 그들의 기억과 감탄을 회상한다. 이 회상의 중간 중간에 그 유명한 "Abbey Road Studio"에서 펼쳐지는 톰 존스와 밴 모리슨, 제프 백의 연주는 이들이 어떻게 블루스를 현재까지도 그들의 음악에 녹여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감동깊은 장면이었다.

  하나의 대중문화 장르가 유입되고 재생산되어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는 이 묘한 구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대중문화의 이식과 그 역수입이라는 경로를 이 토록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도 찾기 힘들 듯 하다. 만일 우리의 국악을 중국인이 재해석하고 변형하여 우리나라에서 공연한다고 생각해 보자. 이들에게 우리는 무한한 감사를 느낄 수 있을까? 미국의 경우, 그것도 인종차별이 여전히 심하던 60년대에 미국인도 아닌 영국인이 그것도 백인들이 흑인들의 음악적 공간에 진입할 수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ps: "세운상가의 추억"에 뽀너쓰! 사실 한번은 강제로 "은하철도 999" 딱지가 붙은 문화 비디오를 산 적이 있다. 아는 사람 다 알겠지만, 그건 진짜 "은하철도 999"였다. 자기들과 같은 길을 가길 바라지 않으신 세운상가 2층 형님들의 그런 마음 씀씀이을 생각하면....욕이 나올려구 한다!

Posted by WYW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