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7. 31. 21:54
장마가 끝났다고 하더니 열대야가 제대로 시작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며칠 연속 음주 스케줄이 열대야인지도 모르게 해주었건만 맨정신에 잠을 청하려니 이거 보통일이 아니다.

"아직도 에어컨 없는 방에 살아?"
순진한 눈 크게 뜨며 이따위로 물어보는 사람은 없겠지만, 에어컨 한 번 원없이 틀고 다음 달 전기요금 청구서를 보며 "절전형 에어컨 구입이냐, 이명박 타도냐"고 고민하긴 싫다.
결국 올해도 밤낮으로 고생할 선풍기를 몇 분씩 에어콘으로 달래주면서 보내야 겠다.
뭐 이렇게 해주면 에어컨도 지가 할일이 벽에 걸려있는 것만은 아니란 걸 알 것이고, 에어컨 리모콘도 "왜 나는 TV를 틀 수 없을까?"라는 심각한 자기 고민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열대야가 긴 밤을 만들어 줄 때 들으면 좋은(?) 곡 하나... 

Guitarra, D Melo Tu
 
내가 세상에 물어보면 세상은 날 속일거야.
다른 사람은 다 변해도 나는 변하지 않는다고 모두들 믿고 있지.
긴 밤을 지새우며 나는 새벽의 여명을 기다리네.
이 밤은 왜 이다지도 길으냐.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어제의 부드러운 진실이 오늘은 잔혹한 거짓말로 변했네.
비옥했던 땅조차도 모래땅으로 변하네.
나는 긴 밤을 지새우며 새벽의 여명을 기다리네.
이 밤은 왜 이다지도 길으냐.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인간들은 죽은 신들이지.
이제는 허물어지고 없는 신전에 살았던 그들의 꿈조차도 구원받지 못할 거야.
남은 건 희미한 그림자 하나 뿐. 긴 밤을 지새우며 나는 새벽의 여명을 기다리네.
이 밤은 왜 이다지도 길으냐.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Atahualpa Yupanqui_Guitarra, D Melo Tu

Posted by WYWH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메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중)



 

기형도의 시 속 화자가 평생을 미친 듯이 찾아 헤맨 사랑의 대상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후에 이르러 그 대상이 자신이 될 수 있음을 알았다면, 그 헤메임 속 어딘가에는 사랑의 대상이 이미 숨어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정서(Affekte)란 느낌이나 표상(Vorstellung)과 달리 그 분명한 외부의 대상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현실에 그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러한 정서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메”일 수 있었겠는가? 정서란 막연한 어떤 대상을 자신 안에 이미 갖고 있다는 의미에서 “감정의 확실한 상태”라고 부를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사랑처럼 희망도 이렇게 정서라고 말할 수 있다면, 희망의 대상이 현실에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그 희망의 정서조차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이런 까닭에 정서란 “반쯤은 직접적으로 전해지는 자신의 감정으로서 우리의 의식에 가까이 와 닿는 것”이다.(Bloch, 2004: 142)

사랑을 찾는 헤메임을 불분명한 표상을 대상으로 하면서 끊임없이 그 대상을 찾기 위해 나아가는 갈망이라고 한다면, 희망 역시 그 표상이 불분명하다 할지라도 그것을 통해 자신이 바라는 내용을 지닌 갈망으로 이행하게 된다. 이를 “희망의 목표 없는 진행”이라고 부를 수 있다.(ibid: 143) 정서를 이렇게 아직 의식되지 못한 대상을 향한 나아감으로 보는 관점은 매우 중요하다. 후설의 현상학에서 정서란 ‘성분(Gehalt)’을 내용을 갖는다. 이 때 성분이란 현실에서 인식이 가능하나 아직은 불투명한 대상을 의미한다. 그러나 블로흐의 정서는 이 성분을 뛰어넘는다. 즉 정서에는 이 불투명한 대상을 구체적인 상으로 추적하려는 경향, “아직 체험하지 못한 바를 체험하려는 전의식적 인간의 의향”이 포함된다. 따라서 그는 성분과 같이 정서의 내용이 의식에 아직 인지되지 못한 경우는 “추상적 사고(Gedahke)”로, 구체적으로 인지한 경우를 “구체적 생각 혹은 표상(Vorstellung)”으로 구분한다. 지향행위로서 정서를 파악하는 관점은 앞서 말한 “확실한 상태”로서의 정서란 무엇인지를 보다 정확히 알려준다. 즉 여기서 상태란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건강한 신체를 보존하려는 적극적인 지향으로서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블로흐가 말하는 상태란 “건강(Befinden)”과 같이 자기보존의 욕망이자 목표와 구체적 대상을 찾아가려는 지향행위로서의 정서이다. 이에 반해 사고와 표상은 인간의 의지와 따로 존재하기에 그 지향성을 의지를 통해 갖게 되지만, 정서는 그렇지 않다. 정서는 이미 그 안에 지향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ibid: 144)

무엇인가를 향해 나아가려는 경향에는 추구, 충동, 의향, 그리고 무엇보다 관심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무엇인가를 느끼려는 이러한 경향이 바로 정서를 정적이 아닌 동적인 지향을 자신의 특징으로 갖게 만들어 준다. 정서의 이러한 지향성은 배고픔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배고픔은 무엇인가를 먹어야 한다는 지향을 이미 내부에 갖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배고픔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정서의 개념화란 많은 주의를 요한다. 블로흐는 이렇게 말한다. “정서는 가까이 존재하는 것을 포괄하며, 자신 속에 커다란 방향성을 내포한다. 바로 이를 통해서 정서는 어떤 생명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라 정서는 존재의 방식이기도 하다. 감정은 오직 ‘감정의 움직임’을 표방하는 총체적 개념으로서, 실존적인 개념이 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어떤 ‘직결성(Betroffenheit; Shock)’일 뿐, 이론적이고 객관적인 ‘정신’은 아니다.”(ibid: 145) 블로흐는 자신의 이러한 입장을 키에르케고르와 같은 실존주의나 데카르트, 스피노자의 정서 개념과 명확히 선을 그으며 전개하고 있다. 요컨대 근대 합리주의 철학에서 인간감정은 합리성과 이성의 왕국에 들어오면 안될 속인들의 “수다스러움의 세계”였다는 것이다.

[블로흐 독서노트]

Posted by WYWH



벌써 두 달 반이 훌쩍 지났다. 그 동안 몇 편의 기획서와 보도자료를 썼고, 요즘은 한 프로젝트 보고서의 몇몇 장들을 써내려가고 있다. 정말 오랫동안 내 자신이 문제를 만들고, 그 답을 쓰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던 때와 달리, 누군가로부터 주어진 문제를― 그것도 조금의 변형도 용납되지 않는 문제에 ―이미 나올 것은 다 나온 답들을 조합하여 글을 쓰는 일은 아직도 영 서툴기만 하다. 처음 한 달은 낯설면서도 익숙한 보고서의 ‘문체’에 내 문체(이런 게 있다면)가 적응하지 못한 것이 힘겨움이었다면, 이제는 내가 원하지 않거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주어진 문제와 씨름하는 일이 또 다른 힘겨움임이 되고 있다. 적어도 “쓰고 싶은 글”을 더 많이 써왔던 내게 “써야 하는 글”이 주는 압박이란 그저 회사일의 차원이 아니다. 사고의 깊이와 폭은 분명히 머릿속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표상되는 형식에 의해서도 한계가 지워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쓰고 싶지 않았는데...”라는 생각이 반복되면, 오직 이게 아니라는 빈약한 부정만이 남고 처음 쓰고 싶었던 내용과 형식은 망각에 묻히고 만다.
예를 들어 “써야 하는 글”은 이런 식이다.

“새로운 미디어 플랫폼들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주파수의 희소성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무선 인터넷 환경의 확대를 통해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하려는 이동통신사들의 경쟁은 얼마 전 국회를 통과한 전파법 개정을 통해 가능해진 주파수 경매로 인해 더욱 격화될 전망이다. 따라서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2013년 디지털 전환 후 주파수 대역 재배치 계획에서 고품질과 높은 효율성을 가진 기존 방송 주파수 대역은 더 이상 공적 서비스의 토대가 되기 힘들 수도 있다. 그러나 해외 사례가 보여주듯, 어떤 나라도 전면적인 주파수 경매제를 도입하고 있지는 않으며 정책기관과 이해당사자인 사업자 간의 협의와 조정을 거쳐 다양한 할당방식과 용도를 정하고 있다. 주파수의 제한된 대역을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무수한 기술적 가능성들이 미래에 전개된다 해도 이러한 협의와 조정이 배제된다면 공적 서비스로서의 방송을 위한 주파수 확보는 영원히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만일 이 글이 내가 “쓰고 싶은 글”이었다면, 이렇게 썼을 것이다.

“방송 콘텐츠를 비롯한 ‘비물질 상품(immaterial commodity)’의 생산과 유통에서 상당히 간과되어 온 부분은 바로 현 시기 테크놀로지의 기술적 한계이다. 현재 가능한 주파수 대역의 활용 기술은 바로 이러한 한계를 잘 보여준다. 주파수는 그 대역의 성질에서부터 일정한 자연적 한계를 갖는다. 1GHz 이하 저대역(VHF와 UHF) 주파수의 특성은 적어도 지금까지의 테크놀로지로서는 극복하기 힘든 자연적 한계이다. 따라서 이 주파수를 통해 유통되는 비물질 상품은 분명한 ‘지대(rent)’의 성격을 갖는다. 바로 여기서 주파수를 ‘국민의 자산’이라거나 ‘희소자원’이라 부르는 모호함이 극복된다. 좋은 대역의 주파수를 거래함으로서 얻게되는 방통위의 ‘기금’이나 사업자의 ‘이윤’은 그 실현에 있어 분명히 사회 총잉여의 한 부분임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 지대의 확보를 둘러싼 자본간 경쟁은 임노동 소득의 분배 몫 할당을 포함하는 사회적 투쟁의 다른 형태이다.”

더 많은 정교화가 필요한 구절이지만, 이 글쓰기는 앞에 나온 ‘주파수의 희소성’을 ‘지대’로, ‘협의와 조정’은 ‘사회적 투쟁’으로 몇 단어를 바꾸는 작업이 결코 아니다. 첫 번째 글은 나 역시 경쟁 중인 행위자들 중 한 쪽의 입장에서 서서 그 확보 방안이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두 번째 글은 사업자간 경쟁 자체가 자본과 노동 사이의, 또한 잉여의 분배를 둘러싼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투쟁의 한 외양임을 전제로 하고 있다.


어떠한 명분과 자기 합리화를 동원하더라도 생계를 위한 글쓰기와 그 생계의 지겨움을 넘어서려는 열망이 담긴 글쓰기는 분명히 다르다. 지난 두 달 반 동안 배운 새로운 사실이 있다면, 이러한 두 가지 글쓰기는 ‘구국의 결단(!)’과 같은 치기어림으로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할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두 글쓰기의 분리가 늘 존재한다는 현실에 대한 인정과 그 간극의 확인은 보고서와 기획서 작성 속에서 빈약해져만 가는 부정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점이다.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써야 하는” 글을 부정하는 짓은 오래 갈 수 없을 뿐 아니라 결국에 가선 내가 부정해야 할 대상 조차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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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답을 요구하는 충동 이론에 관해 말하자면, 우리는 정신분석학자들을 요리사에 비유할 수 있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음식물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오로지 충동이라는 매운 양념에 대해서만 골몰하고 있다. 그들은 신비로운 개념을 동원하여, 인간의 여러 충동들을 살아있는 인간의 육체에서 일탈시키고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형성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리비도, 혹은 권력에 대한 의지, 원초적 디오니소스와 같은 우상들이며, 무엇보다 이러한 우상을 절대화시키는 입장이다. 기실 인간의 몸이란 그 자체를 보존할 뿐, 다른 어떤 것을 지니려고 하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도 절대화된 우상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인간의 몸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하기에 프로이트, 아들러 그리고 융은 그것을 ‘경제적, 사회적 전제조건의 변수’로서 한 번도 토론하지 않았던 것이다.”(E. Bloch, 2004: 131)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는 무엇인가? 욕망(desire)이나 욕구(need)니 하는 엄격한 학문적 개념 구분을 하지 말고 질문의 방향을 바꾸어보자. 우리는 어떤 이들을 볼 때 가장 동정심을 느끼는가? 아마도 그 동정심이 깊을수록 내 자신에게는 그러한 결핍이 없다는 안도감 또한 깊을 것이며 바로 그것이 우리의 기본적인 욕구가 무엇이었는지를 돌아보게 해 줄 것이다. 여기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사랑을 잃고 몇 날을 슬픔과 자학 속에서 보내고 있다. 또 한사람은 바로 굶주린 사람이다. 한 발짝을 내딛을 힘도, 구걸할 소리를 지를 힘도 없이 거리의 한 모퉁이에서 쓰러져 있는 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동정심에 깊이가 있다면 누구를 더 동정하겠는가? 우리는 실연의 아픔으로 죽은 이들에겐 “왜 그랬나, 좀 이겨내지...”라고 할지언정, 굶주려 죽은 사람에겐 도저히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성욕’이라 했던 정신분석학이 방기한 욕구, 혹은 보려하지 않은 욕구가 바로 ‘식욕’, 달리 말해 ‘배고픔’이다. 흥미롭게도 이 ‘배고픔’과 ‘성욕’이라는 두 욕구를 어떻게 충족시키거나 통제할 것인지에 대한 답은 오늘날까지도 화해하기 힘든 학문의 두 갈래로 이어져왔다. 무의식에 자리한 성욕과 이를 억압하는 자아와 초자아, 그리고 이 억압의 우회로인 욕구의 ‘승화’가 풍성한 문화의 자양분이 된다는 정신분석학의 주장은 무의식의 구조, 상징과 의미에 대한 분석, 그리고 넓게 보자면 소위 ‘상부구조’라 불리우는 분야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의 흐름으로 이어져왔다. 반대로 배고픔의 기원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를 어떻게 충족시킬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물질적 재화의 생산과 분배에 대한 분석으로, 곧 ‘토대’라 일컫는 영역을 다루는 정치경제학의 분야에서 이뤄져왔다.

이런 구분을 너무 지나친 단순화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프로이트 시대 오스트리아 빈의 정신분석상담소와 당대의 정신분석학자들에게 배고픔은 그들의 문제가 아니었다. 빈에서 자살하는 이들의 90퍼센트가 생활고 때문이었음에도, 목놓아 배고픔을 호소하는 그 어떤 이도 상담소의 환자가 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정신분석상담소의 벽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 “경제적, 사회적 문제는 여기서 취급하지 않습니다.” 결국 당시 정신분석상담소를 찾던 이들은 중산층 이상의 출신들이었고, 이들을 상담하면서 정신분석학자들이 접한 욕구는 은밀한 성충동과 성도착에 대한 괴로움, 그것도 “위선적인 말투와 생각”으로 자아에게 검열당하고 있던 리비도였을 뿐이다. 그에 비해 프롤레타리아의 배고픔은 명료하고도 거짓이 없었다. 어차피 그들의 욕구는 안락의자와 소파가 놓여 진 거실에서 상담해야 할 “유복한 자들의 병”이 아니라, 거리에서 분노와 좌절로 토해내야 할 “고상하지 못한 괴로움”이었던 것이다.(ibid: 135)

“유복한 자들의 병”이라는 말처럼 프롤레타리아의 병과 부르주아의 병은 확연히 구분된다. 오늘날로 비유한다면 집세 걱정 없이, 다음 날 급여가 제때 들어올지에 대한 걱정 없이 살아가는 이들 또한 병을 앓고 힘겨움을 느낀다. 그러나 이들의 힘겨움은 “유복한 자들의 병”이기에 그 해법은 사적인 곳에서 은밀하게, 때로는 뇌물과 같은 어둠의 경로에서만 찾을 수 있다. 달리 생각하면,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의 병은 증세의 문제로 진단된다기보다 그들의 호소가 들려오는 장소와 그 해법의 차이로 밝혀질지도 모른다.

배고픔의 장소와 해법에 대한 이야기는 이것을 대상으로 삼았던 정치경제학의 흐름을 또한 돌아보게 한다. 정신분석학이 간과한 ‘배고픔’이라는 고통과 그 충족에의 욕구를 정치경제학은 어떻게 다루었던가? 이왕 저지른 과도한 단순화를 더 밀고 가보자. ‘토대’ 혹은 ‘경제’라는 배고픔의 장소는 그 욕구의 파악이 양과 척도로 측정가능한, 그리하여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의 너무도 다른 ‘배고픔’은 효용(utility)의 이름으로 동질화되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프롤레타리아의 노골적인 고통과 분노는 또 어떠한가? 이들의 솔직함과 난폭함이 거리에서 폭발할 때, 이는 자본주의 경제의 필연적인 ‘산물’이며 그렇기에 조금 더 나은 인간적인 자본주의를 향한 과도기이자, ‘계획된 사회주의’로의 경로로만 취급되어 왔다. 정신분석학이 ‘성욕’을 전면에 내세우며 “인간의 여러 충동들을 살아있는 인간의 육체에서 일탈”시켰듯이, 정치경제학은 배고픔과 그 갈망의 문제를 인간이 어쩔 수 없는 ‘경기순환’과 ‘축적체제’라는 이름으로 다시 추방시켜 버리지는 않았는가? 결국 배고픔을 다루었던 ‘토대’와 ‘경제’에 대한 학문의 흐름 또한 그 해법이 사적이고 은밀하지 않은 대신, 인간 주체의 갈망과 희망이 결여된 제도와 구조라는 물신(fetish) 속에 가두어 버리고 말았다.

[주]
이 글은 요즘 읽고 있는 E. Bloch(1959), Das Prinzip Hoffnung, Frankfurt am Main: Suhrkamp; 박설호 옮김(2004), 희망의 원리, 서울: 열린책들 의 독서노트입니다. 글 중간의 페이지와 인용은 모두 별도의 언급이 없는 한 이 책에서 온 것입니다. “독서노트”라는 변명이 허락된다면 글의 주장과 내용은 블로흐의 글에 대한 저의 오독과 과민한 반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해서 행여 이 글을 읽으실 때 비판의 대상이나 내용이 모두 블로흐의 것이라고 여기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학습의 습관일지 모르나 그저 텍스트를 눈으로 보는 것과 그것을 읽어내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고 생각됩니다. 텍스트를 읽어낸다는 것은 제가 그것을 또 다른 텍스트로 생산해 내고, 그럼으로써 제 사고의 한계를 스스로 돌아보는 기회를 부단히 만들어 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이후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를 <블로흐 읽기>에 대한 짧은 변명이었습니다.

Posted by WYWH
2010. 7. 11. 22:02


1.
며칠 전 밀렸던 청소와 빨래를 하다 몇 년 전에 처박아 두었던 페이퍼와 파일뭉치들을 찾았습니다. 이미 유효기간이 만료한 것들인지라 버리려 노끈으로 묶고 있었는데 앞 두 세 페이지가 거의 떨어져나가기 직전인 노란색 노트패드 하나가 눈에 띄었지요. 아마도 몇 년 전인지 몰라도 한참 골치 아픈 원전들을 읽어 갈 때, “이해가 안되면 몸으로 하리라!”는 말도 안되는 미련함으로 적어 내려가던 글들이었습니다. 멍하니 보고 있자니, 새롭게 시작하고 만나게 된 일과 사람들 속에서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던 습관들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더 이상 그 노트패드에 글을 쓸 수는 없지만, 몇 년 전까지 쓰던 또 다른 노트패드에는 다시 글을 쓸 수 있겠더군요. 이 블로그 말입니다.

2.
누구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 후배가 (무슨 생각으로 이곳을 여전히 들렸는지 알 수는 없지만), 올 때마다 마지막 포스팅의 “5강 참고자료”만 있다고 불평하던 일이 떠오릅니다. 거의 3년 만에 다시 시작하려 하니 너무 많은 것들이 바뀌어 있더군요. 대충 스킨과 몇 가지만 바꾸었지만 몇 번 포스팅을 하다보면 이런저런 신기한 것들을 많이 해 보리라 기대해 봅니다. 물론 포스팅의 주기는 저의 성실성과 건전한(?) 생활의 정도에 달려있겠지만 말입니다.

Posted by WYW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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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을 쓰다 보면 도지는 병 중 하나가 다른 주제에 눈을 돌리는 짓이다. 그다지 많이 해 놓은 것도 없으면서 지겹다고 느끼게 되면, 새로운 영역이 훨씬 재밌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재미나 의미가 아니라면, “바로 지금 얘기해야만 한다!”라는 역사적 사명을 부여해서라도 발병을 재촉한다.

몇 학기 반복되는 강의 내용만큼이나 학생들에게 다음 학기에는 포함시키고야 말리라던 주제가 하나 있었다. 말로만 두루뭉실 넘어가거나 몇 문단의 메모로 때우던 글을 이틀 끄적이고 몇 장 완성하고 나니 병이 도졌다. 더군다나 근년 들어 사라지나 싶었던 ‘길거리 정치’를 보고 있노라니, 지난 총선의 46%라는 투표율로 “정치적 무관심”을 통탄하시던 그 똑똑하신 분들께 한 마디 하고 싶은 오만마저 생겼다.

그런데 이게 게으름인지, 아니면 다시 마음 다잡기인지 알 수 없으나 열 몇 페이지로 좀 확장해서 써 보려던 결심을 포기하고 말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비판해야 할 대상보다 내 작업이 더 급한 탓이다. 아쉬운 마음에 몇 자 끄적인 글을 올린다. 행여 내년 초에라도 좀 낫게 쓸 수 있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그런데 이런 식의 포기가 게으름 때문인지, 아니면 올해 말 끝내야 할 작업에 대한 결단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하나 확실한 건, 또 하나를 미뤘다는 사실이다.

Posted by WYWH
2008. 4. 2.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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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s said: "The History of every major Galactic Civilization tends to pass through three distinct and recognizable phases, those of Survival, Inquiry and Sophistication, otherwise known as the How, Why and Where phase.
"For instance, the first phase is characterized by the question How can we eat? the second by the question Why do we eat? and the third by the question Where shall we have lunch?"

From Duglas Adams(1979), <Hitchhiker's Guide to The Galaxy>, Del Rey. p.215.
Posted by WYW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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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rew Feenvberg(1995), Alternative Modernity: The Technical Turn in Philosophy and Social Theory,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이론가들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분석’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추상적인 논의는 검증할 수 없거나 이해할 수 없는 용어들로 가득 차 있다는 이유에서 ‘현학적’이라는 조롱을 받곤 한다. 이런 비아냥이 거슬리는 이론가가 “내가 못할 줄 알아!”라는 오기로 막상 현상분석에 들어가면 또 다른 난관에 처한다. 이론의 핵심 개념들은 하나의 기호가 되고, 몇몇 기호들 사이의 차이에 걸맞게 분석대상이 되는 현실이 나누어진다.(‘기호학적 분석’은 흔히 이런 기호들의 체계를 현실에 투영하는 작업이다) 보다 쉽게 가려면, 하나의 모델이나 이행의 경로(path)를 약간 변형하면서 현실을 여기에 우겨 넣으면 된다. 이런 분석이야 말로 언젠가 마르크스가 말한 “현실이 텍스트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가 현실로 들어가는”(Grundrisse) 지독한 관념론에 다름 아니다.

  특히 대중문화를 이런 대상으로 삼을 때, 이런 곤혹스러움은 극에 달한다. 경제학이나 다른 ‘순수’(?) 학문들은 대중들이 잘 모르는 수치와 개념들을 대상으로 하는 탓에 비교적 비판의 사거리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매니아와 평론가들이 난무하는 이 대중문화의 분석은 정반대의 상황에 처한다. 디-워(D-War) 해프닝이 보여주듯, 대중문화의 분석은 이론과 현실의 간극만을 확인시켜주기 십상이다.

  대중문화의 분석이 어려운 이유는 단지 불특정 다수의 ‘준’ 평론가들에게 노출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어려움은 무엇보다 대중문화를 이론과 모델로 ‘분석’하려는, 그래서 무지한 독자들에게 “너희들은 몰랐지?”라는 모멸감을 안기려는 이론가들의 자기확인에서 비롯된다. 바로 여기에서 이론과 현실의 괴리가, 지식인과 무지한 대중들의 위계가, 나아가 혁명의 시기에 경험했던 전위와 대중의 분리가 생겨난다.

  핀버그(Andrew Feenberg 1995)의 <대안적 모더니티(Alternative Modernity)>의 한 장(chapter)은 이런 점에서 대중문화를 어떻게 ‘분석(?)’해야 할지의 고민을 조금이나마 덜어준다. 그는 대중의 의식을 결코 이론가들이 분석해야 하고 비판해야 할 대상(object)으로 격하시키지 않는다. 50년대와 60년대의 SF, 디스토피아 혹은 스파이 영화, 광고 등의 대중문화는 이론가들이 세운 비판의 날 못지않은 대중들의 날카로운 비판의식이 투영되는 장으로 이해된다. 이 글의 한 제목이 보여주듯 비평(critics)은 대중문화를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도리어 대중문화 그 자체가 하나의 비평이 된다(Popular Culture as Critical Consciousness). 이 글에서 그가 택한 영화나 소설, 광고는 작가의 독특한 의도나 스타일의 뛰어남으로 선택되지는 않은 듯 보인다. 007시리즈가 그렇듯, 핀버그가 주목하는 대중문화의 테마들은 당시 충분히 인기가 있었고 많은 이들이 주목했던 ‘대중적’인 작품들이지 ‘예술적’ 작품들은 아니다.(사실 이런 구분 자체가 지극히 ‘현학적’이다.)

  어쩌면 분석이란, 특히 대중문화에 있어 분석이란 대상과 대중들을 평가하는 작업이 되어서는 안된다. 물론 핀버그의 책 전체가 이러한 관점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 번역한 한 장(Chaper 3: Dystopia and Apocalypse)은 적어도 이론과 분석이란 “~에 대한” 작업이 아니라 “~ 안에서 그리고 ~을 통하여” 수행하는 작업임을 보여준다. 이 글이 오래 전에 쓰여졌음에도 다시 읽을 가치가 있다면, 이전까지 도식화되었던 대중문화의 이론과 모델들을 벗어나게 해준다는 미덕, 바로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ps: 위에 올린 번역파일은 거의 초벌번역 수준입니다. 함부로 가져가지 마시고 저를 전혀 모르는 분이더라도 꼭 댓글에 흔적을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강의 자료로 쓸 요량으로 한 작업이니 상업적 목적은 전혀 없으나 이후 다시 수정할 생각이니까요. 분량이 얼마 안되는 번역이지만 작업을 하는 동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번역은 외국어에 도통하여 얼마나 잘 옮기는가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지요. 번역은 분명히 “글쓰기”입니다. 글이 안된다면, 그 난감함은 이를 데 없습니다. 갑자기 번역을 업으로 하시는 분들이 존경스러워지는 밤입니다.

Posted by WYWH

“우리는 무엇에 관해서 꿈꾸어야 하는가?” 나는 이 말을 쓰고 난 뒤에 깜짝 놀랐습니다. 언젠가 내가 “연합회의” 석상에서 앉아 있었던 생각이 떠올랐어요. 내 곁에는 <라보체예 젤로>의 편집인들과 동인들이 자리하고 있었지요. 마르티노프 동지가 일어서서 마치 나를 위협하는 듯 말했습니다. “당신에게 질문할 게 있습니다. 편집 팀이 독자적이라면 당 위원회의 중계 없이 무언가를 갈망할 권리를 지니고 있습니까?” 그의 뒤에는 크리체프스키 동지가 있었는데, 그는 이미 오래전에 플레하노프 동지의 사상을 깊이 연구한 마르티노프 동지의 철학에 심취하여, 다음과 같이 위협적으로 말을 이었습니다. “내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는 마르크스의 사상대로 오직 해결될 수 있는 과제를 제시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는 당과 함께 추진하는 과업을 행하는 과정을 전략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마르크스주의자는 무언가를 꿈꿀 권리를 지니고 있습니까?

이러한 도전적인 질문을 받았을 때, 어떤 냉혹한 느낌이 몸속에 엄습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어디에 몸을 감추어야 할지 생각하며, 내 뒤에 있는 피사레프 뒤에 숨으려 하였습니다.

피사레프는 꿈과 현실 사이의 간극에 관하여 “간극이란 다른 것과 비교될 수 없다”라고 기록했습니다. “내 꿈은 역사적 사건의 자연적 진행 과정을 추월할 수 있다. 혹은 그것은 역사적 사건의 진행 과정을 일탈하여, 결코 이러한 길에 동참할 수 없을 때도 있다. 첫 번째 경우 꿈이란 결코 해롭지 않다. 그것은 일하는 사람들의 노동 행위의 에너지를 촉진시키고 강화한다. … 그러한 꿈들이 창조적인 힘에 나쁜 영향을 끼치거나 그런 식으로 꿈꾸는 모든 능력을 상실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인간은 나중에 상상력을 통하여 일원적이고 완성된 상으로서의 어떤 작업을 예리하게 간파할 수 없을 것이다. 즉 나중에 두 손으로써 실제 생산해 내는 작업을 생각해 보라. 만약에 그렇다면 과연 어떤 동기가 인간으로 하여금 예술, 학문 그리고 실제 삶의 영역에서 방대하고 힘든 작업을 착수하게 하고 완성시키게 하는지 상상하려고 해야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 꿈과 삶 사이의 간극은 해롭지 않다. 만약 꿈꾸는 자가 진지하게 꿈을 생각하고, 삶을 주의깊게 관찰하며, 자기가 관찰한 바를 꿈속의 환영과 비교하여, 양심적으로 꿈의 형상을 실현하려고 작업을 추진한다면 말이다. 만약에 꿈과 삶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존재하고 있다면, 모든 것은 최상의 질서 속에 존재할 것이다.”

이런 종류의 책임은 유감스럽게도 사회주의 운동에서 드물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이에 대한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있을까요? 아마도 자신이 냉정하고, “구체적인 문제들”에 상당히 “근접해” 있다고 자만하고 있는 자들은 이러한 책임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이들은 합법적인 비판을 옹호하는 자들이며, 앞으로 향해가는 합법적인 정책을 옹호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Lenin, Was tun?, Ausgewählte Werke, 1946, S. 315. ; Ernst Bloch(1959), Das Prinzip Hoffnung, Frankfurt am Main: Suhrkamp. : 박설호 옮김(2004), <희망의 원리> 1권, 서울: 열린책들. pp.30-32.에서 재인용.

Posted by WYWH
2008. 2. 12. 00:16

  오늘 저녁 6시에 밤 10시가 넘도록 대학원 3, 4층 강의실은 교육대학원 TESOL(Teaching English to Speakers of Other Languages) 학과 면접으로 바쁘다. 초조하게 기다리는 면접자들의 대화를 지나가며 듣자니, 이곳에 오기 위해 학원수강까지 불사했단다.

  새 정부가 내건 영어 공교육 강화의 파급력은 3차원에 걸치나 보다. 처음엔 영어 공교육 강화가 ‘영어 학원’과 같은 사교육 시장만 키울 줄 알았다. 뉴스에서 말하는 “실력있는 영어교사 부족”이 다시 ‘영어교사 학원’의 부흥을 낳을 줄은 미처 생각 못했다.(사교육 시장에 10년 넘게 있으면서도 난 아직도 이렇게 순진하다.) 그렇다면 이 '영어교사 학원' 역시 강사를 필요로 할 텐데... 어떤 분들이 되실지는 눈에 훤하다. 늦은 시간까지 면접을 기다리는 응시생들에게 그들이 얻을 직업이 “계약직”일 것이라는 사실, 자신들이 배울 몇 년의 커리큘럼이 실제 교육 현장에서 10%도 도움이 안되리라는 사실은 결코 중요하지 않다.
 2008년 한국 공교육의 문제는 평준화도 아니고, 교육수준의 저하도 아니다. 공교육을 ‘받기’위해서나, 공교육을 ‘하기’위해서나 모두 사교육 시장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바로 공교육의 문제이다.
이쯤되면 공교육에서 더 높은 등급을 받기 위해 사교육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교육의 상품을 제공하기 위해 공교육이 존재하는 셈이다. 결국 공교육 ‘개혁’이란 사교육 시장에 어떤 상품을 주문할지 결정하는 과정이 돼버렸다. 이렇게 공교육/사교육의 분리를 전제로 하는 교육개혁은 전혀 교육적이지 않다.

ps: 예전에 쓴 글을 보니,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 아니라 “이명박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 이런 지경은 이미 준비되고 있었고, 이명박은 단지 액셀만 더 힘껏 밟았을 뿐이다.

Posted by WYW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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